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돈 17
미술시장 살리는 건 ‘큰 손’ 아닌 ‘작은 손’
세계 미술 경매시장이 어느 때보다도 호황이다. 낙찰가격과 낙찰총액은 계속 오르고, 잊을 만하면 경매 신기록이 하나씩 나와 신문 톱뉴스를 장식한다. 국내 언론에서든 해외 언론에서든, 톱뉴스가 되는 건 최고가 기록을 세운 미술품이다. 그래서 경매 하면 으레 몇억원, 몇백만달러 하는 고가 미술품을 떠올리기 쉽다.
뉴욕 크리스티의 '판화, 드로잉 경매'에 나왔던 후앙 미로
하지만 뜻밖의 사실은 경매에 나오고 팔리는 작품의 대다수가 중저가라는 것이다. 작년 한 해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국제 경매시장에서 팔린 작품의 83%가 1만달러(약 1000만원) 미만이었다. 2000달러(약 200만원) 미만의 작품도 56%나 됐다.
미술시장을 돌아가게 만드는 건 사실 몇몇 ‘큰손’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손’이라는 얘기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 특히 요즘 일반인이 미술품 컬렉팅에 관심을 많이 가지면서 500만원 이내의 작품을 위주로 하는 경매와 중저가 작품 전문 전시가 떠오르고 있다.
서울옥션이 출범 이후 지난 7년 동안 경매에서 낙찰 받은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1000만원 미만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이런 1000만원 미만짜리 작품이 차지한 비중은 2001년 55%에서 2005년에는 71%로 훌쩍 올랐다. ‘큰손’보다는 ‘작은 손’의 비중이 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랑가에서도 이런 ‘작은 손’들을 위한 기획전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3월 서울 인사동에 있는 노화랑에서 열린 100만원 균일가 전시는 문을 연 지 이틀 만에 350점이 모두 팔려나가기도 했다.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인 뉴욕에서도 저렴한 경매를 할까? 물론이다. 대표적인 게 ‘하우스 세일(House Sale)’이다. 별 걸 다 파니, ‘창고 세일’이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작자미상의 저렴한 유화, 판화, 드로잉은 물론이고, 100달러에서 시작하는 각종 가구, 카펫, 촛대, 그릇까지 별별 물건이 다 나온다.
뉴욕 크리스티의 '판화, 드로잉 경매'에 나왔던 피카소
하우스 세일은 경매회사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니, 매우 자주 하는 셈이다. 다른 미술품 세일이 뜸한 여름엔 한 달에 두 번을 할 때도 있다. 출품된 작품의 낙찰가격은 500달러에서 1만5000달러 정도까지다. 일반 미술 경매로 의뢰가 들어온 그림도 낙찰 예정가격이 2만달러를 넘지 않을 때에는 하우스 세일로 넘겨진다.
심지어 하우스 세일에서는 내정가(Reserved Price)를 정하지 않고 할 때도 있다. 내정가는 작품 위탁자와 경매회사가 합의한 ‘최저가격’이다. 위탁자가 “이 가격 이하로는 차라리 팔지 않고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는 가격이다. 그러니 내정가 없이 내놓는다는 것은 1달러에라도 무조건 팔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우스 세일 경매장에 가보면 가끔 진풍경이 펼쳐진다. 경매사가 의자 하나를 놓고 “400달러에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아무도 팻말을 들지 않는다. 그럼 경매사가 시작가격을 낮춘다. “300달러? 300달러 있으세요?” 그래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200달러?” “100달러?” 그제야 한 사람이 팻말을 든다. 그럼 곧이어 다른 사람이 팻말을 들어 값을 올린다. 100달러에서 200달러 사이에는 10달러 간격으로 올릴 수 있다. 110달러, 120달러…. 아무리 올라가도 몇백달러 수준을 넘지 못하고 낙찰이 돼 버린다.
뉴욕 크리스티의 '판화, 드로잉 경매'에 나왔던 후앙 미로
이런 위탁자들은 왜 내정가도 없이 작품을 내놓을까? 보통 집을 새로 짓거나 옮길 때 원래 있던 물건을 싹 털어버리고 싶어서 그런다. 때로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어서 유품을 한번에 다 정리하고 싶을 때도 하우스 세일에 내놓는다고 한다. 이런 하우스 세일은 잡다한 물건을 한자리에서 쇼핑하려는 사람, 적은 돈으로 컬렉팅을 시작해 보려는 사람에게 좋은 경매다.
하지만 하우스 세일에서 괜찮은 미술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닥치는 대로 집에 있는 물건을 다 내놓는 식이니, 우리 식으로 치면 ‘이발소 그림’ 같은 것들도 종종 눈에 띈다. 그래서 저렴하고 품질 높은 미술품을 사려는 사람들은 차라리 판화나 드로잉 경매에 간다. 샤갈의 유화는 너무 비싸서 살 수 없겠지만, 몇천달러에 낙찰되는 그의 판화는 한번 사 볼 수 있으니까. 마티스, 후앙 미로, 피카소 등 유럽 근대미술의 스타들도 판화의 경우 1000~3000달러 정도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K옥션이 지난 4월 19일에 판화와 드로잉 등 종이작품만 가지고 경매를 했는데, 낙찰률이 93.6%로 국내 경매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낙찰된 작품의 43%가 100만원 미만, 44%가 100만~500만원이었다.
뉴욕 크리스티의 '판화, 드로잉 경매'에 나왔던 마티스
김원숙의 석판화가 50만~80만원, 이만익의 목판화가 20만~70만원 하는 식이었다. 블루칩 유명화가의 경우엔 장욱진의 석판화가 160만~210만원, 드로잉이 550만~850만원, 김환기의 드로잉이 450만~500만원, 이우환의 석판화가 300만원에 낙찰됐다. 유명화가의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경매에 나돌지 않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중저가 컬렉팅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유명 화가의 유화 이미지를 인쇄해서 파는 판화는 엄밀히 말하면 판화가 아닌 기념 인쇄물에 불과한 것이다.
초보 컬렉터들을 위한 조언을 전문가들에게 구했다. 본인이 소문난 컬렉터이기도 한 K옥션의 김순응 대표는 “처음 시작할 때는 자기 한 달 월급 수준의 작품부터 사기 시작하라. 미술품이 총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 정도되는 게 이상적이다”라고 말했다. 초보 컬렉터에게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또 하나 있다. 10만원, 100만원짜리 작품을 사면서 큰돈을 벌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두 배가 올라봤자 20만원, 200만원이다. 사고 파는 수수료를 떼면 남는 것도 없다. 미술 애호가의 세계, 컬렉터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사는 것이지, 큰돈을 벌기 위한 투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
'사는 이야기 > [훔쳐보기]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명 작가 뒤엔 유능한 아트딜러가 있다 (0) | 2008.01.06 |
---|---|
미술사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컬렉터 (0) | 2008.01.06 |
뉴욕 미술시장“학생 작품이 좋아” (0) | 2008.01.06 |
아트페어는 국제적 ‘미술 5일장’ (0) | 2008.01.06 |
기업의 미술품 투자는 고품격 마케팅 (0) | 2008.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