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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 "日食인 줄 알았어요"

세칸 2008. 2. 6. 01:02

뉴욕 일본식당에 '가루비' '차푸채'...

손님들 "日食인 줄 알았어요"

 

현지화 마케팅 능한 日자본, 韓食으로 돈벌이
싱가포르는 '한식+세련된 인테리어'로 큰인기

 

 

뉴욕 맨해튼의 사무실 밀집지역인 3번가에 위치한 규카쿠(牛角). 'Gyu-Kaku, Japanese BBQ Dining'(규카쿠, 일본식 바비큐)이란 간판이 큼지막하게 걸렸다. 손님이 들어서면 백인, 흑인, 인도네시아인, 태국인, 티베트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모든 종업원들이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를 외친다. 일본 본토와 똑같다. 낮 12시30분이 되자 100여 석 좌석이 모두 찼다. 티베트 출신 종업원 소남씨는 "점심·저녁 피크타임에는 빈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일본식 이자카야(주점) 느낌이지만 정작 메뉴 중 50~80%가 한국 음식들이다. '가루비(Karubi)', '비빔바(Bibimba)', '기무치(Kimuchi)', '차푸채(Chapu Che·잡채)'부터 '나무루(Namuru·나물)', '구파(Kuppa·국밥)'까지 눈에 띈다.


일본식 표기 탓에 '규카쿠' 종업원조차 한식을 '일식'으로 알고 있었다. 종업원 소남씨에게 갈비·비빔밥을 가리키며 "이게 어느 나라 음식이냐"고 묻자 "일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친구 3명과 함께 점식 식사를 하러 온 데이비드 커크(Kirk·32세)씨는 "갈비·비빔밥 등이 한국 음식인 줄 처음 알았다"며 "간판이 일본 식당이라 당연히 일본 음식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세계적 고기구이 체인점‘규카쿠’뉴욕 지점은 맨해튼에서 일하는 직장인들로 항상 붐빈다. 이들은‘비빔바(비빔밥)’‘가루비(갈비)’를 일식으로 알고 있다. /뉴욕=김기훈 특파원 

 

다음 날 점심시간,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32번가 코리아타운의 한식당을 찾았다. 외국인의 비중이 낮았다. 한국의 전통 설렁탕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A식당의 경우 고객 60여명 중 외국인은 10%도 되지 않는다. 불고기, 된장찌개, 비빔밥 등 전통한식을 다루는 인근의 다른 한식당에도 재미교포와 주재원, 관광객 등 한국인들만 득실거리는 실정이다.

사실 한식을 끌어들여 '장사'를 하는 식당은 적지 않다. 세계적 요리사인 일본인 노부 마쓰히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뉴욕의 퓨전 일식 레스토랑 '노부'에서 한국 갈비를 내놓는다. 그러나 '규카쿠'가 무서운 건, 대형 자본, 체계적 서비스와 노하우로 무장하고 세계 주요 도시에서 무섭게 세(勢)를 불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규카쿠는 현재 일본에만 무려 900여개 지점을 운영 중이고, 뉴욕(2개점), 로스앤젤레스(8개점), 하와이(2개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2개점), 싱가포르(2개점), 대만(4개점) 등에서 성업 중이다. 한식이 '식당업주'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패가 갈리고 있는 사이, 일본의 '기업형 자본'이 한식을 '일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일본 외식기업인 '규카쿠'가 한국 음식으로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포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음식 서빙 방식, 레스토랑 분위기, 현지화된 양념 조절 등 음식을 마케팅하는 방식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식문화 산업 세계화를 위한 추진 전략 연구서'를 낸 광주요그룹 조태권 회장은 "규카쿠는 한식을 포장하는 인테리어와 서비스를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운영함으로써 일본 식문화를 동경하는 외국인에게 한식을 일본의 식문화로 오인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뉴욕과 LA 등에서 미국 현지인을 대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용수산' 김윤영 대표는 "해외 교민들은 생계를 위해 식당을 경영할 뿐,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식을 '뺏는' 나라는 일본만이 아니다. 세계 온갖 음식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싱가포르. 이곳의 최고 레스토랑 평가서 '싱가포르의 톱 레스토랑 2007'(Singapore's Top Restaurants 2007)에 등재된 212곳 중 한식당은 '크리스탈 제이드 코리안 진생 치킨 & BBQ'(Crystal Jade Korean Ginseng Chicken & BBQ)가 유일하다. 이 식당의 운영자는 싱가포르 대형 외식기업 '크리스탈 제이드'. 싱가포르는 물론 중국, 홍콩, 한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고급 중식당, 베이커리 체인, 중국식 라면점, 만둣집 등을 체인으로 갖고 있는 대형 외식 기업이다. 기업 홍보 담당자는 "지난 2005년 오처드로드 니안시티(Ngee Ann City)에 1호점을 냈는데, 반응이 좋아 이곳 센터포인트 쇼핑몰에 2호점을 냈다"고 설명했다.

1월 중순 방문한 싱가포르 최대 쇼핑가 오처드로드 센터포인트 쇼핑몰에 위치한 '크리스탈 제이드 코리안 진생 치킨 & BBQ'의 메뉴는 삼계탕과 갈비·불고기가 대표 메뉴지만, 순두부찌개·비빔밥·김치찌개·해물파전·소주·인삼차까지 갖췄다. 평일 점심, 식당은 싱가포르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교포가 운영하는 다른 한식당은 한국 관광객이나 출장객, 기업주재원 등이 손님의 대부분인데 반해, 이 식당은 현지인으로 꽉 찬다.

싱가포르에 사는 박건호(35)씨는 "크리스탈 제이드는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한식당보다 맛은 거의 같으면서 인테리어가 훨씬 세련됐어요. 쾌쾌한 냄새도 나지 않고요. 특히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한다면 교민 식당엔 데려가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날이 '한국의 맛'을 파는 집이 늘어나지만, 그 수익은 다 외국인 주머니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게 한식의 현실이다.

 

 

일 고기구이 체인점 '규카쿠'… 특수 석쇠로 옷에 고기냄새 안배게 해

 

싱가포르 '크리스탈 제이드'
분위기 깔끔… 직장인 부담없는 가격대

 

작년 10월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이 주관한 '한국 식문화 글로벌화 토론회'에서는 한국 체류 외국인 2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 중 '한국 음식의 글로벌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매운맛'(29.1%)이 1위를 차지했고, 2위(20.9%)는 '마늘 등의 독특한 냄새'였다.

규카쿠 홈페이지(www.gyu-kaku.com)의 '자주 묻는 질문'(FAQ) 코너에도 "옷에 BBQ 냄새가 배지 않나요?"란 질문이 있다. 이에 대해 규카쿠측은 "배지 않습니다. 연기를 아래로 빼내도록 특별 디자인한 수입 석쇠를 사용, 연기가 완벽하게 제거된 환경에서 식사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크리스탈 제이드도 고기 굽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석쇠를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다.

 

 

외국인 손님들이 얼마나 음식 냄새나 연기가 옷에 밸까 걱정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해 규카쿠와 크리스탈 제이드가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갈비, 김치 등 음식 자체도 교민 운영 한식당보다 마늘 등 자극적인 냄새가 덜하다. 규카쿠의 경우 음식을 큰 접시에 조금씩 담아 세련되면서 비싼 음식이란 인상을 줬다.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 인테리어가 현대적이고 세련됐다는 점도 규카쿠와 크리스탈 제이드의 공통점이다. 규카쿠는 벽, 테이블, 접시, 컵 등이 모두 고급스런 검은색을 주조로 어둡게 단장됐다. 크리스탈 제이드는 "한국의 사계절을 주제로 식당 내부를 깨끗하고 모던하게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특징은 뉴욕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우래옥 등 몇몇 한식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숫자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서비스에서도 이들 식당은 교민들이 운영하는 한식당과 차이가 난다. 규카쿠는 손님이 들어오면 모든 직원이 "어서 오십시오"를 복창하고, 주문을 받을 때 다리를 구부리고 상체를 낮춰 눈높이가 손님과 같거나 낮도록 하는 자세를 철저히 지켰다. 크리스탈 제이드는 "순두부찌개가 뭐냐"는 질문에 영어 또는 중국어로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한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교민 식당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부분이다.

샐러리맨을 주 타깃으로 삼은 것도 외국계 한식당의 특징이다. 1인당 식사비는 규카쿠가 20~25달러(약 1만9000~2만4000원), 크리스탈 제이드 30~25싱가포르달러(약 2만~2만3000원)로 중간을 웃도는 수준이다. 뉴욕에 사는 한국인 공형식씨는 "규카쿠가 맛이나 분위기는 맨해튼의 최고급 한식당보다는 떨어지지만, 가격에 비하면 깔끔하고 고급스런 분위기라 직장인들이 부담 없이 찾게 된다"고 평가했다.
 

뉴욕=김기훈 특파원 khkim@chosun.com

싱가포르=김성윤 기자 gourmet@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