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사진ㆍ판화도 희소성 있으면 수십억원

세칸 2008. 1. 6. 17:32

미술과 돈 10

사진ㆍ판화도 희소성 있으면 수십억원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미술작품이 우리 집에 있다면? 물론 기막히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만일 세상에 똑같은 게 열 개 있는 ‘열 쌍둥이’ 작품이라면? 그 중 하나는 뉴욕 모마에, 하나는 파리 퐁피두센터에, 하나는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하는 식으로 세계 주요 미술관에 하나씩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미국의 갑부 빌 게이츠도 하나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 삼성미술관 리움 홍라희 관장도 하나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 똑같은 작품이 만일 우리 집에도 하나 있다면? 세계에 딱 하나뿐인 작품을 가지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아닐까?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달밤의 연못`

 

똑같은 작품을 수십 장, 수백 장 찍어낼 수 있는 사진이나 판화가 초고가에 팔리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물론 같은 작가의 작품일 경우 대체로 사진이나 판화보다는 유화나 드로잉이 비싸다. 세상에 여러 개 널린 것보다는 유일무이한 것에 대한 가치가 높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에 여러 개 존재하는 똑같은 작품이라도 매우 값진 것이라면 그 가치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권위 있는 미술관과 유명 컬렉터들이 나눠 가지고 있다는 ‘로열 족보’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지난 2월 뉴욕 경매시장과 세계 미술계를 뒤집어지게 만든 것은 1904년에 제작된 사진 한 장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사진 113장을 한번에 소더비 경매에 내놓았는데, 그 중 에드워드 스타이켄이라는 작가의 사진 ‘달밤의 연못(The Pond-Moonlight)’이 290만달러(29억원)에 낙찰돼 사진으로는 사상 최고 경매 낙찰가를 기록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개인 컬렉터가 산 것이었다. 깜깜한 달밤에 숲 속의 연못을 숨죽이고 바라보는 듯한 이 사진은 전 세계에 딱 세 장만 남아 있는데, 한 장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또 한 장은 그 유명한 뉴욕 근·현대미술관 모마(MOMA·The Museum of Modern Art)에 있다. 이 사진을 산 사람은 이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모마와 같은 대열에 오른 것이니, 돈이 충분히 있고 미술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컬렉터라면 29억원 정도야 쓸 법도 하지 않을까?(1906년에 이 사진이 처음 팔릴 때 가격이 75 달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눈이 돌아갈 일이긴 하다.)

 

 작년 가을 뉴욕 크리스티 사진경매 프리뷰 전시 때 모습.

 

같은 경매에서는 미국 근대사진의 대표 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작품 두 점도 각각 100만달러가 넘는 가격에 낙찰됐다. 그의 아내이자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근대화가 조지아 오키페의 손을 찍은 ‘손’과 나체를 찍은 ‘누드’다.

사실 사진이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예술의 영역으로 올라선 지는 이미 오래됐다. 하지만 경제적인 가치로도 여느 순수예술 장르 못지않게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은 세계 미술시장에 새로운 청신호다. 실제로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는 일부 빈티지(vintage·구식) 사진 값이 휙휙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주로 뉴욕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작년 가을엔 에드워드 커티스의 사진첩 ‘미국 인디언’이 140만달러(14억원)에 팔려 화제가 됐다. 40장 시리즈가 들어 있는 묶음이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바로 한 달 뒤에 시리즈가 아닌 한 장짜리 사진 즉 리처드 프린스가 말 타고 달리는 카우보이를 찍은 ‘무제’라는 제목의 사진 한 장이 120만달러(12억원)에 팔려 사진의 위력을 당당하게 과시했다.

 

 스티글리츠의 `누드`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모든 사진의 가격이 뛰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세계 미술계의 눈을 휘둥그레지도록 만든 두 사진, 에드워드 스타이켄과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작품은 꼼꼼히 살펴볼 만하다.

우선 이 두 작가는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사진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으로 사진예술의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특히 이번에 최고 기록을 세운 스타이켄은 사진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현상해 은은한 회화적 이미지를 집어 넣는 특수한 방법을 썼다. 화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또 칠하며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정성을 들여 사진을 뽑아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 ‘달밤의 연못’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어찌 보면 수묵화 같기도 한)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사진 가격이 정해질 때에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뻔한 기본 원칙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른 미술작품의 경우와 똑같이 희소성이 값을 정한다는 얘기다. 사진이라고 무한정 마구 찍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와 딜러는 필름 하나당 찍어내는 사진의 수(에디션)를 제한해서 가격을 통제한다. 물론 그 수가 적을수록 비싸다. 비싼 작가는 10장 이내로 찍는다.

 

 스티글리츠의 `손`

 

판화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에디션 수를 제한한다. 그리고 에디션 수는 가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요즘 일부 젊은 딜러들은 좋은 사진작가의 작품을 일반인들도 소장할 수 있도록 보급하기 위해 일부러 에디션을 수백 장으로 늘려 많이 찍기도 한다. 따라서 굳이 투자의 목적으로 사진작품을 사는 게 아니라면, 에디션이 많은 작품으로 저렴하게 컬렉팅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고공행진하는 사진에 대해 간과하면 안 되는 점 또 하나. 초고가에 팔리는 사진은 모두 20세기 초반에 구식 방법으로 현상한 사진이라는 것이다. 결국 희소성 얘기다. 요즘은 디지털 사진기술 덕분에 구식 방법으로 사진작품을 하는 작가는 드물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가의 땀방울이 들어간 아날로그의 희소성에 대해 사람들이 값을 치른다는 얘기다.

영국 출신으로 30년째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가 말했다. “현대미술에서 디지털 사진이 너무 퍼져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사진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랐다. 구식으로 만든 데다가 이제는 다 없어져 더 이상 구하기도 힘든 희귀한 옛 사진만이 다른 사진과 달리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