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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묵하게 문명의 기원에 대해 묻는다

세칸 2008. 5. 13. 10:24

그는 과묵하게 문명의 기원에 대해 묻는다

안젤름 키퍼 展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미술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안젤름 키퍼(Kiefer·63)의 《양치식물의 비밀 전》이 다음달 10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95년과 2001년에 이어 세 번째 한국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 신관 1층을 꽉 채운 설치작품 〈양치식물의 비밀〉(2007)이 그 핵심이다. 가로 140㎝, 세로 190㎝ 짜리 대형 판자 20개를 이어 붙인 평면 작업이 한쪽 벽을 꽉 채웠다. 말라붙은 붉은 흙 위에 조용히 뿌리를 뻗은 고사리 등 양치식물이 매끄러운 유리판을 통해 들여다보인다. 한편 전시장 복판에는 부슬부슬 삭아가는 시멘트 구조물 두 개가 서 있다.

여기서 평면 작업은 인간 이전에도 존재했고, 인간 이후에도 유구할 자연을 상징한다. 시멘트 구조물은 인간의 문명이다. 판자 20개와 구조물 2개가 합한 1층 전체가 한 '작품'이다.

2층에 걸린 작품 〈땅 위의 하늘〉(2007)은 관객의 머리 속에 맴도는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같은 분류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이 작품은 가로 5.6m, 세로 2.4m의 캔버스에 흙을 바르고, 그 위에 가시덤불과 녹슨 납덩이 배 모형을 붙인 것이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흙이 멋대로 마르게 내버려 둔 것 같지만, 거리를 두고 물러나면 길고 긴 험로가 아득한 지평선 한복판으로 아물아물 뻗어나간 구도가 나타난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신관에 놓인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의 설치작품〈양치식물의 비밀〉앞에서 한 관객이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키퍼는 2차 대전 이후 독일 현대미술계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프라이부르크대 법대를 중퇴하고 뒤셀도르프 미대 등에서 수학하면서 세계적 전위예술가 요셉 보이스(Beuys·1921~1986)를 만나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69년 독일 칼스루에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자신이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지배〉 시리즈를 선보여 독일 미술계에 충격을 줬다. 그때까지 독일 미술계에서 나치 과거사는 철저한 금기였다. 이후 키퍼는 중세 연금술, 고대 유대교 교리, 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역사에 대한 성찰을 신화와 선사(先史)의 영역까지 확장시켰다.

키퍼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과묵하고 진지하고 내성적인 사내라고 말한다. 그는 1993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프로방스 지방의 소읍 바르작에서 은둔자처럼 작업한다. 매주 금~일요일은 오래된 비단공장을 개조한 작업실에 틀어박히는 날이다. 그가 문을 잠그면 화랑도, 기자도, 조수도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20만㎡(6만평) 규모의 이 개인 영지에서 키퍼는 끊임없이 거대한 설치 작품과 회화를 생산해낸다.

키퍼는 무겁고 큰 작가다. 삶과 죽음, 인간과 우주, 자연과 문명 같은 진지한 주제를 대형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는 단정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렇고, 저 문제는 저렇다"는 식으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관객에게 들이미는 대신, 자신과 함께 사색하고 성찰하도록 초대한다. 이번 전시에 키퍼는 9점을 냈다. 많은 숫자가 아닌데도 전시장은 꽉 찬다. 한 점 한 점에서 뿜어져 나온 고요한 에너지가 독일 숲의 안개처럼 전시장에 서려있다. (02)735-8449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입력시간 : 2008.05.12 2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