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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마다 제값 받는 곳 따로 있다

세칸 2008. 1. 6. 17:24

미술과 돈 9

작품마다 제값 받는 곳 따로 있다
자국서 아무리 비싸게 대접받는 화가라도 외국 나가면 가치 몰라줘

 

 

 

“박수근이 한국에서 제일 인기 있고 제일 비싼 화가라는데, 외국인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외국 경매에서도 박수근이 나오면 비싸게 팔리지만, 다 한국인이 사는 겁니다.” 크리스티 경매회사 홍콩지점의 아시아 현대미술 부장인 에릭 장씨가 최근 ‘미술쇼핑’을 하러 한국에 왔을 때 했던 말이다.

박수근은 한국 사람들이 그 가치를 가장 잘 안다, 한국의 정서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은 한국 사람처럼 박수근을 높게 평가해 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국 작가는 한국에서 제일 가치를 인정받는다. 마찬가지로 미국 작가는 미국에서 제일 비싸고, 영국 작가는 영국에서 제일 비싸고, 중국 작가는 중국에서 제일 비싸다.

이 무슨 당연한 얘기냐고? 하지만 이는 ‘미술장사’를 할 때 아주 중요한 기본 요소다. 특히 현대미술 시장에서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제프 쿤스가 꽃·나무로 만든 조각 ‘강아지’가 2000년 여름 뉴욕 록펠러 센터에 전시될 때의 모습. 쿤스는 미국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고급 미술의 소재로 사용해 미국에서 매우 인기 있고 비싸게 팔리는 작가다.

 

런던의 현대미술 경매에서 가장 인기 있고 비싸게 팔리는 화가는 루시앙 프로이드(Lucian Freud·83)라는 영국의 원로 초상화가다. 별의별 실험적·전위적 미술이 판을 치는 요즘 같은 때 이 작가는 사실적이면서도 인간미가 깊게 배어 있는 지적인 분위기의 초상화를 그린다. 영국인의 도도함과 자부심에 걸맞은 초상화이니 런던에서 경매 때마다 돈을 긁어모으는 게 당연하다. 올해 2월에는 그의 초상화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726만달러(72억원)에 팔려 크게 화제가 됐다. 생존작가로는 매우 높은 가격이다. 미국의 권위 있는 미술월간지 ‘아트뉴스’가 2004년 4월에 발표한 ‘세계에서 제일 비싼 생존화가 10명’ 중 영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들어간 사람이 바로 루시앙 프로이드다.

 

 영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초상화가 루시앙 프로이드의 작품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하지만 루시앙 프로이드는 뉴욕 현대미술 경매에는 잘 나오지도 않고, 별로 눈길도 끌지 못한다. 대신 미국 냄새가 짙은 미국 화가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작년 봄 뉴욕 현대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가장 크게 화제가 됐던 것은 에드워드 하퍼(Edward Hopper·1882~1967)라는 미국 근대시기 화가가 그린 ‘기차 안에서’(Chair Car·1965)라는 그림이었다. 1965년 당시 미국 기차 내부의 쓸쓸하고 조용한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크리스티에서 1400만달러(140억원·수수료 포함)에 팔렸는데 이 작가로서도 사상 최고 가격이었다.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잘나가고 고가에 팔리는 작가가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게 팔리리란 법은 없다. 실례로 뉴욕 현대미술 경매 때마다 빠지지 않고 여러 점씩 출품되는 ‘블루칩 작가’로 제프 쿤스(Jeff Koons)라는 사람이 있다. 나무로 조각한 오색찬란한 꽃바구니, 실제 아내와 나체로 찍은 포르노풍 사진 등 ‘키치’(Kitsch·싸구려 상업미술을 일컫는 말) 같은 이미지가 뉴욕 경매시장에 나오면 수십만달러에서 수백만달러까지 팔린다. 초현대적 감각을 지닌 뉴욕의 미술시장에서 볼 때 제프 쿤스는 현대미술의 리더그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런던의 경매나 일반 화랑 전시에서 제프 쿤스를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제프 쿤스의 괴팍한 미학을 이해하고 값을 치를 컬렉터가 과연 아시아 지역에 얼마나 있을까?

반대로 제프 쿤스 같은 현대미술이 각광받는 뉴욕에서는 르누아르처럼 예쁘고 단정한 그림을 그린 작가는 인기가 없다. 당연히 뉴욕의 인상주의 미술 경매에서는 르누아르의 작품은 거의 출품되지 않는다.

미술작품마다 제값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전 세계에 경매장을 둔 국제 경매회사들은 작품을 접수받으면 ‘이 작품을 어디로 보내서 팔아야 잘 팔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런던에서 잘 팔릴 작품을 뉴욕 소더비에 들고 갔다면, 소더비 측에서는 알아서 그 그림을 런던으로 보낸다.

아시아 미술작품도 팔리는 지역에 따라 출품되는 작품의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직 ‘아시아 미술’하면 골동품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뉴욕과 런던에서는 아시아 미술이 도자기와 고서화 등 고미술 중심으로 팔린다. 반면 홍콩의 경매에서는 아시아의 미술을 좀더 잘 이해하는 컬렉터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아시아 현대미술이 잘 팔린다. 만일 당신이 중국에서 요즘 인기 있는 현대미술 그림을 들고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를 찾아간다면? 그 회사는 그림을 접수한 뒤 홍콩으로 보낼 것이다. 그 그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곳은 홍콩이기 때문이다. 아예 뉴욕 크리스티와 소더비에는 지금까지 아시아 현대미술을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없었다.

 

 2005년 11월 9일 K옥션이 주관한 경매에서 7억1000만원에 팔린 박수근 화백의 `나무와 사람들`.

 

같은 미술품이라도 지역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까닭엔 숨은 이유가 또 있다. 각 지역마다 경매회사에서 경매를 할 때 자국의 작품을 중심으로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경매도록의 표지에 커다랗게 나오는 작품, 신문마다 잡지마다 커버스토리를 장식하는 작품은 자연히 사람들 관심을 더 많이 사고, 따라서 비싸게 팔릴 확률도 높다. 예를 들어 뉴욕의 경매회사에서 현대미술작품을 팔 때 우리나라의 유명 작가와 미국 유명 작가가 같이 나온다면 담당자는 어떤 작품에 더 공을 들일까? 우리 작가 작품의 경우 경매회사 직원이 그 작가를 잘 모르고 작품에 대해서도 생소하기 때문에 홍보를 크게 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자기에게 익숙한 자국의 작가는 홍보하기도 쉽다. 자연히 담당직원은 고객에게 작품을 소개할 때나 언론에 홍보할 때 자기가 잘 아는 미국 작가들 중심으로 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 작가들은 똑같이 좋은 작품을 내놓아도 현지 출신의 작가와 경쟁해 잘 팔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미술과 돈의 상관관계에 ‘지역’이라는 요소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