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예술… 도시가 즐겁다
길을 걷다가, 호텔 로비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 혹은 병원 복도를 걸으며 미술품을 만날 수 있다? 이젠 모두 우리의 현실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 생활 주변에선 조금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도처에 미술품이 놓여있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사옥은 물론, 호텔, 병원, 골프장 등 곳곳에 미술품이 들어와 있다.
이젠 대형 건축물의 경우 건축비의 일부를 미술품 구입에 써야 하는 법규정을 넘어서 자발적으로 시민과 고객에게 미술을 제공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김달진미술연구소와 함께 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 미술관 큐레이터, 화랑 대표, 컬렉터 등 미술인 60명에게 '미술품이 좋은 건물'을 추천받았다. 먼저 이들 전문가들에게 ▲직접 가서 본 곳 중에서 ▲미술관이 아닌데도 미술관 못지않은 컬렉션을 가진 곳을 물었다. 훌륭한 미술품을 수집해 일반인이 쉽게 갈 수 있는 장소에 전시하는 기업, 그리고 그 건물 등을 알려서 누구나 어느 동네, 어느 건물에 가면 어떤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지 소개하기 위해서다.
미술인들의 추천목록에는 SK텔레콤 본사사옥(서울 을지로2가), 이건산업 본사(인천), 한국수출입은행(여의도) 등 기업·금융기관 건물과 JW메리어트호텔(반포동), 밀레니엄힐튼호텔(남대문로5가), W서울워커힐호텔(광장동) 등 호텔이 다수 포함됐다. 블루헤런(경기 여주), 렉스필드(경기 여주) 등 골프장(클럽하우스 포함), 그리고 대법원과 사법연수원 건물을 추천한 미술인도 있었다. 서울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병원과 샤인빌 리조트(서귀포) 등 휴양시설도 미술품이 좋은 곳으로 추천됐다.
'추천한 건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백남준의 'TV나무'(포스코센터)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흥국생명),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포스코센터),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일신 여의도 91' 등이 호평을 받아 '미술품이 좋은 건물'과 대부분 중복됐다.
전문가들이 추천한 63곳의 '미술품이 좋은 건물' 중 중복 추천된 건물들을 소개한다.
고충환(평론가) 김근중(화가) 김미진(예술의전당 전시감독) 김병종(화가) 김복영(평론가) 김선두(화가) 김영호(평론가) 김우광(SBS프로덕션 사장) 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 김종근(평론가) 김준기(평론가) 김창실(선화랑 대표) 김형근(화가) 김홍희(경기도미술관장) 노준의(토탈미술관장) 도형태(갤러리현대 대표) 문봉선(화가) 박광진(화가) 박미정(환기미술관장) 박삼철(서울시 도시갤러리 추진단장) 박석원(조각가) 박영덕(박영덕화랑 대표) 박영택(평론가) 박천남(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배동만(컬렉터·삼성사회공헌위원회 사장) 서진수(미술경영연구소장) 송미숙(평론가) 신달호(조각가) 신옥진(공간화랑 대표) 오광수(평론가) 오수환(화가) 우찬규(학고재 대표) 유근택(화가) 유재길(평론가) 윤명로(화가) 윤진섭(평론가) 이강소(화가) 이두식(화가) 이상준(컬렉터·프리마호텔 사장) 이석주(화가) 이숙자(화가) 이옥경(가나아트갤러리 대표) 이종상(화가) 이현숙(국제갤러리 대표) 이화익(이화익갤러리 대표) 장동광(큐레이터) 전수천(화가·조각가) 전진삼(건축비평가) 정준모(고양시 문화재단 전시감독) 정현(조각가) 주태석(화가) 최승훈(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최시영(한국실내건축가협회장) 최열(평론가) 최은주(덕수궁미술관장) 최인수(조각가) 하계훈 (평론가) 한만영(화가) 황주리(화가) 황필홍(컬렉터·단국대 교수)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포스코센터―백남준과 함께 미래 속으로
10년 전 처음으로 서울 포스코센터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속으로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높은 천장, 시원한 유리와 쭉쭉 뻗은 강철 구조에 네모 반듯한 공간을 수놓고 있는 TV브라운관들. 로비 복판에 기둥처럼 선 강철에 열매같이 매달린 TV('TV나무')에는 온갖 빛깔들이 번쩍거리는데, 천장에 매달린 깔때기에도 TV가 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TV깔때기').
아주 깔끔한 초현대식 건물인 포스코센터 안팎에는 백남준의 'TV나무' 'TV깔때기' 외에도 여러 작가들의 대형 작품들이 가득하다. 우리시대의 장인으로 성장한 심문섭 김청정 김희성 도흥록 조성묵 신옥주 박석원 이우환 그리고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들로 넘치고 있다. 대부분 금속을 재료로 쓴 작품들은 건물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그게 특별히 예술품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포스코센터 로비에 설치된 백남준의 작품 'TV깔때기'.
흥국생명―매일 그는 힘차게 망치질한다
서울 신문로1가 흥국생명 빌딩 바깥에는 검고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진 키 22m짜리 거대한 인물상 '망치질하는 사람'이 서 있다. 미국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이 작품은 오른팔이 1분 17초 간격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손에 든 망치를 내리친다. 이 거인상은 광화문 고층빌딩 숲에서, 위치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변화하는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주면서 이 거리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면 정면 벽면을 가득 채운 강익중의 '아름다운 강산'이 마주 보인다. 7.62×7.62㎝의 손바닥만한 화면 7500개를 이어 붙인 벽화이다. 각각의 화면에는 사람, 꽃, 나무, 한글, 한자, 영어 단어 등 다른 형상이 그려져 있어, 인간세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로비 뒤편에도 전구(電球)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레이저 홀로그램 기술과 접목시킨 잉고 마우러와 에카드 누스의 '홀론스키의 사열'이 있다.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대기업 건물이 다채롭고 재미있는 작품으로 채워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광화문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흥국생명 사옥앞 보로프스키의 작품‘망치질하는 사람’.
삼성서울병원―치유와 안식을 떠올리다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에서 어느 한순간 숨을 돌려 치유와 평안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치료의 방법이 될 것이다. 삼성서울병원은 병원 문을 열 때부터 세심하게 배려된 건축물과 미술작품이 빚어내는 공간적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엔 총 640여 점의 미술작품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은 1층 로비 통로 천장을 가로지르는 송번수의 '생의 오케스트라', 장례식장 앞에 서있는 최재은의 13.5m 높이 대형 조각 '시간의 방향', 본관 앞 잔디밭에 놓인 발다치니 세자르의 청동조각 '엄지손가락', 1층 원무 접수대 벽면의 정창섭의 평면작품 '묵고93697', 대강당 앞에 있는 이대원의 대작 유화 '농원' 등이다.
미술에 있어서 '장소성(場所性)'이란 쉽게 말하자면 그것이 그곳에 꼭 있어야만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삼성서울병원은 이를 충실히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앞에 설치된 최재은의‘시간의 방향’. 멀리서 보면지상에 떨어진 푸른 눈물 한 방울처럼 보이는 이 작품 앞을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김평화 인턴기자(연세대 응용통계2년)
최은주·덕수궁미술관장
일신방직―여의도 빌딩 숲에 누운 추상조각
서울 여의도 일신방직 본사 건물도 훌륭한 미술품 컬렉션으로 추천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인상 깊은 작품으로 꼽은 것은 건물 앞에 설치된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조각 '일신 여의도 91'이다. 1991년 이 회사가 사옥을 세울 때 작가에게 직접 의뢰해 제작한 추상조각이 여의도 빌딩 숲 한가운데에 눈에 띄게 서 있다.
건물 내부에는 장 뒤뷔페, 도널드 저드, 바스키아, 솔 르윗 등 서양 현대미술의 전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전시돼 있어서, 이 회사를 찾아온 사람 누구나 볼 수 있다. 일신방직이 이런 미술관급 컬렉션을 갖춘 비결은 이 회사의 김영호 회장이 이름난 미술 컬렉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2007년 5월에 독일의 명품 필기구 회사인 몽블랑 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의 한국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의도 일신방직 본사 건물 앞에 있는 스타치올리의 '조각 일신 여의도 91'./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규현 기자 kyuh@chosun.com
호텔 프리마―이강소·앤디워홀 '갤러리 같은 호텔'
서울 청담동 호텔 프리마에서는 최신 경향의 현대미술에서부터 고미술, 그리고 외국의 유명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또 작품을 수시로 교체하여 호텔 전체를 생동감 넘치는 갤러리로 활용한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힘찬 필치로 정중동 미학을 표현한 이강소의 대작을 만날 수 있다. 이를 시작으로 2층 안내데스크엔 김창열의 '물방울'과 사석원의 '꽃 등짐을 진 당나귀', 연회장 입구 등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와 '마가렛트 여왕' 시리즈, 벽면엔 검정 바탕에 백색으로 인간의 존재감을 구현한 박강성의 대작과 장이규의 소나무 그림에 이르기까지 2000여 점의 소장품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소치실', '의재실', '남농실' 등 아예 방 이름조차 유명화가의 호를 따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호텔 프리마 로비에 전시된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판화 '자화상'./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서울 청담동 호텔 프리마에는 세계적 현대 미술 작가인 '앤디 워홀' 의 작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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