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가구갤러리 ‘내촌목공소’

세칸 2007. 12. 31. 15:50

“수입 가구에 맞서려면 토종 목수가 나서야죠”

서울 청담동에 가구갤러리 ‘내촌목공소’ 낸 이정섭씨

 

 

서울 청담동은 대한민국에서 최신 트렌드가 가장 먼저 착륙하는 곳이다. 명품 부티크와 고급 레스토랑의 외국어 간판이 즐비한 이곳에 최근 이채로운 간판 하나가 등장했다. ‘내촌목공소.’ 청담동 한복판에 웬 목공소? 가구 작가 이정섭(36)씨가 새롭게 연 가구 갤러리다. ‘귀농작가’인 이씨는 5년째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서 같은 이름의 가구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수입 디자인 가구들이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어요. 그 틈바구니에서 저평가된 우리 가구를 알리고 싶습니다.” 이씨는 이름부터 질박한 자신의 ‘내촌목공소’가 수입 가구 천지인 청담동에서 한국 가구가 숨쉴 수 있는 소도(蘇塗·침범 못하는 성스러운 곳) 같은 존재가 되길 꿈꾼다.

남들은 그를 ‘가구 작가’, ‘가구 디자이너’라 부르지만, 그는 스스로를 ‘목수’라 말한다.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니 목수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젊은 사람 손톱에 시커먼 때가 굳게 박혀 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나무를 매만지는 일상이 남긴 훈장이다.

그의 목(木)가구는 따뜻하다. 결이 살아 숨쉬는 의자와 테이블은 축소된 소자연(小自然) 같다. 날것 그대로의 나무 물성이 느껴지는 작품은 가구의 본고장 유럽에도 입소문이 났다. 스위스 매트리스 회사 ‘휘슬러 네스트’의 침대 프레임을 제작하기로 했고,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소유한 회사 ‘두치 오리지널스(Duchy Originals)’로부터 가구 제작을 제의 받았다.

 

이씨는 원래 미술학도였다. 공부와는 담 쌓았던 ‘장학사의 아들’은 고교 생활 1년 만에 자퇴했다. 방황기를 거쳐 서울대 서양화과에 들어갔지만, ‘붓’ 대신 ‘카메라’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하철 사람들을 무작정 렌즈에 담았다. 1999년 사진조차 심드렁해지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강원도로 ‘귀농’했다가 목공에 눈을 떴다.

“유기농 농사 짓고, ‘스타 농부’ 되는 식의 귀농민 정규코스는 싫었어요. 그래서 목수를 생계수단으로 택했어요.” 태백의 한옥학교에서 대목(大木·큰 건축물 짓는 목수)일을 하다 나무에 눈 뜨게 됐다. 몇 년 뒤 동네 이름 내촌(乃村)을 딴 ‘내촌목공소’를 열고 소목(小木·가구 짜는 목수)이 됐다. 지난 7월엔 감자 보관소로 쓰였던 내촌 농협창고를 예술 공간으로 바꾸는 ‘아트 플레이스 내촌창고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문화 운동을 시작했다.

2500명 남짓 사는 시골 마을과 하루에도 수만 명이 지나가는 청담동. 문명의 대척점에서 예술을 향한 ‘청년 목수’의 도전이 동시 진행 중이다.

 

김미리 기자(글·사진) miri@chosun.com 

 

 

[한겨레 신문]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내촌목공소 주인 이정섭 에서 발췌

그 목수 집짓기 포기한 까닭은…

 

미대 나온뒤 목수로 변신 집 여섯채 지었지만 ‘합리적 살림집’ 뜻 못 이뤄

시골의 전원주택·팬션은 꼴불견, 우리 산천과 잘 어울리고 값도 비싸지 않은 전통가옥에 대한 바람은 아직 강하다.

 

 

강원도 홍천의 내촌목공소 주인장인 목수 이정섭(35)은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3학년 때부터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심드렁해졌던 것이다. 서울의 도심을 한바퀴 도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며 사진으로 전시를 하고 싶어했다. 내가 그를 안 것은 그맘때였다. 뻔질나게 내 작업실을 드나들며 궁금한 것들을 묻고는 휑하니 사라졌다간 나타나기를 거듭하던 그가 어느 날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학교를 마칠 때가 되어 졸업작품을 내야하는데 학교 쪽으로부터 사진을 작품으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인화지 위의 흑백사진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흑백의 물감으로 옮겨 그렸다. 정작 그림으로서의 고민이 충분히 묻어나지 않은 그 그림으로 졸업이 되었다. 꿈꾸던 전시 또한 사진 대신 그림이긴 했지만 그가 원하던 장소인 지하철 통로에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시는 그의 첫 개인전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 그가 화가의 꿈을 접어버렸기 때문이다.

 

목공소 한쪽 벽에는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가 대학 졸업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뜻밖이어서 다시 그림을 그릴 것인지 물었더니 단호하게 “절대로(아니다)”라고 했다.


내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소식도 모른 채 4~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뜻밖에도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한옥이랄 것도 없는 그저 살림집을 짓는 목수 노릇을 한다고 했다. 의아스럽기는 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는데, 이런저런 까닭으로 대뜸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2~3년이 지나 그가 살고 있다는 산골 언저리를 지나며 이번에는 내가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집 짓는 일조차 그만 두었단다. 그리곤 이제 가구를 만든다고 했다. 왜 그랬냐고 하니까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그날 통화 이후 변덕이 죽 끓듯 하고 파란만장에 좌충우돌이 심하다 싶어 신뢰가 가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자칫 짓눌릴 수도 있는 둔중한 삶의 무게를 경쾌하게 바꿔 짊어질 수 있다는 것에 내심 놀라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스스로의 삶에 소홀하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내촌 목공소 전경

 

집은 주인생각을 담보로 짓는 것

이윽고 그를 만난 날은 하얀 눈이 내린 다음날이었다. 내촌면사무소 앞에서 그를 만나 산 속으로 10리 가량, 마을이 끝난 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자 목공소가 있었다. 그가 직접 지었다는 작업장과 살림집은 산골 풍경과 모나지 않은 채 수더분하게 어울려 있었다. 산골에서 만나는 전통적인 집은 아니되 산골풍경과 반목하지 않고 적절한 타협을 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집이라는 것은 땅을 담보로 잡은 은행 융자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담보로 잡은 채 지어지는 것이다. 주춧돌 하나 서까래 하나에도 집 주인이 지닌 삶에 대한 철학이 녹아 든 것이 집이며 그렇게 지어진 집은 또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각을 가꾸고 매만져 준다. 그렇기에 집 구경은 매력적인 것이며 인테리어보다 자재나 공간 배치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업장인 내촌 목공소 내부모습

  

주방 반대편 손님을 위한 방,구들장은 엄청 두꺼워 땔깜을 많이 때야 한다.

 

휘둘러 작업장을 구경하고 집 구경을 하는데 한옥의 뼈대를 가진 집에 지붕은 양철이었다. 집안에는 욕실만을 두고 변소는 바깥에 만들었는데 볼일을 보고 재를 덮는 잿간이었지만 정작 눈길을 끈 것은 욕실이었다. 사방천지 떠돌며 만난 변소 중에 아예 문을 달아 놓지 않은 곳은 더러 보았다. 그 덕에 쭈그리고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용을 쓰는 통쾌함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실을 통유리로 막아 놓고 바깥의 자연을 보며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 산골의 목수 집에서 그와 같은 장면과 조우할 준비를 미처 하지 않은 나로서는 잠시 당혹스럽기도 했다.

 

벽을 통유리로 만든 욕실

오히려 욕실로 들어가는 집안에서의 문은 나무로 달았지만 그 바깥이 욕실의 벽만큼 큰 통유리로 트여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는 훤히 욕실이 들여다보이고 안에서는 앙상한 겨울나무가 빛나는 산이 내다보이는 욕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품은 자유로움의 크기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만하면 내가 잠시나마 그에게 가졌던 얼치기 목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꼬리를 내리기에 충분했다.

 

한쪽벽이 통유리인 욕실. 욕조는 욕실 바닥을 파서 바닥보다 낮다.

 

거실의 한 쪽 벽면

 

주방앞 거실 너머 창밖으로 4계절이 스쳐갑니다. 밤에는 별도 보이는 아크릴 천창이 있습니다. 

 

그가 만들어 낸 멸치국수를 먹으며 한나절을 빈둥거리다가 그에게 물었다. 어쩌다 목수가 됐느냐고 말이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모든 것이 막연하던 차에 농활을 다니던 아는 형 집에 놀러 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한옥 짓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길로 다짜고짜 태백으로 향했다고 한다. 태백에서 서너 달을 지내고 곧장 충청도에 집을 한 채 지었다. 학교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선배의 아버지가 머물 집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라는 사람은 시골마을 마다 한명씩 있기 마련인 동네 목수였다. 연장 다루는 것도 서툰 그가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목이 되어 목수의 집을 지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 집을 지은 대가로 그는 자신만의 연장을 장만했고 그 연장으로 다섯 채의 집을 더 지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집을 한 채씩 지을 때 마다 충만하던 의욕과 함께 흥미와 재미가 조금씩 사라졌다고 했다. 그 까닭은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집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흥미와 의욕은 이내 가혹한 노동이 되었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반복이 되고 말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근사한 별장식 전원주택이 아니라 살림집이었다. 보통 사람들도 비싸지 않은 값을 치르고 합리적인 주거의 편의성을 꾀할 수 있는 전통가옥을 짓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드물거나 아예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집을 합리적인 민가(民家)라고 불렀다. 가능한 한 사람과의 친화력이 돋보이는 나무를 주 자재로 삼고 우리나라의 산천과 모나지 않은 채 어울릴 수 있는 그런 집 말이다.

 

나라 안에 내로라하는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몰두하는 것은 사찰이나 고궁 또는 전통가옥이라 불리는 반가(班家)의 유지 보수 혹은 규모 있는 집의 건축일 뿐이다. 그러니 정작 수요가 많은 일반 서민들의 주택은 외면당하고 전통한옥은 고립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용기를 내어 한옥을 지어 보려고 하면 그 엄청난 값에 다시 주저앉고 만다. 그 탓에 우리 주변에는 갖은 멋을 부린 서양식 집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도시는 그렇다 치지만 시골에까지 서양식 건축물이 난립하는 것은 참으로 꼴불견이다. 전원주택이나 팬션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앞세우며 지어지는 그것들이 내놓는 풍경들은 굳이 우리들이 서걱거리는 마음으로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장면들이다.

 

집이라는 것은 음식이나 옷과 함께 한 나라의 가장 근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나라가 처한 자연적 기후나 환경과의 투쟁에서 얻어진 지혜를 고스란히 담보하기 마련이며, 문화란 내가 처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며 발생되는 것 아닌가. 비록 그것이 초라하고 볼품없다고 할지라도 버려야하는 무엇은 아니다. 어차피 문화는 개량을 통해 진화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집은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

그렇기에 나는 그가 살림집을 짓고 싶어 하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불편함으로 대변되는 우리네 살림집이 그와 같은 젊은이들로부터 합리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되기를 원한다. 글머리에 이제는 가구를 만드는 목수라고 해 놓고는 그가 포기한 집짓기에 대해 이렇듯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그에게는 아직 집짓기에 대한 미련이 무엇보다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 보기에 그가 가구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가 지은 집에 알맞은 살림살이를 탐색하는 과정일 뿐 그것이 그의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기대한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도 없이 살아가는 그가 그저 자연과 호흡하며 지금과 같은 암중모색의 끈을 놓지 않기를 말이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장래에 눈에 설지 않은 우리의 산이나 강과 같이 그가 지은 집들을 새벽안개 속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싶다. 더불어 지금보다 굳은살이 더욱 야물어졌을 그의 믿음직한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