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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컬렉터

세칸 2008. 1. 6. 20:53

미술과 돈 18

미술사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컬렉터

 

1914년 3월 2일 프랑스 파리의 호텔 드루오에서 20세기 서양미술사에 점을 콕 찍은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미술 컬렉터 13명이 모인 ‘곰가죽(The Skin of the Bear)’이라는 모임이 이 호텔에서 처음으로 현대미술작품을 공개경매했는데,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익을 거뒀다. 이 경매에는 모두 145점의 작품이 나왔는데, 대부분은 당시 활동 중인 반 고흐, 고갱, 피카소, 마티스 등의 작품이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대가들이고 작품가격도 최고인 화가들이지만, 당시 이들은 유럽의 기존 클래식 취향과 달리 너무 앞서 나간 전위적 작가들이었다. 그런데 이 작가들, 즉 후일 서양미술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그룹으로 자리매김한 후기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화가의 그림이 대중 앞에서 공개판매된 것은 이 ‘곰가죽’ 경매가 처음이었다.

 

 컬렉터 김창일씨의 거실. 대림미술관에서 7월 2일까지 하는 ‘리빙룸: 콜렉션’ 전에 그대로 옮겨와 전시 중이다.

 

학교의 미술사 수업이나 미술사를 다룬 책에서는 보통 작가만 다룬다. 하지만 미술의 역사를 쓰는 것은 작가만이 아니다. 컬렉터와 딜러의 힘이 무척 크다. 특히 컬렉터의 숨은 역할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평론가의 평을 좋게 받는다고, 미술 전문가나 큐레이터가 인정한다고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게 아니다. 오빠부대가 있는 가수가 인기가수인 것처럼 좋은 화가란 당연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화가인 것이다. 더욱이 자기 돈을 투자해 작품을 사주는 컬렉터가 많은 작가라면 당연히 주목 받는 작가다. 반 고흐, 고갱, 피카소, 마티스를 알아보고 인정한 건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아닌 컬렉터들이었다. ‘곰가죽’ 모임이 당시 미술계에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성공을 거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곰가죽’을 이끈 사람은 프랑스의 컬렉터 앙드레 르벨이었다. 그는 이 경매가 있기 10년 전인 1903년부터 이 모임을 주도했는데, ‘작품을 모아서 10년 뒤 대중 앞에서 팔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선박 유통업에 종사하던 르벨은 30대 초반에 이미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따라서 여가시간에는 다른 취미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미술 컬렉팅을 시작했고, 미술품을 모으는 게 예술활동일 뿐 아니라 경제활동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 르벨이 훗날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고전 명화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직 상업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피카소, 마티스 등 전위적 작가의 작품도 거침없이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곰가죽’ 경매를 통해 그 작가들이 인기 있고 비싼 작가라는 점을 입증했다.

이후에도 컬렉터들은 세계 미술사에서 작가 못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21세기 현대미술에 가장 큰 점을 찍은 컬렉터는 아마 영국의 사업가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일 것이다. 그는 처음엔 미국의 20세기 후반 작품을 중심으로 모으다가 이후 영국의 젊은 작가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 800점, 2004년까지 2500점을 모았는데 그 중 1000점 정도가 영국작가의 것이었다. 소장작품이 하도 많아 이미 1985년에 소장작품만 가지고 런던에다 ‘사치 갤러리’를 만들었는데, 런던 테이트 갤러리나 대영박물관 못지 않은 명소다.

 

 영국 런던의 사치 갤러리

 

사치가 주목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사치로 인해 영국의 젊은 작가들이 세계무대에서 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작가들이 휩쓸던 1990년대에 대미안 허스트, 마크 퀸, 사라 루카스, 트레이시 에민 같은 영국의 젊은 작가들 작품을 싹쓸이하면서 후원해 이들을 세계미술계의 주목 받는 작가들로 만들어 놓았다. 이 작가들에게는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그룹 이름이 붙여졌다. 이 작가들을 모아 1998년에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전시를 하고, 다음해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도 전시를 했다. 사치는 수집한 작품의 값이 오르면 되팔아 큰 이익을 챙기기 때문에 “투자만을 목적으로 컬렉팅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컬렉터가 새로운 작가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미술사를 쓰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그는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이름난 컬렉터들은 미국 현대작가들을 사모아 그 작가를 후원했고 죽을 땐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기증해 미술관 컬렉션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컬렉터들이 미술계의 주요한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동안은 삼성미술관 리움의 홍라희 관장이 독보적인 위치였지만 점점 젊은 컬렉터들이 미술계를 움직이고 있다. 천안에 기반을 둔 아라리오 갤러리를 운영하는 아라리오 그룹 김창일(53) 회장이 요즘 주목을 받는 컬렉터. 그는 독일,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 주요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산다. 또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 작업실을 지원하고 매달 일정액을 주며 그림을 사는 딜러이기도 하다. 찰스 사치처럼 컬렉터이면서 딜러의 역할까지 하고 있기에 투자를 목적으로 컬렉팅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궤도를 그리는 데 컬렉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 언론에서는 이미 삼성과 김창일 회장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어떤 작품을 사는지에 주시하고 있다.

컬렉터는 작가를 키우는 사람이고 미술시장의 중요한 플레이어다. 컬렉터가 없으면 제대로 된 미술관을 짓기 어렵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컬렉터가 기증하는 작품이 아니면 국민의 세금과 후원금만으로 주요 미술관의 전시실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사를 쓸 때에는 작가 못지않게 컬렉터에도 초점을 둬야 한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