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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성(熟成)의 비밀

세칸 2007. 12. 13. 18:18

묵혀야 맛있는 것들… 숙성(熟成)의 비밀

 

기다림의 시간 끝에 고기, 보석처럼 빛나다

"숙성육… 썩기 직전의 순간이 가장 달콤해"


숙성(熟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연에 함유되어 있는 효소 등을 이용하여 식품의 맛을 내거나 부드럽게 하는 방법’이라고 나오지만 어째 심심하다. 숙성이란 설익느냐, 썩느냐의 위태로운 경계 선상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균형의 예술’이다. 서서히 변화시켜 음식이 지닌 맛과 향을 극대화하는 ‘시간의 예술’이자 ‘기다림의 기술’이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유지해야 하니 ‘온도의 예술’이기도 하다. 와인이나 쇠고기, 김치는 물론 소주도 숙성을 거치면 원래보다 훨씬 더 나은 맛으로 탈바꿈한다.

 

충남 당진 ‘당진포한우촌’ 에서 열흘 숙성시킨 한우 암소 쇠고기 등심. 


'갓 잡은 싱싱한 고기'가 맛없는 이유

고기란 쉽게 말해 길고 가느다란 근육 다발. 소나 돼지, 닭, 생선 등을 도축하면 이 근육 다발이 수축해 딱딱해진다. 사후경직(rigor mortis)이라고 한다. 이 상태의 고기는 질기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근육섬유가 끊어지면서, 즉 사후경직이 풀리면서 고기가 차츰 연해진다.

숙성한 고기가 맛있는 이유는 또 있다. 근육은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아무 맛이 없다. 무미(無味). 숙성을 시키면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여러 종류의 아미노산으로 변한다. 고기를 먹을 때 느끼는 감칠맛은 아미노산이다. 또 근육이 순간적으로 힘을 내어 일해야 할 때 필요한 글리코겐(glycogen)이란 물질이 있다. 글리코겐 역시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면서 젖산으로 바뀐다. 젖산은 단맛이 난다. 고기 맛이 좋아진다. 한 쇠고기 유통업체 사장은 “솔직히 고기는 썩기 직전이 가장 맛있다”고 했다.

고급 스테이크 집의 비결

썩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연하고 맛있게 시간을 준 고기를 숙성육(熟成肉)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숙성육을 사용한다. 미국의 피터 루거(Peter Luger’s)처럼 비싼 스테이크집은 자체 숙성실을 운영한다.

웬만한 식당에서는 숙성육을 쓰기 어렵다. 비싼 고기를 다량으로 구입해야 하는데다, 냉장숙성실을 만들고 운영하는 비용도 만만찮다. 숙성 과정에서 수분이 증발하면서 그 비싼 고기 무게가 줄어든다.

더 중요한 건 고기가 상해 먹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다. 짐승을 도축해 상온에 두면 미생물이 발생한다.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고, 점액이 흘러내린다. 쉽게 말해 고기가 썩는다. 고기가 상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연하고 감칠맛이 살아나도록 하기가 녹녹잖다. 고급 스테이크 하우스의 ‘며느리도 모르는 영업 비밀’은 고기 숙성방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스퍼드 컴패니언 투 푸드(Oxford Companion to Food)’에 따르면 쇠고기는 최장 6주, 돼지고기는 열흘, 양고기는 일주일까지 숙성 가능하다고 한다. 유럽이나 미국의 고급 스테이크집은 대개 3주 가량 고기를 숙성해 사용한다고 알려졌다.


한국에 숙성육이 드문 까닭

한국에는 오래 숙성한 고기를 쓰는 식당이 드물다. 고깃집의 탐욕이라기보다 서양과 우리의 식습관 차이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기름기 없는 고기를 두껍게 썰어서 스테이크로 살짝 구워 먹는 걸 최고로 친다. 고기 자체의 맛을 최대한 즐기는 방식이다.

반면 한국은 고기를 얇게 썰어서 바싹 구워 먹는다. 고기가 얇으면서도 연하려니 지방이 많이 낀 ‘꽃등심’을 최고로 친다. 기름이 녹으면서 고기를 연하게 하고, 섭씨 40~50도에서 녹는 액체지방 올레인(olein)이 촉촉한 감칠맛을 더해준다. 고기가 얇다보니 고기를 연하게 숙성시킬 필요가 덜하다. 비용까지 감안하면 굳이 숙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충남 당진에서 숙성육 만드는 사람

숙성육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을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았다. 충남 당진 ‘당진포한우촌’이다. 대표 김기학씨는 1999년 숙성육에 대한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됐다. 1톤 트럭 분량의 쇠고기를 버리기도 여러 차례.

김씨가 찾은 온도는 0.5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나 돼지를 도축한 다음 온도관리입니다. 도축한 직후 온도계를 고기 한가운데 꽂았을 때 온도를 ‘심부온도’라고 하는데요, 소는 영하 1도에서 0도 사이 돼지는 영하 1.5~1.8도 사이로 유지하면서 숙성실로 옮겨져야 미생물 증식이 억제되면서 좋은 고기가 됩니다.”

 

쇠고기는 0.5도에서 열흘, 돼지고기는 보름 숙성시킨다. 김기학씨는 “가장 이상적인 숙성 온도는 섭씨 4도라는데, 실제로 해보니 갈색으로 변하고 점액이 생겨 식감이 떨어졌다”고 했다. 김씨는 “소는 부분으로 나눠서 숙성하지만, 돼지는 뒷다리, 몸통 식으로 덩어리가 커서 오래 걸린다”고 했다. 고기는 랩으로 진공포장해 숙성한다. 외국에서는 포장하지 않고 숙성한 고기를 제대로 숙성한 고기로 친다.

 

질 떨어지는 고기를 숙성해서 팔 수도 있지 않을까? “숙성하면 할수록 육질 차이가 선명해져요. 좋은 고기는 점점 선홍색이 선명해지지만, 나쁜 고기는 숙성 자체가 잘 안됩니다.” 김기학씨는 “보기만 해도 ‘아, 이 고기는 사야겠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라면서 자신만만하게 숙성육 한 덩어리를 내놓았다. 짙다 못해 검붉은 등심이 그렇게 먹음직스럽지는 않았다. 김씨는 “랩 포장을 이제 막 뜯어서 그런 것”이라며 여유만만했다. 고기 속 헤모글로빈이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하면서 고기색이 차츰 밝아졌다. 30분이 지나자 완연한 루비색. 고기 속에 숨겨져있던 지방질이 차츰 표면으로 밀려 올라오더니, 대리석 덩어리처럼 변했다.

 

숯불에 고기를 구워보았다. 육즙이 특별했다. 몇 배로 농축한 듯 진하다. 비교를 위해 일반 고깃집에서 파는 등심을 함께 맛봤다. 분명 괜찮은 고깃집으로 과거에 자주 다니던 집인데, 함께 먹어보니 물에 담갔다 꺼낸 듯 싱거웠다. 지방도 다르다. 일반 고깃집 고기는 지방이 불에 그을린 듯한 맛이 나는데, 이곳 지방은 뒷맛이 버터 비슷하다. 육질은 너무 부드럽달까. 석쇠에 달라붙은 고깃점을 잡아당기면 찢어질 정도. 쫄깃쫄깃 씹는 맛을 선호한다면 불만일 수 있겠다.

 

김기학씨는 직영하는 정육점에서만 고기를 판다. 택배 등 배달은 하지 않는다. “냉장시설이 완전하지 않는 택배차로 배달했다가 문제나 불만이 생길까봐”라고 설명했다. 정성껏 만든 숙성육이 진가를 발휘하지 못할까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정육점에서는 일반육 1근(600g) 1만7000원, 등심 3만5000원, 부채살·안창살·토시살·채끝살·제비추리·아롱사태 등 특수부위 2만3000원에 판다. 전화 (041)356-0088

 

고깃집에서 숙성육을 공급받으려면 ‘냉동차와 냉장 숙성고에 붙은 별도 작업실을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현재 김씨로부터 숙성육을 공급받는 식당은 경기도 김포 나진검문소 부근 ‘석산정’이 유일하다. 꽃등심 1인분(160g) 3만원, 안창살·갈비살·살치살로 구성된 스페셜 3만2000원. 육사시미(3만원)는 일반 한우 채끝등심을 쓴다. 전화 (031)984-7997 


고기 숙성 포인트

①쇠고기는 열흘, 돼지고기는 보름
②섭씨 0.5도 유지
③진공포장으로 부패 억제

 

 

천천히 늙은 김치는 사랑스럽다

묵혀야 맛있다… 김치

 

둘 다 오래된 김치이건만 쉰 김치는 왜 미움 받고, 묵은지는 왜 사랑받을까.

답은 ‘숙성’이다. 김치가 시어지면 유산균이 자기분해를 시작한다. 쉽게 말해서 늙어 죽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산균을 먹고 사는 효모가 늘어난다. 오래된 김치가 담긴 장독을 열었을 때, 코를 찌를 듯한 알코올 냄새는 이 효모 때문이다. 배추 등 채소의 아삭한 조직감은 차츰 사라지고 물컹하게 변한다.

 

묵은지 역시 유산균이 자기분해를 시작한 단계를 넘어선 김치이다. 잘 숙성된 김치와 비교하면 유산균 숫자가 훨씬 적다. 하지만 쉰 김치와의 차이는 낮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종가집 김치’에서 만든 김장김치.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canyou@chosun.com

 

‘종가집 김치’를 만드는 대상FNF 기술연구소 이진혁 팀장은 “묵은지는 숙성을 통해 김치의 시고 매운 맛을 부드럽게 조화시킨다”고 설명했다. 숙성을 통해 텁텁한 맛을 내는 탄닌이 부드럽게 변하면서 와인이 한층 마시기 편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묵은지는 아직 와인처럼 어떤 온도와 습도 등 조건에서 저장해야 맛있게 숙성하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팀장은 “오래된 묵은지를 낸다는 식당이 있어서 찾아가보면 시커멓게 변해서 식감이 떨어지거나, 과연 제대로 된 묵은지인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 팀장은 1년 반(18개월) 전부터 묵은지 숙성에 도전하고 있다. “18개월 전 묻은 묵은지이니 빈티지(vintage·생산연도)는 2005년 산이 되겠네요.” 숙성온도는 영하 1도~영상 1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아삭한 맛이 살아 있으면서 색깔도 김치 같다.

 

이 팀장은 와인의 빈티지 개념을 묵은지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 궁리 중이다. 둘 다 같은 발효식품이니, 김치도 와인처럼 숙성을 통해 더 훌륭한 맛을 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와인처럼 묵은지도 “위대한 빈티지가 나왔다”면서 호들갑 떨 날이 올 수 있을까. 2년, 3년, 5년 뒤 이 묵은지의 미래가 기대된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김치는 어떤 맛일까. 이 팀장은 ‘김장김치’라고 말했다. “김장김치에서 추출한 유산균은 탄산을 많이 내 톡 쏘는 시원한 맛을 내면서 신맛은 적더군요. 반면 여름김치에서 추출한 유산균은 김치가 제대로 익지 않으면서 시어지더라구요.”

젓갈은 새우젓과 멸치젓을 1대 2 비율로 섞어 쓴다. 이 팀장은 이 비율을 “황금비율”이라고 부른다. “20여 년 전부터 여러 젓갈과 비율로 실험을 해봤는데, 소비자들이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게 새우젓과 멸치젓을 1대 2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왔어요.” 새우젓이 처음에는 비릿한 맛을 내지만, 익어가면서 깔끔하고 시원한 감칠맛을 낸다. 겉절이김치에는 멸치액젓만 쓴다. “멸치액젓 특유의 풍미가 채소 풋내를 잡아주거든요.”

일반 가정에서는 명태나 동태 등 생선 포를 떠서 김치에 넣기도 하지만, 종가집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독특한 풍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해서다.

 

‘딤채’ 김치연구소 전종인 과장은 “김치 숙성온도는 섭씨 15도가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김치가 발효되면서 13가지 정도의 유산균이 생성되더군요. 유산균을 DNA 분석해 보니, 15도에서 생성되는 유산균에 분비되는 영양학적 가치가 가장 높았어요.”

전종인 과장은 “김치를 가장 맛있게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온도는 평균 영하 1.4도”라면서 “김치냉장고에서는 6개월까지는 맛 변화 없이 저장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와인 맛, 섭씨 8도·습도 60~80% 유지하면…
묵혀야 맛있다… 와인

 

숙성이라고 하면 역시 와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와인은 숙성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좋은 와인, 비싼 와인의 조건에서 ‘얼마나 잘 숙성할 수 있느냐’가 빠지지 않는다.

 

샤토 베르티네리의 지하 와인숙성창고 / DB사진

 

와인은 오크통이나 스테인리스 통에서 1차 숙성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오크통의 재료인 참나무에서 바닐라, 버터, 과일향 등 다양한 맛과 향, 탄닌이 배어든다. 새 오크통은 헌 오크통보다 와인에 미치는 영향이 당연 약하다. 와이너리마다 원하는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100% 새 오크통을 쓰는 곳, 60%만 사용하는 곳 등 다양하다. 와인 자체의 맛과 향만을 살리려면 스테인리스 용기를 쓴다. 콘크리트 통에 넣어두는 와이너리도 있다. 소비자가 와인 숙성에 개입하는 건 병에 담긴 와인을 구입하고 난 다음이다. 

 

와인교육기관 WSET의 이인순 대표강사는 “탄닌 외에도 산미 등 와인을 구성하는 여러 맛 요소가 서로 잘났다고 머리를 들이밀다가 차츰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 숙성”이라고 했다. 이인순씨는 “와인의 숙성이란 떫은 맛을 내는 탄닌이 부드러워지는 과정”이라면서 “잘 숙성된 와인은 ‘벨벳 같다’ ‘실키(silky)하다(비단 같다)’고 표현할만큼 입에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색깔은 차츰 연해지면서 레드와인은 보라색을 거쳐 오렌지색으로 바뀐다. 더 오래되면 갈색이 되기도 한다.

 

와인을 제대로 숙성시키려면 온도는 섭씨 8도, 습도는 60~80%를 연중 유지해야 한다. 와인 보관온도는 와인마다 다르다. 레드와인은 16도가 알맞지만, 이보다 차갑게 마시는 화이트와인은 12도 정도가 적당하다. 샴페인도 화이트와인과 마찬가지로 12도 정도에서 보관한다.

와인병 마개가 꼭 맞지 않으면 공기와 접촉한 와인이 산화(酸化)한다. 코르크 마개가 썩으면서 와인까지 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진동은 와인을 빨리 늙게 하므로 일반 냉장고나 김치냉장고는 적합하지 않다. 제대로 숙성할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빨리 마셔버리는 게 낫다.

 

의도하지 않은 숙성도 가끔 있다. 와인바 ‘뱅가’, 와인숍 ‘와인타임’ 등이 있는 ‘포도플라자’ 빌딩 김혁 디렉터는 “인기가 없어서 오랫동안 팔리지 않고 와인셀러에 처박혀 있던 와인이 의외로 훌륭할 때가 있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오는 와인은 유럽이나 미국, 칠레로부터 먼 여행을 해야 한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고급 와인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배를 타고서 뜨거운 적도를 지나며 열을 받고, 내내 흔들린다.

 

그래서 와인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 출장 갔다가 돌아오면 한동안 시차적응하느라 고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와인셀러에서 쉬면서 ‘풀 컨디션(full condition)’을 회복해야 한다.

 

인기 와인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테이블로 ‘출전’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 좋지 않은 와인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덕분에 ‘푹 쉬다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는 소리다. 뱅가 (02)516-1761,  www.podoplaza.com

 

 

24시간 일본식 숙성 > 10시간 한국식 숙성, 10시간 광어 > 8시간 도미
묵혀야 맛있다… 생선

 

서울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 이태영 조리장은 “생선은 고기보다 숙성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연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생선은 그렇지 않아요. 차지고 쫄깃한, 씹는맛이 중요하거든요.”

 

왼쪽부터 참치회, 광어회. /조선일보 DB  

 

고기처럼 생선도 숙성시킬수록 맛이 증폭된다. 생선이 맛있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생선살 속에 든 글루타민산과 이노신산을 혀가 느낀 것이다. 이노신산은 맛을 폭증시키는 역할을 해서 특히 중요하다. 이태영 조리장은 “이노신산을 충분히 갖고 있어야 맛있는 생선회”라고 설명했다.

 

아리아께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횟집으로 손꼽히는 도쿄 ‘기요다스시(きよ田壽司)’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다. 기요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 즐겨 찾는 초밥집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기요다에서 하는 그대로 생선을 숙성시켰다. 생선의 무게나 어장, 종류, 계절 등에 따라 다르지만, 기요다에서는 생선을 평균 24시간 숙성시킨다.

 

그런데 한국인 손님들 반응이 신통찮았다. 숙성시키는 시간에 문제가 있었다. “숙성을 하면 할수록 생선 맛은 증가하지만, 촉감은 떨어집니다. 일본인들은 촉감은 떨어지더라도 맛이 강한 회를 선호하는 반면, 한국 손님들은 탱탱한 활어에 익숙하죠.”

 

한국인 손님들이 일본식 대로 숙성한 생선이 너무 무르다고 느낀 것이다. 또 일본에서는 생선을 회뿐 아니라 초밥으로도 많이 먹는다. 일본에서 초밥용 생선은 숙성을 충분히 시킨다. 초밥을 입에 넣었을 때, 밥과 생선이 분리되는 느낌 없이 부드럽게 서로 어울리고 섞이도록 하는 것이다. 선어(鮮魚)에 익숙한 일본인의 식감(食感)이, 활어(活魚)의 씹는 맛을 즐기는 대부분 한국인에게 덜 맞았다고 아리아께에서는 분석했다.

 

요즘 아리아께에서는 생선을 평균 10시간 숙성시킨다. 이태영 조리장은 “생선 맛을 가능한 뽑아내면서도 촉감이 살아있는 접점을 찾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광어는 3㎏ 기준 10시간, 도미는 8시간, 참치(40~80㎏)는 사흘 정도. 이 조리장은 “좁은 양식장에 갇혀 사는 양식산 생선은 운동량이 적어서 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연산보다 숙성시간이 훨씬 짧다”고 말했다.

 

 

소주는 한달 지나면… 흔들면 더 부드러워

묵혀야 맛있다… 소주

 

‘소주를 한 달쯤 숙성시키면 더 맛있다’는 말이 항간에 떠돌길래 대상FNF 기술연구소 이진혁 팀장에게 진위(眞僞)를 확인했다. 이 팀장은 “사실”이라고 했다. 이 팀장은 과거 두산에서 근무하면서 소주 개발에 참여한 적이 있다.

 

“소주에는 알코올 뿐 아니라 당분, 구연산, 거기에 간을 맞추기 위해 소금을 첨가해요. 그런데 레서피대로 넣으면 재료마다 제각각 튀어요. 쓰고 맛이 없어서 정말 마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루 이틀 놔두면 재료들이 서로 자리를 잡으면서 부드럽고 조화된 맛을 냅니다.”

 

부피도 줄어든다. “물 100㎖와 알코올 100㎖를 섞으면 200㎖가 될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180㎖쯤으로 줄어요. 물 분자 틈새 빈 공간을 알코올 분자가 끼어들기 때문이죠.”

 

소주를 그렇게 한 달 숙성시키면 더욱 부드러워져 마시기 좋은 상태가 된다. 이 팀장은 “모 소주회사에서 ‘흔들면 더 부드러워진다’고 광고하는 것도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소주는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오래 숙성시킬수록 맛이 월등하게 좋아지지는 않는다. 와인은 떫은맛을 내는 탄닌이 부드러워지면서 마시기 편해지는 것이고, 위스키는 참나무통 속에서 알코올과 산이 반응해 향기 성분이 생겨나고 원숙한 맛을 낸다. 소주는 이러한 변화가 더이상 진행되지 않으니 오래 둔다고 더 나아질 게 없는 것이다.

 

 

우전차(雨前茶)는 만든지 20일 후 제맛

묵혀야 맛있다… 차

 

조선일보 DB
흔히들, 한국 차(茶)는 중국 보이차(潽耳茶) 등과 달리 숙성시키지 않고 바로 마시는 걸로 알고 있다. 매년 봄 출시되는 햇차가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반은 옳고 반은 틀렸다.

 

햇차도 숙성이 필요하다. 박동춘 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소장은 “차를 만들고 20일은 지나야 풋내가 사라지고, 차가 지닌 여러 맛이 융화된다”고 설명했다. 매년 4월 10일경 나오는 우전차(雨前茶)를 예로 들자면 4월 30일쯤 먹을 만하단 소리다.

 

박동춘 소장은 해남 대흥사 주지였던 고(故) 응송 스님에게서 초의선사(1786~1866)의 제다법을 전수받은, 일본에 영향받지 않는 한국 고유 차를 만든다. 요즘 흔히 마시는 녹차(綠茶)와 중국 청차(靑茶)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은 듯한 맛이 난다. 세간에서 ‘동춘차’라 불린다. 박동춘씨는 자신이 만든 차라면 “서너 달 지나야 완전히 숙성된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02)504-6162

 

 

햇고구마 구입하고 2~3일 지나야 더 달아

묵혀야 맛있다… 과일/야채

 

고구마를 숙성시키면 훨씬 더 달고 맛있다는 주장이 있다. ‘신선’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치는 채소나 과일도 숙성이 효과가 있을까?

 

‘총각네 야채가게’ 이영석 ‘대장’은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고구마는 구입하고 2~3일(수확 후 3~4일) 뒀다 먹으면 수분이 증발해 더 달아요. 하지만 고구마 향이 함께 날아가버리는 단점이 있어요. 그리고 요즘 나오는 햇고구마에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저장고구마는 금방 썩거든요.”

 

귤이나 키위는 숙성하면 좋다. “키위는 썩기 직전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만져봐서 물컹물컹 해졌을 때 드세요. 귤은 따뜻한 곳에 하루나 이틀쯤 두면 신맛이 줄어들어요.” 그러나 이영석씨는 “거의 모든 채소와 과일은 싱싱할 때 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특히 시원한 맛으로 먹는 배나 사과는 가능한 빨리 먹는다. “푸석푸석해지고 맛이 떨어져요.”

총각네 야채가게 대치본점 (02)564-8212, www.chonggakne.com 

 

[조선일보] 김성윤 기자(글) gourmet@chosun.com 유창우 기자(사진·조선영상미디어) canyou@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