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설 그 행복한 기다림

세칸 2008. 2. 6. 13:55
詩로 읽는 세상사
설 그 행복한 기다림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 밤새도록 자지 않고 /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 빨간 화롯불 가에서 / 내 꿈은 달아오르고 /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 어머니의 나라 /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하루 앞서 설날을 연습하는 까치설날/ 색동옷 설빔 졸라서 미리 입어도/ 말 잘 들어 얻은 이름 고운 세살배기야/ 널도 뛰고 밤윷도 던져보고//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나무 옻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따금따금 가시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양반동네 상나무, 깔고앉자 구기자나무, 마당 쓸어 싸리나무, 가다보니 가닥나무, 오다보니 오동나무, 방귀뽕뽕 뽕나무, 데끼이눔 대나무, 참을 인자 참나문가, 칼에 찔려 피나문가…// 보는 만큼 듣는 만큼 세상이 재미나는/ 아이로 돌아가 설날을 기다리며/ 까치설날 눈썹 셀라 잠 못 자는 세살짜리로.’
- 유안진 ‘고운 세살배기로’

유안진은 번잡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정한 것으로 동심을 이야기한다. 어린 아이는 세상을 호기심과 동경으로 바라볼 줄 안다. 그 동심이 가장 설레는 때로 시인은 설을 기억했다. 설을 기다리며 잠 설치는 세살배기, 그 고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추석을 설보다 큰 민족의 명절로 꼽는 사람이 많지만 어린 날 추억으로 치자면 설이 훨씬 더 신났다. 설이든 추석이든 모처럼 목욕탕에 가고 고무신이 운동화로 바뀌고 명절빔도 얻어 입고 풍성한 음식을 맘껏 먹어볼 수 있다는 건 같았다. 그러나 설이 아이들에게 각별히 매력적이었던 건 세배라는 독특한 행사와 함께 횡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세배 순례까지 하고 나면 주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두둑해지곤 했다. 그런 아이들을 노려 구멍가게들은 ‘뽑기’를 잔뜩 들여다 놓았다. 아이들에게 설은 ‘폭음탄’도 눈깔사탕도 구슬도 장난감도 큰맘 먹고 사고, 만화방 만화도 모처럼 실컷 볼 수 있던 날이었다.

백석이 ‘여우난골족’에 구수한 서북사투리로 묘사한 설 정경은 아이들이 설에 누리는 즐거움의 절정이다. 여우 출몰하는 골짜기에 사는 일가 피붙이 수십이 왁자지껄 모여든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몰려다니며 갖은 놀이를 하다 설날 새벽녘이 돼서야 지쳐 잠이 든다. 명절 새 옷 냄새, 음식 냄새들이 코끝을 간질이며 아이들을 더욱 달뜨게 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난골족’

*진할머니 - 친할머니, 말수와 같이 - 말할 때마다, 고모 - 고무, 이녀 - 이씨네 딸, 오리치 - 오리 잡는 도구, 반디젓 - 밴댕이젓, 잔디 - 짠지, 숨굴막질 - 숨바꼭질, 꼬리잡이 호박떼기 제비손이구손이 - 줄 지어 하는 놀이들, 아르간 - 아랫간, 조아질 - 공기놀이, 바리깨돌림 - 주발 뚜껑 돌리기, 화디 - 등잔걸이, 사기방등 - 사기 등잔불,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추녀, 동세 - 동서(同壻), 무이징게국 - 무·새우국

 

일러스트 남지혜

  

청마 유치환은 설의 미덕을 ‘아이들에게 정신의 윤기와 풍성의 순차와 혈연에의 애착을 부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어린이들의 설날을 맞는 기쁨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릴 적에는 동지팥죽을 먹을 때부터 설날이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동지부터 설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마침내 설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이가 어머니였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조향미 ‘온돌방’).
정끝별도 음식을 장만하느라 며칠씩 동분서주하는 어머니의 곁에서 들뜬 마음으로 명절을 기다렸다. ‘돼지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누르고, 홍어를 삭히고, 김부각을 말리고, 술을 내리고, 산자를 튀기고, 약과를 모양내고, 오꼬시를 굳히고, 식혜를 끓이고, 수정과를 거르고, 떡을 빚고, 떡시루를 안치고, 약식을 누르고, 찰밥을 찌고, 뒷마당에 가마솥 뚜껑을 괴고는 가지가지 부꾸미와 부치미와 지짐이를 하고, 잡채를 무치고, 죽상어와 조기를 찌곤 하셨다. 그때마다 온갖 냄새와 부산스러움에 취해 엄마 치마폭 근처를 맴돌며 며칠을 들뜨곤 했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어머니는 놋그릇들을 꺼내 마당에 펼쳐놓았다. 푸른 녹이 슬거나 거뭇거뭇해진 놋그릇을 기왓가루, 모래, 재 따위를 묻힌 짚으로 닦았다. 놋그릇들은 반짝반짝 황금빛으로 빛났다. 닥쳐온 설날이 발하는 빛이었다.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 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음복 한 잔에 발그레한 얼굴은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빛깔이다. 이젠 곁에 없어 아득히 멀기만 하던 어머니의 그림자를 시인은 기억 속에서 불러내 모시고 지나간 설날의 추억과 함께 그리워한다.

‘설날 차례 지내고/ 음복 한 잔 하면/ 보고 싶은 어머니 얼굴/ 내 볼 물들이며 떠오른다// 설날 아침/ 막내 손 시릴까봐// 아득한 저승의 숨결로/ 벙어리장갑을 뜨고 계신// 나의 어머니.’
- 오탁번 ‘설날’

이번 설 연휴엔 징검다리 휴일로 길게는 9일까지 쉴 수 있어 해외여행객이 명절 사상 최대 규모라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여행사의 경우만 해도 설 연휴 해외여행객이 3만명을 넘어 작년 설 1만2500명의 갑절을 넘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해외 인기노선은 석 달 전부터 예약이 밀려들었다. 명절이 국내외로 여행 떠나기 좋은 휴가대목 비슷해진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절의 화두는 역시 ‘가족’이다.

바삐 살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은 한 끼 밥, 한 잔 술을 나누며 따사로운 혈육의 정을 확인한다. 설날을 가족과 함께 하면 행복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식도 크면 친구되지// 이만 나이 먹으면/ 잡초같이 산 인생이라도 흐뭇하구나// 봄에 푸르던 풀도/ 가을되면 시드는 법// 자 너도 한잔 받아라/ 잔디 줄기처럼 서로 엉기면/ 눈물 날듯이/ 푸근하구나// 누가 적막강산이라더냐/ 문 열고 들을 보면// 강 건너 날아가는/ 한 떼의 들기러기.’
- 김동현 ‘설날 아침에’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