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제주 귀덕마을 화가 강요배

세칸 2008. 2. 13. 09:02

"싱싱하고 맛나고 쉬운 그림… 그게 내 힘이요"

 

제주 귀덕마을 화가 강요배
"내 그림이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으면…"

 

 

화가 강요배(56)씨는 8년째 제주시 한림읍 귀덕 1리에 틀어박혀서 바다와 하늘과 팽나무를 그리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10시쯤 시골길 2㎞를 터덜터덜 걸어 마을 변두리에 세운 50평짜리 작업실에 간다. 오후 6시까지 김매고 책 보고 그림 그린 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나날이다.

부인(52)이 간간이 작업실에 들른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보통의 생활인이다. 그래도 강씨는 작품을 보는 부인의 표정을 슬쩍 읽고 "이 그림은 됐다" 혹은 "안 됐다"는 판단을 내리곤 한다. 그런 내심을 부인에게 일일이 털어놓진 않는다. 그는 눈썹이 짙고 볼이 우묵하며 웃음이 없고 말수가 적다. 눌변이다. 낱말과 낱말 사이가 띄엄띄엄 벌어지는 어눌하고 무거운 말투를 쓴다. 그는 "나는 싱싱한 그림, 쉽디쉬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 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에 강씨는 '스침'이라는 제목을 달고 근작 20여 점을 걸었다. 그는 민중미술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추상에 육박하는 단순한 구도로 자연을 그린다. 미술 평론가 성완경(64) 인하대 교수는 그가 "추상에 근접한 지점까지 갔다가 다시 구상으로 돌아오는 왕복운동을 반복하고 있다"고 썼다. 강씨는 중년 이상 애호가 층을 두텁게 확보한 화가다. 그러나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는 30~40대 평론가들의 관심에선 얼마간 비껴 서 있다. 시류와의 간극을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자, 그는 짧고 무거운 침묵 끝에 간결하게 답했다.

"나는 '내 이름이 미술사의 어떤 대목에 올라가는가'에는 별 관심 없어요. 그런 것에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뒀지요. 대신 '미술이 무엇이냐' 자꾸 생각하지요." 그는 "(젊은 작가들이 하는) 추상미술, 개념미술은 스무고개 수수께끼 같다"고 했다. "재미는 있지만 '맛'은 없지요. 나는 '생각'이나 '말'에서 큰 놀라움을 느끼지 못해요. 그러나 누군가가 어떤 색의 '맛'을 생생하게 잡아냈다면 그것은 놀랍고 부럽지요." 그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TV도, 장난감도 없던 시절 시골집 마루에 앉아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내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한참씩 들여다보곤 했어요. 설랬어요.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불쑥 한 세계가 생겨나다니, 엄청나구나!' 하고."

 

강요배씨의 '담월'. 캔버스에 아크릴릭. 80.3×116.7㎝. 2007년작. /학고재 제공  

 

공부하러 뭍에 나간 아홉 살 터울인 형이 간간이 소포를 보내왔다. 누런 종이를 풀면 잡지에 실린 명화를 여러 장 반듯하게 오려 붙인 스케치북이 나왔다. 그 스케치북을 강씨는 화집(畵集)처럼 오래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형은 10년 전 별세했다.

귀덕 1리는 들판 너머 바다가 물결치는 300호 규모의 소읍이다. 주민 중에 화가는 강씨 뿐이다. 부인을 빼면 아무하고도 한 마디 안 하고 지나가는 날이 있다. 강씨는 "적막을 견디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지나온 생애에 궂은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었지요. 내 몸만 제주에 온 게 아니라, 오만 가지 상념도 나를 따라왔어요. 그걸 내 속에 풀어헤쳐 놓고 몸으론 김을 매지요. 그러자면 새 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들리는데 그걸 묵묵히 듣기가 참 힘들었어요."

그는 100호쯤 되는 유화를 열흘에 한 점씩, 해마다 30~40점 완성한다. 자기 그림을 곁에 두고 오래 지니는 대신, 그리는 대로 남에게 주거나 판다. "그림을 믿어 보는 거지요. 내 그림에 힘이 있으면 그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테고요. 내가 할 일은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고요." 26일까지. (02)720-1525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입력시간 : 2008.02.12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