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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미술품 투자는 고품격 마케팅

세칸 2008. 1. 6. 20:00

미술과 돈 14

기업의 미술품 투자는 고품격 마케팅

 

 

작년 봄 뉴욕 근현대미술관 모마(MOMA)에서‘현대미술의 목소리’라는 대형 기획전이 있었다. 스위스계 금융회사인 UBS의 소장품 64점으로만 꾸며진 전시였다. 필립 거스통, 사이 톰블리, 신디 셔먼, 토머스 스트루스 등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의 현대미술 흐름을 이끌어온 주요 화가와 사진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이뤄진 컬렉션이었다. 우리로 치면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도상봉 등이 줄줄이 이어지는 컬렉션인 셈이다.

 

 UBS 컬렉션의 하나인 안드레 거스키의 사진 `99센트`

 

그러니 매우 탄탄하고 훌륭한 전시이긴 했다. 그러나 색다른 특성과 재미를 찾을 수는 없는, 너무나 뻔한 전시였다. 마치 명품 백화점에서 잘 골라놓은 물건을 구경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 전시는 금융회사로서 UBS의 ‘고품격’‘최상급’이미지를 잘 보여줬다. UBS가 모마에 모두 기증하는 작품으로 만든 전시이기에 전시의 부제는 ‘UBS 컬렉션 작품들’이라고 붙였다. 이 전시는 기업이 왜 미술 컬렉팅을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해주었다.

기업은 왜 미술품을 수집할까?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다. 고품격으로 기업을 홍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 주식회사’라는 책을 쓴 줄리안 스탈라브라스는 “기업이 미술작품을 사들이는 이유는 이제 단순히 회사 건물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컬렉션을 가지고 회사의 이미지를 드높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기업들이 미술품을 사고 파는 것이 현대미술시장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기업과 미술은 현대사회에서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간다. 왜? 비싼 현대미술의 경우 가격이 너무 올라 웬만한 개인은 수집할 엄두를 못 내지만, 기업은 할 수 있다. 또 기업이 미술을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면 품격도 갖추고 사회에 기여도 할 뿐만 아니라 실속도 찾을 수 있다.

 

 패션 브랜드 `르꼬끄스포르티브`의 준이치 티셔츠

 

기업이 미술에 투자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편의상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봤다. 우선 UBS처럼 직접 컬렉션을 갖춘 뒤 미술관에 기증하거나, 삼성그룹처럼 컬렉션을 가지고 고급 미술관을 짓는 식이다. 프랑스의 유통기업 까르푸는 2004년에 르네상스와 초기 바로크 시대 미술작품 130점을 구입해 이듬해 여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를 했다. 이 전시가 끝난 뒤에는 다른 미술관에도 대여를 해줘 계속 전시하고 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예술’의 이미지를 까르푸라는 회사의 이미지로 쓰는 기술이다. 삼성그룹 역시 국내 기업 중 가장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두 번째, 미술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미술작가에게 자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뒤 그 작품으로 회사를 홍보하는 것이다. 작품 값이 억대로 들긴 하지만, 회사의 이미지를 고급화하면서 인테리어도 차별화하는 방법이다. 미국 제약회사인 파이저(Pfizer)는 뉴욕의 유명 미술작가들을 초청해 파이저의 이미지에 맞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의 조각상 같은 것을 만들어 본사건물을 장식했다. 세계 최고의 생명과학 기술을 가진 회사라는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다.

 

 닥스의 체크무늬 바탕 위에 만든 신동원의 작품.

 

이미지가 생명인 패션 브랜드의 경우 이런 미술 마케팅은 더욱 빛난다. 2003년에 루이비통이 현대미술의 스타인 다카시 무라카미에게 루이비통의 로고인 LV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도록 주문한 게 그런 예다. 루이비통은 아예 무라카미에게 핸드백 디자인을 맡기기도 했다. 최근 국내에서는 수입 패션 브랜드 닥스(DAKS)가 요즘 잘나가는 젊은 작가 10명에게 닥스 고유의 체크무늬를 가지고 닥스를 상징하는 ‘D’자 등 이미지를 만들도록 해 매장에 들여놓았다. 상업적인 ‘상품(商品)’과 예술 ‘작품(作品)’의 만남이다. 의류 매장 ‘분더샵’은 최근 청담동에 남성의류 매장을 열면서 젊은 작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했다. ‘풍뎅이’ ‘액션 영웅’ 등 남성적 이미지로 미술작품을 만들어 쇼윈도 남성복 사이사이에 전시했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르꼬끄스포르티브’에서 최근 나온 티셔츠와 운동복에는 일본의 16세 일러스트레이터 준이치의 작품이 새겨져 있다. 이 회사는 준이치를 한국으로 초청해 인사동에서 작품전시회도 열어 줬다.

세 번째, 기업은 때로 미술 공모전을 하거나 작가들을 지원하는 상을 제정하기도 한다. 이 역시 예술에 돈을 쓰면 회사 이미지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에너지 기업인 BP는 ‘BP 초상화 상(BP Portrait Award)’이란 걸 제정해 15년째 시상하고 있다. 영국 왕실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런던의 고품격 미술관 ‘내셔널 포트리트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와 손잡고 인물화를 그리는 젊은 작가를 발굴해 상금을 준다.

 

 무라카미가 디자인한 루이비통 핸드백

 

최근 우리나라 철강회사인 포스코가 만든 ‘스틸아트 공모전’이 이런 예다. 포스코는 오는 5월 24~26일에 ‘철’을 소재로 만든 조각작품을 공개 접수 받은 뒤, 대상 1명에게 상금 2000만원, 우수상 3명에게 1000만원씩을 준다고 발표했다. 이 회사의 상징인 ‘철’을 가지고 만든 예술에 돈을 주는 것이다. 회사 홍보도 하면서 예술을 후원하는 기업으로서 이미지도 가꾸니 일석이조다.

미술뿐 아니다. 재력의 뒷받침이 없이 문화예술은 크게 발전하기 어렵다. 기업이 그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지속적이고 알찬 방법으로 계속 미술과 데이트를 해나간다면, 미술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울 게 분명하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