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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여성 컬렉터가 세운 뉴욕 근·현대 미술관

세칸 2008. 1. 6. 16:40

미술과 돈 5

세 명의 여성 컬렉터가 세운 뉴욕 근·현대 미술관

 

 

내가 죽을 때 이 그림들 다 들고 가겠습니까? 어차피 다 기증하고 가지 않겠어요?”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좋은 미술품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미술관과 박물관에 안치된다’는 얘기가 있다. 컬렉터가 아무리 아끼는 작품이라도 무덤까지 그 그림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 어차피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거나, 아예 소장품을 가지고 미술관을 만들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야 세울 수 있고, 수입이라고는 입장료 수익밖에 낼 게 없는 미술관. 그래서 미술관은 당연히 작품이나 돈을 기증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뉴욕근·현대미술관 모마

 

미술관과 컬렉터, 미술관과 돈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 뉴욕의 근·현대미술관 ‘모마(The Museum of Modern Art)’일 것이다. 모마는 유럽의 빛나는 근·현대미술 작품이 모두 모여 있는 보고(寶庫)다. 재작년 11월 맨해튼에서 새 건물로 개관을 해 큰 화제가 됐었다. 피카소, 브라크, 세잔, 마티스, 몬드리안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유럽의 근대 미술작가에서부터, 초현실주의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탈리아 화가 조르지오 디 키리코, 독일의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표현주의 작가까지, 모마에는 서양미술사의 핵심 작품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런 주옥 같은 작품을 유럽에서 끌어다 뉴욕 미술관 안에 들이는 데에는 20세기 초 미국 부자 컬렉터들의 역할이 컸다. 그 중 특히 대부호의 부인인 세 명의 컬렉터, 애비 록펠러(Abby Rockefeller), 메리 퀸 설리반(Mary Quinn Sullivan), 릴리 블리스(Lillie Bliss)는 직접적으로 모마를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이다.

물론 순전히 이 세 컬렉터의 돈만으로 이 미술관이 탄생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1910년대부터 뉴욕에는 ‘현대미술관이 생겨야 한다’는 분위기가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잘 파악한 미국의 작가 아서 데이비스(Arthur Davies)는 미술관 건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컬렉터를 꼬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위의 세 부인을 설득한다. 그들이 좋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고, 상류층으로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데이비스는 알고 있었다.

결국 1929년 세 여성 컬렉터는 모마라는 역사적인 미술관을 세운다. 세 사람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모마의 주요 컬렉션을 이뤘는데, 그 중 특히 애비 록펠러 여사의 공이 컸다. 그래서 모마의 야외조각공원 이름은 록펠러 여사의 이름을 따서 ‘애비 알드리치 록펠러 공원’이다. 이 미술관의 위치도 록펠러 가족이 내놓은 땅이고, 작년엔 애비의 아들 데이비드 록펠러(90)가 “내가 죽으면 1억달러(약 1000억원)를 모마에 기증하겠다”고 서약했으니, 이 미술관은 록펠러 가족의 덕을 톡톡하게 입었다.

 

 2004년 11월 모마 재개관 첫날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모마의 첫 관장은 알프레드 바(Alfred Barr)라는 천재적인 큐레이터였는데, 이 역시 애비 록펠러가 직접 인터뷰를 해서 뽑은 사람이다. 알프레드 바는 서양 근·현대미술사의 궤도를 그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모마의 개관에 맞춰 세잔, 고갱, 쇠라, 반 고흐 등 네 작가를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놓고 기념전시를 해 크게 성공한다. 이 네 사람을 그런 반열에 올린 것은 당시로서는 참신한 생각이었다. 바는 그렇게 시대의 변화하는 흐름을 읽는 것에 뛰어났다.

알프레드 바의 또 다른 능력은 돈을 다루는 것이었다. 모마는 1929년 개관하자마자 경제대공황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컬렉터들을 만나 설득하는 데 주력한다. 바는 꼭 필요한 작품을 사기 위해서 모마가 이미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되팔기도 했다. 모마 컬렉션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인데 이 작품은 바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2년 동안 걸쳐 공들여 산 것이었다.

‘아비뇽의 여인’은 피카소가 이전의 작품 경향에서 훌쩍 앞으로 나아간, 본격적으로 미술의 새 영역을 연 작품이다. 우선 여자의 얼굴을 아프리카 가면의 이미지로 그려 충격적인 시각적 요소를 준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자는 얼굴은 앞면, 몸은 뒷면이다. 사물을 한 장소에서 한 시점으로만 보고 그릴 게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보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릴 수 있다는 것을 피카소는 보여주고 있다.

바는 이 작품이 지닌 이런 미술사적인 중요성을 꿰뚫고, 이것을 모마에 사들이려고 했지만 이 그림은 당시 돈으로 2만8000달러나 됐다. 한 익명의 기부자가 1만달러를 냈지만 모자랐다. 그러자 바는 당시 모마가 가지고 있던 드가의 작품 ‘경마장(Racetrack)’을 과감하게 팔아 나머지 돈을 마련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모마가 소장한 피카소의 또 하나 명작으로 ‘거울을 보는 소녀’(1932)라는 그림이 있다. 이는 바가 대부호의 부인인 아이렌 구겐하임 여사에게 1만달러를 받아서 산 것이다. 여자의 몸을 왜곡해서 제멋대로 그리고 갖가지 현란한 색을 쓴 이 그림을 구겐하임 여사가 좋아했을 리 없다. 하지만 구겐하임 여사는 바에게 돈만 주었을 뿐, 그 돈으로 무엇을 살 것인지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미술종사자들은 “기업이 미술관을 후원하려면 컬렉션을 기증하는 것보다 그냥 돈으로 주는 게 낫다”고 얘기한다.

이후 모마가 세계 최고 근·현대미술관 자리를 꿋꿋이 지켜오기까지는 수많은 후원자의 힘이 컸다. 특히 모마는 8년 전부터 새 건물을 짓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그 결과 걷힌 돈이 7000억~8000억원이다. 150억원 이상을 낸 사람이 10명이나 되는데, 새 건물 전시실의 일부는 이들의 이름을 붙였다.

미국에 있는 미술관 중 지금까지 가장 큰돈을 기증 받았던 미술관은 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in Houston)으로, 텍사스의 자선사업가인 캐롤라인 로(Caroline Law)가 이 미술관에 3300억원이나 냈다. 미술관은 돈을 필요로 한다. 부자들의 지원이 아니라면 역사에 남을 훌륭한 미술관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