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정월 스무 닷새날', 제어머니의 생신날 입니다.
1919년 기미년, 3.1독립선언이 있던해에 태어나셨습니다.
올해 여든 아홉이 되십니다. 얼마나 고마운지.....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별 탈없이 건강하시고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으시니 그저 고맙고 또 고맙지요.
19살에 아무것도 없는 황소고집에다 성질은 불칼같은 25살의 아버지를 만났답니다.
요즘으로 보면 금술이 좋을리 없을 텐데도 9남매를 낳았습니다.
4째와 5째, 남매를 하루에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셨지만 7남매를 별 탈없이 잘 키웠습니다.
지금도 제가 낚시하러 물가에 가는 것을 별로 달가워 않습니다.
자식이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부모에겐 어린애라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며칠전의 일요일엔 맛있는 '봄도다리 새꼬시'를 먹으면서도 어머니 생각은 안 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어머니가 좋아하는게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어서도 이런 못난 불효자식이 또 있을까요?
지금도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단풍콩잎'같은 먹거리를 챙겨 주십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영원한 '빗쟁이'일까요?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사랑을 저도 제 자식에게 줄 수 있을지......아직은 자신 없습니다.
2003년 9월 11일에 찍은 사진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영정사진이 없다고 하시며 사진찍기를 자청하셨습니다.
"머리가 허연어서 어짜노? 괜찮건나?" 하시며 안경까지 벗어시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 하십니다.
"괜찮습니다. 머리도 까맣게 할 수 있고 한복도 입을 수 있습니다." 대답하고 찍은 사진이랍니다.
사진 찍기를 즐겨 않는(싫어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젊은시절 이웃에서 길쌈을 하다 호롱불의 기름이 떨어져 기름을 보충하게 되었답니다.
집주인이 석유가 아닌 휴발유병으로 기름을 보충하다 기름을 넘치게 부었고, 그 불덩이가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머리를 덥쳤답니다.
그때 어머니의 연세가 33세때 였다니, 그 시절에 병원인들 제되로 있을턱이 없지요. 계산을 해보니 1952년 전쟁말기 였네요.
길쌈은 젊은 부인네들이 허벅지를 더러내고 삼실을 이어붙여 감고하는 작업이다 보니 자연히 남정네들은 멀리하기 마련입니다.
야밤에 여자들만의 작업에서 불이났으니 정황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잘 알지 못했는데 오늘(3/16) 하필 어머님이 저희 집으로 오셨기에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답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싫어신지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제가 정확히 모르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헤집어 기억에서 되살리고 싶지 않았겠지요.
이른바 저의 집안에서는 '불문율'이된 엄청난 사건 이었지요.
30대 초반의 젊고 이쁜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니 그 고충을 어느 누가 다 알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오른쪽 얼굴과 입술의 흉터가 선명한데 그때는 오죽 했겠습니까?
제가 어릴때, 자식들을 모아놓고 "너거가 어떡커서 엄마 얼굴 수술해도"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에 맺히고 아픔이 사무쳤으면 그런 말씀을 종종 하셨을까를 새삼 생각해 봅니다.
제 큰형님은 틀림없이 그러겠다는 약속(어머니 말로는 만지장서로.....)을 드리기도 했답니다.
예전엔 그런 성형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수술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어졌을땐 어머님이 너무 늙어셨으니.....세월을 탓해야 될까요?
그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면 가슴이 아릿하고 울먹해집니다.
2004년 11월 21일, 고향 선산을 �O았을때 찍은 사진입니다. 역시 "머리도 허연데 머로 찍어쌓노? 돈만 내빼리구로!"
하시며 손사래를 치십니다. "염색안한 머리가 더 좋습니다"라면 언짢아 하십니다.
어머니도 여자임이 분명한데,..... (여러님들은 그런말 하지 마세요! 노인 일수록 싫어 하십니다.)
어머니는 디지탈 카메라가 뭔지 모르십니다. 사진찍으면 돈 달아나는 줄만 아시니까요.
사람 손은 절대 거짓말 않습니다.
무슨일을, 어떤일을 하던 손인지......얼마나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지......손만 보면 안답니다.
오죽하면 6.25때 중지에 '펜혹'있는 사람만 골라내어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겠습니까.
어머니 손은 잠시도 쉬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억 하기로는......단 하루도 쉰적이 없습니다.
지금 손을 맞잡아 보면 살이 빠져서 굵은 뼈마디가 느껴지며 고생한 세월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누가, 어떤 그 무엇으로 그 세월을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귀향이니 전원생할이니 하는게 유행이라 "엄마! 우리 촌에가서 살까?" 하고 뻔히 알면서 농을 하면
"일 할만치 했다. 지긋지긋한 일하러 마러 촌에 가노" 한답니다.
시골생활이란게 손 안 움직이고는 밥 못먹는 다는걸 잘 알고 하는 말이지요.
제가 어릴때, 나뭇짐도 장정 나뭇짐만 했고, 벼한섬, 쌀반가마니는 번쩍번쩍들던 장사(?)셨으니 일이라면 지겹기도 하실겁니다.
숙부님과 나란히 앉으시라고 했습니다.
몸이 불편한 숙부님과 언제다시 사진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싶으신지 얼굴이 조금은 밝아 지신것 같습니다.
젊을때 형수애를 제법태운 시동생이라.....(간혹 옛날 이야기처럼 하기도 합니다.)......두분이 가깝게 당겨 앉았습니다.
젊을때, 어른말 고분고분 잘 들은 이가 어디 있기나 하며 몇이나 될까요?
세월앞에 장사없고, 시간은 지나가지만 다른시간이 다시 돌아와 보란듯이 지난 이야길 하겠지요?
아프고 슬픈 이야기라도 옛날 이야기는 왜그리 재미질까요?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날도 그리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참 조심스러워지고 기록으로 남겨두고도 싶어 집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이야기 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만 조금만 다시 생각하면 세상에 어디 부모를 이기는 자식이 있겠습니까?
자식은 이긴척 하고 부모는 져주는척, 지는척 하는거지요.
자식 잘못되는걸 가만히 보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기나 하며, 부모말을 마음속으로까지 거역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옛날 생각이 납니다. 사실은 옛날도 아니지만.....
저도 아버지 못지않게 고집세고 성질 별나다고 생각하며 살때지요.
40이 되도록 장가갈 생각도 않는 아들앞에 어머나가 나타났습니다.
사무실 밖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제 책상앞에서 큰절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번도 아니고 부처님앞에서 절하듯......
아무리 말려도, 나중엔 피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며칠있다 또, 또 며칠있다 또.....어머니 고집이 그렇게 센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제 고집은 시쳇말로 게임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뒤로 혼자 살기를 포기했고 저도 두 아이의 애비가 되었답니다.
제가 제 어머니처럼 아이들에게 이길 수 있을지......아직은 자신있는 답을 못하겠습니다.
세월이 저를 애비로 만들거라 믿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어릴때 자주가던 집 뒤의 야산자락 입니다. 그땐 소나무밑에 집채만한 땔나무 가리가 있었답니다.
아버지에게 혼나면 땔나무가리 옆으로 도망나와 숨어있곤 했었지요. 취학전의 아이가 하루종일.....
얼마나 고집이 센지 저를 이기는건 아버지손에 들린 '부지깽이' 밖에 없었답니다.
몇년전, 그 땔나무가리 자리에 산소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죽은 사람 소원은 못들어 줘도, 살아 계실때 약속을 지키자고 실행에 옮긴 거지요.
화마로 청춘을 우울하게 보낸 어머님은 죽어서도 화장은 안된다 하십니다.
큰형님도 처음 약속은 못지켰지만, 이번 약속은 지키겠다는 의지겠지요.
잘 다듬어진 봉분은 어머니의 집입니다. 영원한.....
요즈음도 한달에 두어번씩 아이들과 다녀 오곤 합니다.
산소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빠가 죽으면 여기다 묻어줄래"하고요.
"왜요? 왜 여기다 묻어요?" 하고 되 묻습니다.
......"엄마 옆에 있고 싶으니까?" 언제 까지고.......
<3월 16일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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