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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을 비꼬는 영국식 유머

세칸 2008. 5. 20. 14:50

거장을 비꼬는 영국식 유머

게리 웹 조각전

 

임근준·미술 평론가

 

현대 미술계에서 조각가가 큰소리치기는 쉽지 않다. 첫째, 1960년대 말 이후 기념비적인 거대한 조각품을 만드는 일은 일종의 '금기'가 됐다. 정색하고 거창한 조각품을 만들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둘째, 2차 대전 이후 추상미술이 발전하면서 조각가들은 철(鐵), 돌, 나무 등 소재 자체의 고유한 특성, 즉 '물성'(物性)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니멀리즘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닿았다. 조각품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간략하게 몰고 간 탓이다. 이후 회화에서는 미니멀리즘 이후를 탐색하는 '포스트 미니멀리즘' 실험이 계속됐고, 기호학의 세례를 받은 '포스트모던 회화'가 나타났으며,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도 이뤄졌다. 조각은 그렇지 못했다.

광야에 몇 ㎞에 걸쳐 길고 긴 선을 긋는 식으로 광막한 풍경 그 자체를 작품으로 변모시키는 대지 미술(Land Art)이 나타나고, 특정 장소에 꼭 맞게 작품을 구상해서 배치하는 '장소 특정적 설치 미술'이 유행하고, 뉴미디어 아트가 부각됐다. 그러면서 조각이라는 장르는 점점 더 동시대 미술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아틀리에 에르메스가 소개하는 게리 웹(Webb·35)은 조각이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비껴난 시기에 드물게 정통 조각으로 자기 이름을 세우는 데 성공한 조각가다. 영국 골드스미스 미술대학을 졸업한 웹은 대학 선배들이 기획한 그룹전을 통해 처음 이름을 알렸다. 웹의 선배들은 일명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s)라고 불리는 스타 작가들이다. 속되게 말하면 선배 잘 만나서 인생이 쉽게 풀린 셈이다. 하지만 웹의 작업이 독특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웹은 현대 조각이 한창 대우를 받던 시절의 문법을 차용한다. 미니멀리즘의 문법을 차용해 '유희'를 시도한 〈모듈〉 연작(사진)이 대표적이다. 직사각형의 거울 조각을 벽면이나 기둥에 지그재그로 엇갈려가며 붙여놓은 웹의 작품은 얼핏 보기에 미니멀리즘 조각과 비슷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웹이 쓰는 기본 재료는 모두 건축자재 상점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레디메이드 제품이다. 거울 조각도 자석 등을 이용해 불안정하기 짝이 없게 붙여 놓았다. 이렇게 웹은 자기 작품의 재료와 구조를 가지고 서양 조각사를 비꼰다. 영국식의 썰렁한 유머 같다.

한편 형형색색의 알루미늄 덩어리들을 이어 붙여서 만든 〈토템〉 연작은 좀 더 노골적으로 앞선 세대의 거장들이 만든 '기념비적' 조각품을 놀린다. 알루미늄 덩어리로 기둥을 쌓는 방식이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에 대한 오마주라면, 철제 프레임을 이용해서 조각품의 구조를 짜는 방식은 앤서니 카로(84)의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농담'이다. 웹이 만든 알루미늄 덩어리들은 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무척 무겁다.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고의적인 '눈속임'이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요구하는 작품들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아, 조각 작품이 이렇게 인테리어 소품처럼 예쁘고 귀여워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즐길만한 전시다. 전시는 5월 25일까지. (02)544-7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