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유명 작가 뒤엔 유능한 아트딜러가 있다

세칸 2008. 1. 6. 20:59

미술과 돈 19

유명 작가 뒤엔 유능한 아트딜러가 있다

 

 

이번 달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피카소의 초상화 한 점이 또 대박을 터뜨렸다. 자신의 다섯 번째 연인인 도라 마르를 그린 초상화로, 9520만달러(896억원)에 낙찰돼 세계 경매사상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을 찍었다. 최고가는 2004년 5월 뉴욕 소더비에서 1억400만달러에 팔린 ‘파이프를 든 소년’으로 역시 피카소 작품이다.

 

 피카소의 '볼라르 초상화'(1910)

 

평생 여섯 여자와 살았을 정도로 여성편력이 심했던 피카소는 자신의 연인을 모델로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런데 피카소가 즐겨 그렸던 모델이 또 있다. 바로 자신의 딜러였다. 아트딜러는 쉽게 말해 그림 장사꾼이다. 화가의 작품을 가져다 갤러리에 걸고, 전시를 해서 관객에게 보이고, 관객에게 그림을 판 값은 작가와 나눈다. 작가가 그림도 그리고, 전시도 기획하고, 판매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가의 작품을 스튜디오에서 꺼내 세상 밖으로 내놓는 일은 딜러가 한다.

피카소가 남긴 유명한 초상화 중에 ‘칸바일러의 초상화’와 ‘볼라르의 초상화’라는 게 있는데, 칸바일러(Daniel Henry Kahnweiler·1884~1979)와 볼라르(Ambroise Vollard·1867~1939)는 둘 다 피카소의 딜러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다른 유럽 작가들의 딜러이기도 했다. 세잔과 르누아르도 ‘볼라르의 초상화’를 남겼다.

자기 그림을 팔아주는 화상(畵商)이 얼마나 좋으면 초상화까지 그렸을까? 작가와 딜러 사이의 관계를 알면 이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반인은 피카소, 브라크, 세잔, 잭슨 폴록, 앤디 워홀 등 유명 작가의 이름만 기억한다. 하지만 훌륭한 화가의 뒤에는 꼭 훌륭한 아트딜러가 있다. 될성부른 화가를 미리 알아보고 찍어서 홍보하는 역할을 딜러가 하기 때문이다.

딜러는 매달 고정적으로 작가에게 돈을 줘 작품을 사주거나, 작품을 주문생산하면서 작가를 후원한다. 그러면 작가는 밥벌이 걱정 안하고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딜러와 독점계약을 맺을 경우 그 딜러가 아니면 그 작가의 작품을 아무도 살 수도 전시할 수도 없기 때문에 때론 노예계약이 되기도 한다.

 

 피카소의 '칸바일러 초상화'(1910) 볼라르와 칸바일러는 모두 피카소의 딜러였다.

 

딜러는 갤러리를 운영하기 때문에 보통은 갤러리 주인이다. 그리고 유명한 갤러리는 딜러의 이름을 딴 게 많다. 딜러 래리 가고시언이 운영하는 가고시언 갤러리, 매리언 굿맨이 운영하는 매리언 굿맨 갤러리 등이다.

앞서 말했던 피카소의 딜러 볼라르는 이미 19세기 말에 딜러라는 직업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1894년에 파리에 갤러리를 열고, 바로 이듬해에 세잔의 개인전을 열었다. 세잔의 작품이 아직 비싸지 않을 때 미리 알아보고 저렴하게 사들였기에 크게 이익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반 고흐, 고갱, 피카소, 보나르, 르동, 드레인, 루오 등 나중에 크게 성장한 작가들의 작품도 일찍 사들였다. 볼라르는 작가들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작품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고 오랫동안 잘 숨겨놓았다가 때가 되면 한번에 보여주는 작전도 썼다.

볼라르가 처음으로 유명세를 떨친 딜러라면, 칸바일러는 그보다 뒤에 등장했지만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딜러였다. 특히 20세기 초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로 대변되었던 입체파 미술을 적극지원하고 홍보했다.

칸바일러는 부잣집 아들이었던 덕에 스물여덟 살에 이미 파리 시내에 작은 갤러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훌륭한 딜러로 역사에 남은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07년 봄 파리에서 피카소의 스튜디오를 처음 방문하고 피카소의 역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았다. 한눈에 피카소가 대가임을 알아봤다. 그는 즉시 피카소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 화가인 브라크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만난 것도 칸바일러를 통해서였다. 1907년 11월, 칸바일러는 브라크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를 본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르가 “물체를 정육면체(큐브) 모양으로 만든 것 같다”고 말해 ‘입체파(큐비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 칸바일러는 피카소, 브라크, 드레인과 독점계약을 맺는다. 현대 미술계에서 딜러와 작가가 흔히 가지는 관계가 이때 나타난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계약을 맺은 화가들을 홍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작품을 손에 넣으면 우선 모두 사진을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그 사진으로 언론이나 해외 미술계에 홍보를 했다. 입체파 미술과 대표작가들을 알리는 책과 도록도 여러 권 썼다. 그림장사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미국의 딜러 리오 카스텔리

 

20세기 초 유럽에 이런 딜러들이 있었듯, 20세기 후반 미국에는 미국의 현대미술을 키우는 딜러들이 있었다. 리오 카스텔리(Leo Castelli·1907~1999)는 뉴욕에서 아주 유명했던 딜러다.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등 미국의 현대미술이 인기를 얻는 데 그의 역할이 컸다. 후대 사람은 그를 가리켜 ‘부르주아 미술시장’을 개척했다고도 말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팝아트 작가들을 홍보하고 작품을 판매하는 통로를 열었기 때문이다.

원래 파리에서 갤러리를 했던 리오 카스텔리는 1941년에 뉴욕으로 이민간 뒤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처럼 당시 미국에서 막 활동을 펼치던 젊은 작가에게 눈을 돌렸다. 1957년에 첫 갤러리를 내고 미국의 대표적 팝 아티스트인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개인전을 열었다. 미국 팝아트가 발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볼라르, 칸바일러, 리오 카스텔리 같은 거장 딜러들의 공통점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했다는 점이다. 미술 장사꾼이긴 하지만 안전한 대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돈을 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술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도 필요한 게 이런 딜러다. 몇몇 블루칩 화가들의 작품을 손에 넣고 주무르는 딜러가 아니라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세계적인 스타로 키워낼 수 있는 딜러 말이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