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그림의 족보가 값을 좌우한다

세칸 2008. 1. 6. 15:47

미술과 돈 2

그림의 족보가 값을 좌우한다

 

 

경매에서는 미술작품뿐 아니라 가구, 보석, 옷 등 가치있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하나하나 소중한 작품으로 판매된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의 하얀 이브닝드레스 한 벌이 경매시장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적이 있다. 1999년 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였다. 마릴린 먼로가 소장했던 물건을 한번에 모아올린 경매였는데, 모조 다이아몬드 구슬 6000개가 박힌 드레스 한 벌이 나왔다. 그런데 낙찰 예정 가격이 1000만~1500만원(1만~1만5000달러)이었던 이 드레스가 그만 그 100배 정도인 12억6000만원(126만달러·수수료 포함)에 팔렸다.

 

  마릴릴 먼로의 소장품들이 경매를 앞두고 진열되어 있다.

 

이렇게 높게 호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드레스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이 드레스는 바로 마릴린 먼로가 1962년 5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역사적인 생일파티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을 때 입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마릴린 먼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지금도 틈만 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얘기다. 그러니 이런 묘한 사연을 가진 드레스가 실제 물질적 가치보다 훨씬 값이 나가는 건 이상할 게 없다. 당시 크리스티는 판매도록에 이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마릴린 먼로의 뒷모습을 크게 싣고 다른 한 쪽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흑백 얼굴사진을 실어 우수에 젖은 감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이 드레스에 ‘생일 축하해요, 대통령 각하 드레스(Happy Birthday, Mr. President Dress)’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단한 마케팅이다.

 

 작년 2월 소더비가 뉴욕에서 케네디 가문의 소장품을 경매하고 있는 모습. 사진에서 응찰 줄인 파걸이 의자는 9만6000달러에 낙찰됐다.

 

경매 출품작의 가격을 좌우하는 요인은? 물론 품질이다. 하지만 같은 품질이라면 그 물품을 누가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를 입증하는 소장기록(provenance)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 차이가 난다. 마릴린 먼로가 프로야구 선수인 조 디마지오에게 받은 300만원 상당의 약혼 반지가 7억7000만원(77만2000달러)에 팔린 것이나, 재클린 케네디가 하고 다녔던 가짜 진주 목걸이가 2억1000만원(21만달러)에 팔렸던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대중 앞에 판매용으로 처음 공개됐을 경우에는 그 가치가 더하다. 2004년 가을 뉴욕 크리스티의 인상주의 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은 201억원(2010만달러)에 낙찰된 모네의 유화 ‘런던 국회의사당’(London, the Parliament, Effects of Sun in the Fog)이었다. 모네는 런던 국회의사당을 소재로 그림을 모두 19점 그렸는데, 그 중 15개가 박물관에 있고 4개가 개인 소장자에게 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경매에 나왔던 것이다.

 

케네디 가문 소장품 추정가의 10~20배에 낙찰

이 그림은 모네가 1904년 처음 전시를 했을 때 팔린 뒤 100년 동안 계속 그 소장자의 집안에서 물려내려왔고, 이후 한번도 공개조차 된 적이 없었다. 소장기록은 곧 그림의 족보나 마찬가지인데, 이 족보에 나열되는 소장자 수가 적을수록 그림은 가치가 있다. 그만큼 한 소장자가 오랫동안 두고 보면서 애호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경매를 앞두고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열린 프리뷰 전시에서 독방에 혼자 걸려 있었을 만큼 주목을 받았다.

 

 모네의 유화 `런던 국회의사당`

 

같은 경매에는 나단 핼펀이라는 뉴욕의 컬렉터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폭 나왔는데, 그때 출품된 후앙 미로의 유화 한 점에는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미술시장이 양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때, 이 컬렉터가 후앙 미로의 딜러에게 코트를 주고 맞바꿨다”는 설명이 붙었다. 증거가 없으니 100% 믿기는 어렵지만, 이런 드라마틱한 사연이 그림에 대한 관심을 올리고 궁극적으로 가격도 올리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경매회사의 스페셜리스트(작품 판매를 담당하는 전문직)들은 각 작품의 소장기록에 얽힌 사연을 찾는 리서치에 열을 올린다.

‘누가 가지고 있던 작품이냐’는 경매에서 두말 할 것도 없이 아주 중요한 요소다. 작년 우리나라 미술계에 강한 충격을 줬던 이중섭 위작 사건도 결국은 소장기록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서울옥션을 통해 이중섭의 그림 4점이 비싸게 팔렸는데, 나중에 검찰이 그 작품들에 대해 ‘위작 가능성이 있다’고 수사 결론을 내려 구입자들이 환불을 받은 사건이다. 이 경우 이 작품이 이중섭의 아들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응찰자들은 의심하지 않고 값을 올릴 수 있었다.

물건을 팔겠다고 내놓는 위탁자의 신분을 대부분 공개하지 않는 우리나라 경매와 달리 뉴욕에서는 경매를 할 때 가능한 한 ‘누구의 컬렉션’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공개하고 홍보한다. 신뢰와 품격을 주기 때문이다. 누가 가지고 있었고, 누구에게 선물 받은 것이고, 이런 것들이 그림 자체의 품질만큼이나 중요하다. 월트 디즈니가 직접 사인을 해서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에게 선물한 ‘101마리의 달마시안’ 그림 한 점을 그냥 그림의 액면 값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월트 디즈니와 케네디라는 이름값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작년 2월 이 작은 그림이 소더비의 뉴욕 경매에 나왔을 때 6100만원(6만1000달러)에 팔릴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이 월트 디즈니에게 선물받은 `101마리 달마시안` 그림.

 

이런 이유로 외국에서는 스타의 소장품을 모은 경매가 활발하다. ‘마릴린 먼로 소장작 경매’ ‘케네디 가문 소장작 경매’ 등은 소더비와 크리스티뿐 아니라 다른 크고 작은 경매회사들에서도 끊이지 않고 올리는 인기 메뉴다. 작년 2월 소더비가 뉴욕에서 연 케네디 가문 소장품 경매는 미술품, 사진, 가구, 의류 등 모두 693점이 나와 낙찰총액 55억원(550만달러)을 거뒀다. 상당수가 추정가를 10~20배 웃도는 가격으로 팔린 결과였다.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