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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미술시장“학생 작품이 좋아”

세칸 2008. 1. 6. 20:37

미술과 돈 16

뉴욕 미술시장“학생 작품이 좋아”

 

 

덜 익은 열매를 따서 싼값에 사라. 열매는 따낸 뒤부터 익기 시작할 것이다. 익고 나면 값은 수십 배, 수백 배로 뛸 것이다.’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인 뉴욕에서 요즘 미술 컬렉터와 딜러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컬럼비아 대학 재학시절 발탁돼 인기화가가 된 다나 슈츠의 작업실.

 

올해 초 뉴욕 맨해튼의 잭 틸튼(Jack Tilton) 갤러리에서 열린 한 단체전시가 화제다. 아트딜러인 잭 틸튼이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새파란 미대 실기석사과정(MFA) 학생 19명의 작품 30점을 모아서 연 전시였다. 주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대, 헌터대(Hunter College)와 뉴욕 주변에 있는 미술 명문학교인 예일대 학생 작품을 중심으로 걸었다. 기성 화랑에서 학생 작품을 거의 다루지 않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뉴욕에서는 일찍부터 이렇게 학생 신인작가들 작품을 종종 갤러리에서 전시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규모도 컸고, 성과가 아주 좋았다. 전시 사흘 만에 작품의 70%가 팔려나갔다.

잘나가는 뉴욕의 딜러가 학생 작품만 모아 전시를 꾸민 이유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 때문이다. 학생 작품의 경우 아직 가격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다. 따라서 좋은 작품을 보는 ‘눈’만 있다면, 될성부른 작가의 작품을 미리 싼값에 손에 넣을 수 있다. 작가를 잘 골랐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현대미술품의 가격은 거짓말처럼 폭등하기 때문이다.

틸튼 갤러리의 전시에 작품이 걸렸던 애슐리 호프(Ashley Hopeㆍ30)라는 헌터대 학생 화가의 경우 유화 두 점이 걸렸는데, 걸리자마자 각각 3000달러, 6000달러에 팔려나갔다. 학생으로서는 꽤 높은 가격이다. 이번 ‘학생 전시’로 대성공을 거둔 틸튼은 내년에는 미국 서부지역에 있는 미술학교 학생들의 작품으로 이런 전시를 또 할 계획이라고 한다.

 

  뉴욕 미술학교 헌터대의 학생화가 애슐리 호프의 작업실.

 

틸튼 같은 프로 딜러는 어떻게 학생들의 작품을 접하게 될까? 뉴욕의 미술학교들이 하고 있는 ‘오픈 스튜디오(Open Studio)’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1년에 두 번, 학생들의 작업실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파티 같은 행사다. 2~3일 정도 하는데, 그 기간 동안 학생들은 한 학기 내내 작업한 작품 몇 점을 각자 작업실 벽에 걸어놓고, 일반인 누구나 들어와 감상하도록 공개한다. 음악도 틀어놓고, 와인이나 맥주, 간단한 술안주도 같이 준비해 놓는다. 작업실 수십 개가 들어선 건물 안에서 무엇을 볼까 고민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내 작업실에 들어와서 내 그림 좀 봐주세요’ 하고 유인하는 것이다.

물론 그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난 컬렉터, 딜러, 미술평론가, 기자도 있다. 방문객은 작품을 보면서 학생에게 질문을 하고, 학생은 외부인에게 자기의 작품세계에 대해 신나게 설명하는 기회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뉴욕의 미술학교들은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친다기보다는 그림 그려서 먹고사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에선 학생 화가를 ‘신인작가(Emerging Artist)’라 부른다. ‘신인작가’는 다시 말하면 ‘덜 익은 블루칩’이기도 하다. 이들은 딜러와 컬렉터에게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지고 비쌀 대로 비싸진 작가보다는 이렇게 아직 발탁되지 않은 숨은 인재가 더 매력적이게 마련이다. 찾아내는 재미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수익을 더 남긴다.

 

 애슐리 호프의 유화 '피난처'(2005)

 

뉴욕의 컬렉터 노먼 두브로는 월간 미술경제지 ‘아트앤옥션’과 한 인터뷰에서 “요즘 딜러들은 미친 듯이 앞다퉈서 새로운 인재를 찾아 다닌다. 아마 그들은 유치원에도 갈지 모른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미래의 앤디 워홀은 요즘 딜러들의 사냥감’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런 현상을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23세의 대가들’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현상을 짚었다.

어찌 보면 ‘영계 선호사상’이 미술시장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젊은 작가’라면 일단 한 점 따고 들어가는 게 사실이다. 식상한 구세대 작가에게 질린 사람에게 젊은 작가는 신선함을 주고, 가격도 훨씬 낮기 때문에 사고 싶은 욕심도 들게 해준다.

뉴욕 근현대미술관 모마(MOMA)에 걸린 다나 슈츠(29)라는 화가도 컬럼비아 미대 실기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2002년에 발탁돼 뉴욕에서 개인전을 한 뒤 뜬 경우다. 30세도 되기 전에 이미 다나 슐츠의 작품은 수만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작년에는 미국에서 어느 학교 출신 화가들 작품이 비싼지 분석한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예일대 졸업생의 작품을 사라. 1952년부터 1989년 사이에 졸업한 예일대 미대 졸업생 중 경매에서 작품 한 점당 5만달러 이상 팔린 작가는 25명으로, 출신학교별 순위 1위를 차지했다’ 하는 식의 보고서였다.

그럼 미술대학 교수들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적극적으로 세상과 교류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교문도 나서지 않은 학생들이 너무 상업세계에 빠지는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 사치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다나 슈츠의 유화 '개혁가들'(2004)

 

일단 학생화가들도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컬럼비아나 예일 같은 명문 사립대의 미술석사과정은 등록금이 1년에 3만~4만달러나 된다.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 그림을 팔아서 등록금을 보탤 수만 있다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팁으로 생활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현상이 너무 심해지다 보니, 이제는 슬슬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학생들이 너무 일찍 컬렉터와 딜러의 취향에 길들여지면 자기 세계를 진지하게 탐구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에 결국 오래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일대 미대 총장 로버트 스토는 최근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학생화가들이 꼭 오래 기억되리라는 법은 없다”고 말했다. 젊어서 일찍 뜨고 성공하는 화가가 좋을까, 아니면 젊어서는 돈에 신경 쓰지 말고 숨어 있다가 대기만성하는 화가가 좋을까? 어느 한쪽에 정답 도장을 찍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