여기에 사는 즐거움!
하동 화개의 신흥마을에서 반푼 세칸이 쓰는 편지
'여기에 사는 즐거움'은 <야마오 산세이>의 책 제목입니다. 읽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생태적 삶을 사는 철학자입니다. 감히 그분의 책 제목을 꾸었지만 제가 사는 이곳에서의 즐거움도 만만치 않기에 그리 거북하지는 않습니다.
저마다 사는 방식을 존중한다고는 하지만 주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상한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시골에 내려가 산다는 이야기를 하면 실패한 사람이나 도망자(?)라는 인식을 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도망자, ....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계획과 속도, 능률과 실적에 멍들고 지친 어쩌면 실패하고 도망한 사람인지도 모르지요.
제가 사는 곳은 지리산의 서남향 자락입니다. 행정구역을 굳이 들먹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읽으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덧붙인다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신흥마을입니다. 신흥마을은 행정구역 이름이 아닙니다만 화개면에서 신흥마을을 물으시면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선유동 계곡의 지리산 초입이라 계곡물이 맑기가 그야말로 '명경지수'라 할 수 있으며 아무 데서나 그냥 마셔도 탈 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물을 끓여 마신다면 이상한 짓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초목들의 색깔을 선명히 구별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호흡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 별이 얼마나 총총히 박혀 있는지 곧 떨어질 듯하고 달빛은 손에 잡힐 듯 가깝기도 한 곳입니다.
여기에 사는 즐거움은 이 모두와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고 제가 절대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사는 집은 이 학교의 사택 3채 중 아래 사택 2채에 살고 있습니다. 사택 2채에 산다면 대단한 크기를 생각하실지 모르나 한 채가 불과 10여 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사는 곳은 한 채에 불과하고 나머지에는 사는데 별 소용도 없는 장롱과 도시에서의 잡다한 살림살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상태랍니다. 제 별명이 세칸이니 저에게 꼭 맞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 사택에는 선생님 가족 4식구가 살고 좌, 우로 150m 안에는 집이 없습니다.
신흥마을은 개도 닭도 가축도 기르지 않습니다. 녹차 밭이나 개울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정한 규칙입니다. 덕분에 들리는 건 개울물 소리와 이름도 알 수 없는 새소리, 댓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전부입니다.
전교생이 61명(유치원 포함), 선생님이 7명, 조리담당 2명, 보조교사 3명, 스쿨버스 1명, 기능직 1명이 상주식구이며 원어민 교사와 특수교사가 주 1~2회 방문하고 있습니다.
한 학년이 평균 5~6명이라 수업은 마치 개인교습을 하는 풍경이며 비교적 넓은 운동장에서의 체육 시간은 학생 수가 적은 관계로 저학년과 고학년이 끼리끼리 같이 하기도 합니다.
이곳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과 달리 피부가 제 색깔이지 허여멀건한 아이는 없습니다. 또, 비염이나 아토피를 앓는 아이도 없으며 버르장머리 없거나 인사성 없는 아이도 없습니다.
아이들의 천국은 어른들의 천국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쟁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을 기름이 사회성이 없을 수도 있다며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만 살기 아니면 죽기 식의 가르침은 도시적 사고와 야만적 문명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봅니다.
세이장(洗耳場) 개울물길이 얼마나 거센지 콘크리트 수중보가 패여 나갔습니다. 보수 공사를 위해 물길을 돌려 놓은 모습입니다.
개울가에는 산벚이 허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가로수 벚나무와 달리 야생의 산벚나무에서는 복숭아 향기가 납니다. 싱거운 분들은 막 목욕을 끝낸 여인의 청순한 향기가 난다는 우스개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거짓은 아닙니다.
산 벚나무 밑에 자리 깔고 술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는 여기에 산다면 아무라도 누릴 수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술잔에 꽃잎을 띄우고, ...
500살이나 먹었다는 늙은 푸조나무(느릅나무)에도 파릇하니 새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찬바람이 귀를 땔 것 같은 겨울의 이 나무는 마치 죽은 듯 화석처럼 말이 없더니 이제야 히죽이 웃는 듯도 합니다.
매일 아침 어쩔 수 없이 이 나무에 인사합니다.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띄기도 하지만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가지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세이장의 상류이며 선유동 계곡의 하류입니다. 위쪽의 대성계곡에 의신마을이 있습니다만 오, 폐수를 잘 정화하여 흘려보내므로 전혀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계곡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마력이 있습니다.
계곡물이 흐르다 소(沼)가 된 곳도 있으며 군데군데 수줍은 듯 진달래가 한창입니다.
아래 사진은 집에서 30m 안에 있는 풍경이며 모습들입니다. 청순하고 점잖은 배꽃도 있고 산벚, 솜방망이꽃도 있으며 넝쿨과 동무 한 늙은 감나무도 있습니다.
청순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배꽃을 당겨 봤습니다. 실물보다 더 순백의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눈이 감깁니다.
여린 듯 청순을 가장한 요염이 연한 분홍에 섞여 있습니다. 살짝 색기 어린 동기가 이런 모습일런지,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습니다.
각자의 취향이겠지만 꽃은 홑꽃이 좋습니다. 겹꽃을 풍성하다 하는 분도 있지만 어딘지 속돼 보이고 곰살맞은 아름다움은 떨어집니다.
노란색이 이리 아름다운지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나비같이 폴폴 날아오를 것 같은 경쾌한 리듬도 숨기고 있습니다.
늙은 감나무야! 친구가 그리 그립더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이 자리를 지켰느냐?
어린 나무는 넝쿨을 싫어하여 올리지 않는다 합니다. 마치 할머니 등에 올라타는 아이들같이, 넝쿨들도 늙은 나무를 좋아합니다.
녹차 밭 속의 이 나무는 무슨 나무입니까?
흐드러지게 핀 돌배나무 밑에서 피우는 담배는 달디달았습니다.
화개는 녹차의 고장입니다. 곡우(4/20)를 전, 후하여 녹차를 수확하며 곡우 전에 딴 찻잎을 가공하여 '우전'이라 합니다.
우전은 녹차 중의 녹차이며 생산량이 많지 않으므로 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화개의 녹차는 야생녹차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러는 보성의 녹차 밭을 녹차 밭의 전형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겠기에 사족을 곁들입니다.
야생의 녹차는 바위가 있고 대나무가 자라는 곳에서 생산되어야 상품으로 취급되고 맛을 음미할 만하다 합니다. 대나무의 뿌리는 지표면으로 성장하고 녹차의 뿌리는 땅속으로 뻗으므로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합니다. 또, 대나무의 댓잎은 녹차의 거름이 되며 지구 상의 식물 중 가장 기가 센 대나무와 단단한 바위의 기를 받은 녹차 또한 강한 기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이런 야생 녹차에서라야 부드럽고 담백하며 그윽한 맛을 낸다고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다도'라 하여 차를 다루고 마시는 예법을 중히 여기기도 하지만 짧은 소견으로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에 지나치게 얽매여 차 마시는 시간이 지루하고 즐겁지 않다면 무엇을 위한 예가 되겠습니까?
밥공기에 차를 넣고 적당히 식힌(70~80도) 물을 부어 천천히 우려 마셔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 차를 즐길 수 있습니다. 비싼 다기에 예를 따른답시고 의식처럼 차를 다루다 차 맛을 읽을까 걱정스럽기에 해 보는 군말입니다.
가 보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이 없을 정도로 헤매고 다녔습니다만 나물 많고 물맛 좋은 이곳도 여기에 사는 즐거움입니다.
더불어 아이들이 아이답고 순한 이웃들이 있으며, 문화와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들이 수없이 숨어 있으며 격 없이 마시는 녹차가 흔하디 흔한 것도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고 자랑입니다.
지구의 역사가 얼마입니까? 우리는 혹시 찰나를 사는 하루살이는 아닐런지, ... 여러분은 무엇이 얼마나 바빠 콩닥콩닥 엉덩이에 불을 달고 사시는지, 아니면 얼마만큼의 성과에 만족하실는지, 자신에게 되물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사는 즐거움이 있는 이곳에서 사는 세칸이 하루 온종일 집앞 텃밭을 갈아엎는 기분 좋은 노동으로 초저녁잠에 빠졌다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하루 몇 시간의 잠으로도 피곤하지 않은 이곳의 공기도 여기에 사는 즐거움 중의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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