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칸의 사는 이야기

돌위에 새긴 생각

세칸 2007. 5. 21. 00:05

  學山堂印譜記

돌위에 새긴 생각

 

                                                    표지-정 병례

 

정민 선생의 책 [돌위에 새긴 생각] 學山堂印譜記를 다시 꺼내 봅니다.

부제가 '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마음을 새기는 일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전각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것이고 잘 아시거나 전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잡스러워 전각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제 친구중에 서예나 그림을 하는 이들이 있어서 가까이 접하기는 합니다. 또, 제 블로그 구독 리스트의 어느분도 전각을 하시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돌 위에 새기는 문장이나 글씨가 예사롭지 않으니 가끔은 천둥소리도 들리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요즈음, 심사가 편치 않아 꺼내보고는 새삼 또다른 감동을 받습니다.

 

  정민 선생의 글이나 책은 다 좋습니다. 자칫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 '먼저간 이들'의 문장이나 금언들을 재미있고 오늘에 맞게 잘 살려내는 대단한 기술(?)이 있는 분입니다.

 

  책을 펴내며......(저자 서문)

  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마음을 새기는 일이다. 칼은 힘이 좋다. 칼 위에 마음을 얹으면 돌 속에 내 마음이 아로새겨진다.

  [학산당인보]는 명나라 말엽 장호(張灝)란이가, 명대 유명한 전각가들이 옛 경전에서 좋은 글귀를 골라 새긴 인장을 모아 엮은 책이다. 우연히 조선 후기의 박제가가 이 책에 대해 쓴 서문을 읽고 그 내용이 종내 궁금 했는데, 안대희 선생이 지니고 있던 그 책을 선뜻 내게 내주었다. 기뻐서 틈날 때마다 들춰 읽다가 그 여백에 조금씩 메모를 적어 나간 것이 이 책이다. 여기 실린 것은 인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하략)

                                                                                      2000년 6월 초록의 행당동산에서 정 민

 

  박제가(朴齊家)의 학산당인보초석문서(學山堂印譜抄釋文序) 전문을 옮겨봅니다.

 

  오늘날에 총명함이 열리지 않은 자는 옛사람의 글을 무덤덤하게 보는 것이 병통이다. 대저 옛사람은 절대로 범상한 말을 하지 않았거늘 어찌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유독 저 학산당 장씨의 인보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것이 인보인 줄만 알 뿐 천하의 기이한 문장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인보의 글이라는 것만 알지 일찍이 옛사람의 말이 어느 한 가지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음은 알지 못한다.

 

  대저 장씨가 이것을 만든 것은 명나라 말엽 붕당의 시대를 당하여 음이 성행하고 양이 쇠퇘한 운수를 만나 충성과 울분을 품고 홀로 외로이 뜻을 같이할 사람도 없어, 불평의 기운을 펼쳐 베풀 곳이 없는 지라, 이에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백가(百家)의 운어(韻語)를 이리저리 취하고 따와 인수(印藪)를 만들었다. 풍자의 끄트머리를 가탁하여 글자를 새기는 사이에 갈다듬었다.

 

  뒤집어서 한 말은 사람을 격동시키기 쉽고, 곧게 말한 것은 사람에게 파고드는 것이 깊었다. 글은 짧아도 뜻은 길고, 채집한 것이 넓고 담긴 뜻은 엄정하였으니 국풍(國風)의 비흥(比興)이요, 이소(離騷)의 원망하고 사모함이며, 일반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의 한숨과 영탄인 셈이다. 비록 장난치고 비웃고 성내고 꾸짖음이 갖가지로 반복되고, 은혜와 원한, 뜨겁고 차가운 정태(情態)가 제각기 달라도 그 뼈에 사무치는 소리와 눈을 찌르는 빛은 천년 뒤에도 더욱 새로워 마침내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시원스러워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할 수 있고, 우뚝하여 여린 자를 굳세게 할 수 있으니 소인은 원망하는 마음을 평안히 하기에 충분하고, 군자는 그 바른 기운을 붙들기에 족할 것이다. 진실로 명리(名理)의 심오한 곳집이요, 사명(辭命)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이며, 용렬한 자의 물건을 자르는 칼이고, 무너지는 풍속의 버팀 기둥이다.

 

  읽는 자가 이에 있어 진실로 그 곡하고 싶고 울고 싶은 마음의 경악할 만한 형상을 얻을 수만 있다면 천하의 기이한 문장이라도 이 같음에 불과하고, 옛사람의 천언만어도 이 같음에 불과하리라. 말을 토해 내면 끊임없이 이어져 들을 만하고, 종이를 잡으면 펄럭펄럭 즐길 만하여 총명함이 열리고 깨달음에 이를 터이니, 또 어찌 단지 오늘의 인보일 뿐이겠는가?

 

  내 친구 이덕무가 이를 위해 풀이한 글을 손수 뽑고서 내게 서문을 구하였다. 아아! 압록강 동쪽에서 무덤덤하지 않게 책을 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럴진대 내 말이 믿음을 얻지 못할 것이 마땅하구나, 아아! 

                [한번 읽어 볼 만한 명문일 뿐만 아니라 새겨 들어야 될 말이라 생각하여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이 실려 있는지......두 작품만 보겠습니다.

한 페이지에 한작품의 전각과 원문이 있고 아랫부분에 정민 선생의 해설이 실려 있습니다. 

                                         

                    好學者雖死若存

              不學者雖存

              行尸走肉耳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비록 살았더라도

     걸어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배우지 않는 삶, 향상이 없는 생활, 꿈꾸지 않는 나날,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배워 변화하지 않는 삶은 밥벌레의 하루일 뿐이다. 

              喜極勿多言

              怒極勿多言

 

          너무 즐거울 때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노여움이 지극할 때도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많은 말은 언제나 침묵만 못하다.

 

 

 

 

 

 

예전의 서점은 그래도 상가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만, 요즈음은 그렇지도 못합니다.

'백두문고'도 없어지고 그자리엔 이동통신사의 대리점이 차지해 있습니다.

저도 책의 내지에 손수만든 '장서인'을 찍을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게으르고 우매하여 감히 칼을 잡을 엄두를 아직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몇권 되지도 않은 책을, 그보다 잘 읽지도 않은 책에 '장서인'은 허영이지 싶기도 합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때 마다, 주옥 같은 명문과 금언을 접하는 재미가 유별납니다.

어떤 시집이나 철학서가 이렇듯 분명하게 뒤통수를 때리겠습니까?

서늘하게 소름이 돗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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