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칸의 사는 이야기

金井山 梵魚寺 曹溪門 - [一柱門]

세칸 2007. 5. 23. 10:53

 [금정산 범어사 조계문(一柱門)]

 

 '06년 4월 12일 촬영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禪刹大本山 金井山 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이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사찰로서 영남 불교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범어사는 지금으로부터 약1300년 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義湘)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서깊은 호국사찰이기도 합니다.

  범어사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삼층석탑(보물 제250호), 대웅전(보물 제434호), 일주문(보물 제1461호,지방유형문화재 제2호),당간지주(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명찰입니다.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상 http://www.beomeosa.co.kr/에서 인용함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本寺)이다. 1700년(숙종 26) 동계(東溪)가 편찬한 〈범어사창건사적 梵魚寺創建事蹟〉에는 신라 흥덕왕(826~835 재위) 때 의상이 화엄신중기도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자 왕이 매우 기뻐해 의상을 예공대사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02년에 죽은 의상이 흥덕왕 재위기간에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범어사의 창건 연대는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670년 이후 생존기간의 어느 때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신라 화엄10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서 의상이 창건하고 그의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다는 범어사는 왜구를 막는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에 묘전(妙全)·현감(玄鑑) 등이 법당과 요사채를 갖추어 중창한 이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해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범어사는 산의 지형을 이용해 제일 상단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을 세우고 중단에는 보제루를, 하단에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중심으로 당우를 건립해 전체적으로 3단을 이루는 산지가람 배치로 되어 있다.
                                                                                    이상 다음검색 [백과사전]에서 인용함
 
  일주문(조계문)을 이야기 할려면서 범어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범어사의 주 출입문이 일주문이기 때문입니다. 범어사를 족히 백여번 이상은 다녔다고 생각되지만 유래나 깊이있는 내력은 잘 알지를 못해서 위의 글들을 인용하여 소개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07년 5월 22일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일주문(一柱門)은 애칭(?)이며 정확한 명칭은 범어사 조계문(梵魚寺 曹溪門)이랍니다. 4개국어로된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영어, 일어 중국어의 설명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들의 궁금증은 어디서 풀까요? 오히려 외국어 설명이 더 자세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있는 동안도 제법 많은 외국인들이 거쳐 갔지만 그들이 아는 문자쪽으로 잠칸씩 일별하고는 별 궁금증을 느끼지도 못하고 돌아서 갔습니다.

  우리말 안내글도 자세히 한번 읽어 보세요. 무슨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저는 건축을 배웠지만 그 뜻을 제대로 다 알지는 못합니다. 의미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지만......아마 전통건축을 연구하는 이들이나 제되로 알아들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입니다. 일반인들이 이 대단한 건물을 제대로 알 수 있게 쉬운말로 잘 설명되어져 있다면 범어사나 우리건축을 새롭게 인식 하리라 봅니다만......

 

  일주문(一柱門), 기둥이 하나인게 아니라, 기둥이 행대로 세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물은 세칸이니 기둥은 4개가 되고 일렬 행대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 세칸중에 정면에서 오른쪽에 설치된 '선찰대본산' 편액입니다. 송판에 음양각으로 새겼습니다만 어느분의 글씨인지는 미욱하여 사진을 확대해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중간에 설치된 '조계문'편액입니다. 양각으로 새겼고 편액의 테두리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세칸중에서 왼쪽에 설치된 '금정산 범어사'편액입니다. 역시 송판에 음양각으로 새겼습니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엔 '壬子小春' 왼쪽엔'七十八翁海皇堂'이라는 당호가 보이기도 합니다. 정확치는 않지만......

편액은 너 댓토막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른쪽의 '선찰대본산'편액과 같은이의 글씨입니다.

 

  정면의 좌측에서 지붕을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겹처마라는게 기와밑에 사각의 서까래가 있고, 그 아래에 또 원형의 서까래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기둥위에는 납도리(네모진 도리)를 사용했습니다. 사가에서는 남자들이 거처한는 곳엔 궁도리(둥근 도리)를, 여자들이 사용하는 건물엔 납도리를 사용한답니다. 여기서는 어떤의미로 쓰였을까요?

 

  박공지붕의 끝마구리를 단순하게 처리한 구조를 맞배지붕이라하고, 그끝 처리를 합각이라 한답니다. 합각을 널판으로 했다해서 합각널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장의 송판을 처마끝에서 공포를 따라 다듬어서 이어 붙였습니다. 모양보다는 비 바람으로 부터의 보호에 더 목적이 있습니다.

 

  공포와 단청의 아름다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도리위에 걸려있는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게 된답니다.

 

  보머리 아래에서 기둥과 연결되어 보를 받치는 보아지 랍니다. 장식성도 있지만 실용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궁금한 부분입니다. 그랭이질도 하지않은것 같이 평평한 돌위에 그냥 얹어 놓았을까요? 아니면 속은 다른 모양으로 결구를 보강했을까요? 너무 궁금합니다. 해체할 수도 없고.....별 다른 기록을 �O을 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 대답의 대세는 '그냥 올려놓았다'가 많습니다. 이유는 자연석 기둥도 아니면서 굳이 요철(凹凸)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재의 약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돌기둥의 기초는 어떻게 했을까요? 요즘처럼 철근과 콘크리트도 없는데......철근과 콘크리트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고작2~300년 이랍니다.

 

  깊이는 얼마나 묻혀져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10~20Cm를 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돌기둥 밑에 다른 돌주추가 있지 싶기도 합니다. 돌주추위에 돌기둥을 맞춤하게 깍아 세운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만......알 수는 없답니다.

 

  4개의 돌기둥이 자연석은 아니지만 모양은 다 다릅니다. 왜 일까요? 굳이 다듬었다면 같은 모양으로 다듬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비슷한 돌을 자연스럽게 '배흘림기법'으로 다듬었습니다. 요즘처럼 똑같이 다듬었다면 무슨 모양이 있을까요? 이게 이유가 아닐는지......숙제는 끝이 없습니다.

  

  현대건축은 '일체화'된 구조라야 안정적이라 말합니다. 콘크리트 처럼.....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체화 되지않은 건물이 수백년을 견뎌온 이유랍니다. 자연적인 내진구조라 해야 맞을까요......현대과학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태풍 '매미'에 지름 50Cm의 소나무 중간이 부러진 모습을 봤습니다. 족히 100년은 살았을 나무가 힘없이 부러져도, 옛집들은 끄떡 없었습니다. 이 비역학적(?)이고 비과학적(?)인 구조로도 수백년을 견뎌냅니다. 무엇으로도 어느 누구라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1718년의 중수시에 현 돌기둥을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전의 기둥은 돌주추위에 있어서 비 바람에 부재가 약화되었지 싶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지금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나무기둥에 비가 맞지 않을 만한 높이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비과학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절집의 입구이니만치 보살님들은 한결같이 합장배례를 드리고 있습니다.

 

  목재의 무게, 기와를 얻기위한 흙과 기와의 무게를 달랑 4개의 기둥이 4개의 돌기둥위에서 받치고 있습니다. 구조 역학의 전문가들도 "구조적으로는 해답이 없다"고 했습니다.

 

  기둥위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제가 어림으로 잡아도 2~30톤은 더 되지 싶었습니다. 기둥한개에 5~7톤씩 얹혀서 몇 백년을 지탱해 왔습니다. 1781년에 중수하여 오늘까지 왔으니 226년을 그대로 서 있는 겁니다. 기둥위와 기둥아래의 비례를 눈으로 한번 보십시오. 현대건축에서 누가 이런설계를 했다면 모두들 아마 어처구니 없어 할 겁니다. 전혀 어색하거나 불안해 보이지도 않거니와 저는 오히려 안정된 편안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의 법력일까요? 보면 볼 수록 숙제만 늘어갑니다.

 

  "육중한 돌기둥같은 초석위에 지붕틀을 직접 얹은 형태로 일주문 건물중 최대의 걸작이다. 보아지 형태의 사장재로 지붕틀의 휨을 방지하며 다포계 박공지붕으로 구성되어 형태적 표현과 구조적 합리성을 동시에 얻고 있다."        

                                                                                                          [韓國의 建築] 傳統建築編   空間社  글:金奉烈  에서 발췌

 

  내일, 4/24일이 불기2551년 음력 4월 8일 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날이라 알고 있습니다.

모든이들의 가슴속에 부처님이 이세상에 오신 뜻을 기리는

등불 하나씩 밝혀보심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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