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컬렉팅, 그 못말리는 열정’

세칸 2008. 1. 6. 16:28

미술과 돈 4

‘컬렉팅, 그 못말리는 열정’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독점소유할 수는 없다. 제 아무리 갑부라 한들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다른 사람은 못 읽게 하고 혼자만 읽는 것도 불가능하고, 영국 로열 발레단의 발레 공연 ‘마농’이 너무 좋다고 내 손 안에만 가질 수 없다. 하지만 피카소의 유화 ‘파이프를 든 소년’을 독점소유할 수는 있다. 돈만 많다면 그림을 사서 내 방에 걸어 두고 매일매일 나 혼자 쳐다볼 수 있고,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해 보여주며 “내 것”이라고 자랑할 수도 있다. 그게 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점 중 하나다. 돈만 있다면 독점소유가 가능한 예술. 그래서 미술을 얘기할 때 ‘돈’ 얘기가 자주 따라다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이 1979년 자신이 모은 잭슨 폴록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

 

요즘은 백화점이나 은행에서 고객을 상대로 ‘미술품 컬렉팅’에 대한 강좌를 자주 한다. 각종 파티에서 이벤트로 미술품 경매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미술품 컬렉팅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림을 사는 것일까? 그것도 큰돈을 주고서 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는 ‘컬렉팅, 그 못말리는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이라는 책에서 “열정적으로 모은 미술품은 어른들에게 포근한 담요 같은 역할을 한다”고 썼다. 사람들이 그림을 수집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의 컬렉션으로 열리는 전시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독일의 미술 컬렉터 에릭 마르크스.

 

“컬렉터는 미술품에 힘과 가치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미술품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상태가 향상되는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은 작품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작품의 가치가 자기 자신에게 옮겨진다고 믿는다. 좋은 미술 작품을 통해 컬렉터는 자신이 ‘뭔가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얘기다. 미국의 종합 문화예술잡지인 ‘에스콰이어’는 여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갔다. 이 잡지는 일찍이 1970년대에 컬렉터들이 미술품을 모으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한 적이 있는데 미술 전문가들은 아직까지도 이를 곧잘 인용한다. 첫째 미술에 대한 사랑, 둘째 투자수익에 대한 기대, 셋째는 사회적인 이유, 즉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길이 된다는 믿음이다.

첫 번째 이유인 ‘미술에 대한 사랑’은 단지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행복하다는 뜻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미술작품을 보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국 현대미술의 대표적 컬렉터인 에밀리 트레맨(Emily Tremaine) 여사는 “내가 그림을 사는 건 책을 사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즐기려고, 공부하려고, 그리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우리 시대에 어떤 작품이 가장 가치가 있는지 찾아다니며 참된 작품을 건져내는 일은 매우 도전적이면서 유익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인 ‘투자가치’는 좀 복잡한 문제다. 사실 미술품 컬렉팅에 대해 자문을 구할 때 흔히 듣게 되는 말이 “경제적 가치만 생각하고 컬렉팅을 하면 안됩니다. 당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는 식의 얘기다. 물론 1만~2만원이나 10만~20만원 정도를 쓰는 것이라면 이 말에 100%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100만원, 1000만원, 아니 1억원을 내고 그림을 살 때도 정말 눈 딱 감고 내 주관적 느낌에 따라서만 확 돈을 쓸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미술시장이 안정되어 있는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에서는 작가의 경제적 가치를 계량화한 자료가 많이 공개된다. 미국에서는 작년에 국가 리서치 기관에서 비싼 작가들의 출신학교를 분석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컬렉터들에게 투자 정보를 주기 위해서다. 일례로 ‘예일대 졸업생의 작품을 사는 게 투자의 팁이다. 1952년부터 1989년 사이에 졸업한 예일대 미대 졸업생 중 경매에서 작품 한 점당 5만달러 이상 팔린 작가는 25명으로, 출신학교별 순위 1위를 차지했다’는 식이다. 주식투자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2005년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쇼핑하는 컬렉터들.

 

하지만 미술투자와 주식투자의 다른 점은? 뉴욕의 컬렉터들은 “주식에 투자하면 매일 시세를 들여다봐야 하지만 미술에 투자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주식에 투자를 하면 돈이 불어나는 동안 그 돈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미술에 투자하면 돈이 불어나는 동안 내 눈앞에 멋진 그림으로 걸려있다는 점 또한 미술투자의 가장 큰 이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이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앞서 말한 트레맨 여사도 “사회적인 보상은 컬렉팅의 중요한 이유다. 그림을 모으면서 나는 좋은 경험을 많이 했고, 활력과 상상력과 정이 넘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고 말했다. 패트리카 마셜이라는 미국의 딜러는 “미국에서 주요 컬렉터가 된다는 것은 귀족사회로의 진입을 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컬렉터의 사회적인 역할을 단순히 사교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한 시대의 미술계를 이끄는 데 컬렉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작년 말 국내 한 미술잡지가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 미술계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물’ 1위에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뽑혔다. 미술품 컬렉터가 미술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다.

취미활동을 하면서 지적 욕구도 채우고, 투자수익도 올리면서 사회적인 신분상승까지 할 수 있다니. 그러고 보면 미술 컬렉팅보다 더 좋은 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에 큰돈을 붓는다는 것은 어쨌든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컬렉팅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미술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한다. ‘설령 돈을 크게 손해본다 해도, 이 작품을 사서 얻는 부수적 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그냥 이 작품과 함께 매일매일 살 수만 있으면 좋아’라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