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소설, 맛과 사랑에 빠지다

세칸 2007. 11. 27. 20:27

소설, 맛과 사랑에 빠지다

사랑하면서 느끼는 달콤함·씁쓸함을 맛으로… 언어로…

 

조경란 - [혀]  한강 - [채식주의자]  은희경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함정임 - [아주 사소한 중독]  고은주 - [칵테일 슈가]  천운영 - [명랑]

 

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일러스트 = 이석구(문학동네 제공) 

 

‘마늘과 양파, 타임, 양송이, 그리고 클로버잎 모양의 크레송으로 만든 소스 위에 앞부분부터 단면으로 고르게 썬 혀가 유선형 모양으로 흐트러지지 않게 잘 놓여 있다. 그는 가장 가운데 부분, 모양이 가장 선명하고 가장 큰 조각을 포크로 정확히 찍어 누른다.’

조경란의 신작 장편 ‘혀’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여자가 연적(戀敵)의 혀를 요리해 변심한 애인에게 먹이는 엽기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소설은 ‘사랑의 상실’이라는 결핍의 이미지를 음식에 대한 허기와 포만을 향한 욕망으로 치환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미각이라는 감각과 복수라는 심리적 욕구를 결합하는 새로운 소설 미학을 실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대 대한민국 소설에 등장하는 음식은 더 이상 배고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배로 느끼는 허기가 사라진 사회에서 작가들은 혀로 느끼는 감각을 표현하는 언어들로 소설 메뉴를 짠다. 주제도 배고픔에 내포된 사회적 의미보다는 사랑과 불륜, 폭력 등 주로 개인적인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


함정임의 단편 ‘아주 사소한 중독’은 케이크를 만드는 여자의 혀를 통해 일회적으로 끝나는 감각적 사랑, 또는 관계의 끈이 느슨해진 현대의 인간관계를 파고든다. ‘그녀는 그가 왜 좋은지 모른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면서 그와 키스를 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것은 혀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모여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고은주의 단편 ‘칵테일 슈가’도 달콤한 욕망의 세계를 그린다. 그들은 칵테일 슈가를 서로에게 건네며 ‘모양이 느낌표 닮았지? 느낌표의 달콤함만 즐겨 봐. 심각한 물음표를 만들지 말고’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도 음식 소설에서는 개인적 경험의 차원으로 이야기된다. 천운영의 단편 ‘명랑’에서 할머니의 유분(遺粉)을 보관하고 있는 주인공 소녀는 그것을 꺼내 맛을 보는 행위를 반복한다. 죽음을 맛보는 것으로 소녀는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끼려고 한다. 이는 할머니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삭힌 음식과 비교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대로 삭았다. (…)벌써부터 지릿하고 알싸한 냄새가 목구멍에서 콧구멍까지 뚫고 나오는 듯하다. 노인네가 죽을 때가 되었는지 느닷없이 삭힌 홍어찜이 먹고 싶단다.’

음식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때로 단식이라는 정반대의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강의 신작 소설집 ‘채식주의자’에는 어린 시절 자신을 문 개를 아버지가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고, 그것을 부녀가 함께 먹었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다 육식을 거부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은희경의 올해 동인문학상 수상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아버지로부터 뚱뚱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이 벌이는 다이어트와, 단식을 깨고 먹는 국밥의 감미로움을 대비시키며 인간의 내부에 각인된 존재의 본질적 조건을 사유하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허기와 달리 미각은 애초부터 집단적 기억이 불가능한, 지극히 개인적 감각”이라며 “음식 소설을 쓰는 작가가 주로 여성이라는 점에서 개인적 경험을 서사화했던 90년대 여성 작가들이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