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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함에 대하여

세칸 2008. 7. 10. 15:14

심심함에 대하여

 

한양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심심하다는 것은 딱히 마음을 둘 데가 없다는 말이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의욕이 없다는 뜻이다. 갑자기 모든 일이 시들해진다. 매사가 심드렁해지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바쁜 사람도 심심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의 심심함은 게임이나 만화책 한 권이면 금세 해결된다. 하지만 머리가 크고 생각이 많아지면 이 심심함은 자칫 영혼을 침식시키고 정신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이 된다. 심심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지면 머리가 무겁다. 머리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짓눌려서, 내 생각을 내 맘대로 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만든다. 사람은 심심함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르나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 마치 귀를 쫑긋 세운 토끼처럼.” 누구나 심심할 때 변화를 갈망한다.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마음을 쏟아 몰두해 온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질 때 얼마나 미칠 것 같겠는가? 그래서 상황을 일거에 바꿔줄 일을 찾는다. 한 순간 고여만 있던 머리 속에 소용돌이가 일고, 무기력하게 멈춰 섰던 가슴 속에 격렬한 고동이 친다.

 

인간의 창조적 작업은 대체로 심심함의 산물이다. 인간은 심심함을 통해 거듭나는 존재다. 심심함이 빚은 공상과 몽상 속에서 인류사의 중요한 발견과 성취가 다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튼은 사과나무 아래 심심하게 누워 있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어릴 적에 너무 심심해서 벌레를 관찰하고 채집하던 파브르는 세계적인 곤충학자가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낙지를 먹다가 빨판이 입천장에 달라붙는 것을 보고 농구화의 밑 바닥 빨판을 발명한 일본 사람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심심함이 없이는 창조도 없다.

 

예술도 대부분 이런 심심함과 따분함의 산물이다. 하지만 예술 속에서는 일상의 따분함과 답답함이 한 순간에 뒤집히는 마술이 일어난다. 경마장의 출발선에서 막 달려 나가려는 말의 고삐를 잠시 잡아채고 있거나,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만 떼면 앞으로 질주할 태세를 갖춘 자동차처럼, 예술가들은 바쁜 생활 속에서 심심함 또는 한가로움을 일부러 찾아서 즐기고, 만들어 즐긴다. 그리고 여기서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심함은 따분함과 같은 의미일 뿐이다. 그들은 시간을 때우고, 시간을 죽일 궁리만 한다. 여기에 창조의 점화는 없다. 불꽃은 끝내 타오르지 않는다.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을 생각하며 쓴 《과정록》이란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마루를 배회하시다가 갑자기 쌍륙(*두 사람이 주사위를 던져 노는 게임)을 끌어당겨 왼손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던져 갑과 을 양편으로 나누어 대국을 하셨다. 그때 손님이 곁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 놀이를 하셨다. 이윽고 웃으며 일어나셔서 붓을 당겨 남의 편지에 답장을 쓰셨다.  “사흘 주야로 비가 내려 사랑스럽게 한창 핀 살구꽃이 떨어져 붉은 진흙이 되었습니다. 긴긴 날 애를 태우며 앉아서 혼자 쌍륙을 가지고 놉니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지요. ‘다섯이야!’, ‘여섯이야!’ 외치다보니 오히려 상대편과 나라는 사이가 생겨나서, 승부에 마음이 쓰여 문득 적수가 되더군요. 저도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꼭 같은 내 두 손에 대해서도 사사롭게 여기는 바가 있는 것일까요? 내 두 손이 이미 이 쪽 저 쪽으로 편이 갈리고 보면 상대편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제 두 손에 대해 조물주와 같은 존재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은 부추기고 한쪽은 억누르기를 이같이 하다니요. 어제 비에 살구꽃이야 비록 시들어 떨어졌겠으나 복사꽃은 선명하게 곱겠지요. 나는 또한 모르겠습니다. 저 조물주가 복사꽃을 부추기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운 바가 있어서일까요?” 손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선생께서 쌍륙에 뜻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한편의 글을 구상하고 계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이렇게 둘이 하는 쌍륙 놀이를 혼자 놀면서도 가슴 속에서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그들은 삶의 깨달음을 포착해낸다. 그저 허투루 시간의 강물에 휩쓸려 마음을 떠내려 보내는 법이 없다.

 

그러고 보면 심심함 속에서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하는 일은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사람은 일이 없다고 한가로워지는 동물이 아니다. 시험만 끝나면, 방학만 되면 마음껏 놀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심심해져서 나태해질 뿐이다. 바쁜 가운데 한가로움을 찾아 즐기고, 심심함 속에서 스스로 치열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덕무는 〈한가로움에 대하여〉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방으로 툭 터진 큰 길 옆에도 한가로움은 있다. 마음이 한가롭기만 하다면 굳이 자연을 찾아가고 깊은 산 속에 숨어살 필요가 없다. 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 시끌벅적하다가 해가 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하지만 나만은 책을 읽으며 편안하다. 때때로 문밖을 나서면 달리는 자는 땀을 흘리고, 말을 탄 자는 빠르게 지나가고, 수레와 말은 종횡으로 부딪치며 뒤섞인다. 그러나 나만은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천천히 걷는다. 저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내 한가로움을 놓치는 일은 한번도 없다. 왜 그런가? 내 마음이 한가롭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무료한 일상을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게임 같은 기계적인 동작 속에 떠밀어 보내는가? 이것으로 시간을 때울 수는 있겠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은 치유되지 않는다. 심심함이 지겨움과 동의어가 될 때 시간은 정체되어 고인다. 멀리 달아난 마음을 되찾아 와서 고인 시간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때 불기둥 같은 에너지가 솟아난다. 세상은 한꺼번에 눈부시게 변화한다. 더 이상 나는 예전의 나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