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화가의 인기는 작품값에 비례?

세칸 2008. 1. 6. 15:44

미술과 돈 1 

화가의 인기는 작품값에 비례?

 

 

감정을 붓 가는대로 마음껏 표현한 듯한 ‘추상표현주의’와 싸구려 상업 이미지를 예술의 소재로 쓴 ‘팝아트’. 각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던 이 두 미술그룹이 최근 뉴욕에서 미술경매가 있을 때마다 화제다. 이 두 그룹 작가들의 작품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작년 11월엔 소더비 경매에서 추상표현주의 조각가인 데이비드 스미스(1906~1965)의 작품 ‘큐비 28’(1965)이 249억원(2380만 달러·수수료 포함)에 낙찰돼 전후(戰後) 현대미술로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 바로 전날 크리스티 경매에서 역시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 ‘마티스를 위한 경의’(1954)가 235억원(2240만달러)에 팔려 기록을 세운 지 하루 만의 일이었다.

 

 작년에 162억원에 팔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차 안에서`(1963).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팝아트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도 화제였다. 만화책 이미지를 크게 확대한 그림으로 유명한 그의 유화 ‘차 안에서’(In the Car·1963)라는 작품을 그의 아들이 내놓았는데, 162억원(1620만달러)에 낙찰돼 리히텐슈타인 자신의 경매가로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밖에 팝아트의 대표주자인 앤디 워홀, 팝아트 정신을 현대미술에 계승하고 있는 미국 작가 제프 쿤스도 상한가를 달린다. 이런 현상은 자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미국인의 사랑이 높아지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뉴욕미술계는 분석한다.

이렇듯 경매에서 ‘고가 낙찰’로 화제가 되는 작가들은 자연히 미술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비싼 화가는 곧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미술 경매시장에서는 지난해 박수근(朴壽根·1914~1965)이 화제였는데 그의 작품이 1월에 5억2000만원, 11월에 7억1000만원, 12월에 9억원으로 1년 동안 세 번이나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에는 경매시장 덕에 그림 값이 바로 공개되기 때문에 한 작가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그의 작품 가격을 빼놓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년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갑자기 33억원에 팔려 화제가 된 마를린 뒤마의 `선생님`.

 

지난 한 해 미국과 유럽 미술계에서 급격하게 부상한 마를린 뒤마(Marlene Dumas·51)라는 작가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인 그는 고급예술의 사색적 요소와 상업적인 팝 이미지가 함께 들어있는 그림을 그리는데, 평생 세계 미술계에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2월 런던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를 시작으로 그는 갑자기 서구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유화 ‘선생님’(The teacher·1987)이 갑자기 33억원(330만달러)이라는 높은 가격에 낙찰됐기 때문이다. 불과 2년 전인 2003년에 그의 비슷한 유형의 작품이 10분의 1인 3억원(30만달러)에 팔렸는데 이후 경매에 나올 때마다 가격이 두 배, 세 배로 오르더니 마침내 2년 만에 10배로 뛴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경매가 있고 한 달 뒤 뉴욕에서 마를린 뒤마의 개인전이 열리자 신문 한 면을 다 털어서 뒤마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면서 “그의 높은 가격은 바로 요즘 미술관객들이 어떤 작품을 추구하는지 보여준다”고 썼다.

물론 미술계의 톱뉴스가 자꾸 ‘돈’으로 장식되다보니 예술을 ‘돈’과 연관짓는 것을 꺼리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돈’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요소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김순응 K옥션 대표는 그의 책에서 “그림이 안 팔려서 고통 받는 작가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들의 그림을 팔아 돈 문제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 걱정 없이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뉴욕 저소득층 동네에서 미술운동을 해온 미국의 현대미술가 팀 롤린스(50)는 “나는 정부 보조금에 의존해 사느니 개인 컬렉터에게 돈을 받고 싶다. 작가가 독립적이 되기 위해서는 미술시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회사원에게 월급이 필요하듯 화가에게도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중섭과 박수근 식의 ‘가난한 천재화가’는 더 이상 통하기 어렵다.

 

 소더비가 런던 경매에서 에곤 쉴러의 작품을 파는 모습. 뉴욕 경매와 달리 출품작을 사람이 직접 들고 나와 보여준다.

 

서양미술사에서는 훌륭한 화가 뒤에는 그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컬렉터와 딜러가 있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꾼 입체주의 화풍으로 20세기 초 서양미술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피카소. 그의 뒤에는 그를 비롯해 당시 파리의 아방가르드 현대미술을 사모으던 거트루드 스타인이라는 컬렉터, 그의 그림을 팔아주던 볼라드라는 딜러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거장 화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도 그들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전적으로 밀어주던 교황 줄리어스 2세가 없었더라면 대작을 줄줄이 생산하는 게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특히 현대미술에서 돈은 화가의 가치를 대변하는 척도 중 하나다. 한 작가의 값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에 따라 그 작가에 대한 관심도 변하곤 한다.

현재 세계 미술계를 움직이는 주요 컬렉터 중 하나로 찰스 사치(Charles Saatchi·62)라는 영국의 갑부가 있다. 미국 미술이 세계를 장악하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영국의 젊은 실험적 작가들에게 큰돈을 투자해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영국 젊은 작가 그룹이 세계미술계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한편으로는 한 작가의 작품에 수백만달러를 투자했다가 어느 순간 무더기로 되팔아 차익을 챙기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한 예로 그는 이탈리아 작가 산드로 키아(Sandro Chia)의 작품을 한창 수집하다가 값이 올랐을 때 왕창 되팔아버렸다. 산드로 키아는 그 일이 있었던 1990년 당시 언론이 자기를 가리켜 “사치에게 희생당했다”고 하자 몹시 불쾌해했다. 하지만 키아는 당시 미국 주요 미술잡지인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와의 인터뷰에서 “(사치가 내 작품을 팔아버린 것과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작품을 잘 하고 있지만 미술잡지들이 더이상 내 전시 리뷰를 쓰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이 갑자기 비싸지면 세인의 관심이 쏠리고 값이 떨어지면 관심도 멀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화가와 돈을 어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으랴.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ky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