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황금언덕'을 올라갔더니… '신의 물방울' 빚는 두 사나이가 있었다
와인보다 붉은 열정… 두명의 '부르고뉴 명장'을 만나다
포도에 물어보고 대화를 나눠요 좋은 와인은 그렇게 만들어지죠
와인맛은 곧 균형味 세련미와 복잡성을 함께 갖고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꼽으라면 로마네 콩티(Ro manee Conti)를 빠뜨릴 수 없다. 그 로마네 콩티의 산지가 바로 프랑스 부르고뉴이다. '부르고뉴의 신'이라 불리던 위대한 양조자 앙리 자이에(Henri Jayer·와인 만화인 '신의 물방울'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역시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부르고뉴 와인의 성지인 코트 도르(Cote d'Or·황금 언덕이란 뜻)를 찾았다. 총 길이가 50km가 안 되는 지역인데, 1395년부터 피노 누아(Pinot Noir) 한 가지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 정도로 품질 관리에 억척스럽다. 그들은 대지를 믿고 땅에 의지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와인을 만든다.
이곳 포도원들은 규모는 크진 않지만, 영향력만큼은 전 세계의 다른 어떤 곳보다 막강하다. 이런 전통을 이을 만한 도멘(부르고뉴의 와인제조업체)으로 어떤 곳들이 있을까. 요즘 와인 애호가들이 가장 열광하는 도멘은 단연 메오 카뮈제(Meo Camuzet)와 페로 미노(Perrot Minot)다. 두 도멘을 차례로 방문해 그들이 선대의 전통을 얼마나 잘 계승하고 있는지를 둘러 보았다.
'메오 카뮈제' 장 니콜라 메오
메오 카뮈제는 앙리 자이에와의 친분으로 유명한데, 사연은 이렇다. 1900년대 프랑스 의회 의원이었던 에티엔 카뮈제(Etienne Camuzet)는 코트 도르에서 가장 훌륭한 포도밭들을 사들이면서 양조업체를 설립한 뒤, 조카인 장 메오(Jean Meo)에게 밭을 물려줬다. 그런데 당시 장 메오는 드골 대통령을 도와 일을 하느라 파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사람을 찾아 소작을 준다. 이때 소작을 하던 이가 바로 앙리 자이에다. 장 메오의 빼어난 테루아르(토양·지형·기후 등 포도밭의 환경)와 앙리 자이에의 와인에 대한 열정이 만나,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이런 인연은 1988년 장 메오의 아들 장 니콜라 메오(Jean Nicolas Meo)가 부르고뉴로 오면서 더욱 깊어진다. 장 니콜라 메오는 앙리 자이에와 같은 밭을 구획만 나누어서 포도를 재배했기 때문에 자이에로부터 직접 와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요즘 부르고뉴에서 가장 각광 받는 와인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 니콜라 메오(왼쪽 사진)와 크리스토프 페로 미노(오른쪽)를 지난해 10월에 만났다. 이들은 각각‘메오 카뮈제’와‘페로 미노’라는 도멘(와인제조업체)을 운영 중이다. 장 니콜라 메오는‘부르고뉴의 신’이라 불리는 위대한 양조자인 앙리 자이에로부터 와인 만드는 법을 배웠다.
사무실에서 만난 장 니콜라 메오는 귀찮고 지루한 표정에 한쪽 눈을 자꾸 찡그려, 약간은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뭐부터 할까요? 와인 맛을 봐도 되고…."
"당신 밭이 가까우니, 밭에 가서 자세히 설명해주면 어떨까요"라고 하자, 그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밭? 가깝죠. 지금 갈까요?"
장 니콜라는 즉시 장화를 들고 나왔다. 리쉬부르(Richebourg)라는 이름의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의 남서쪽 끝 지점으로 갔다.
"중간 언덕이 가장 좋아요. 위쪽은 돌이 너무 많고, 아래쪽은 물이 흘러내려가기 때문이죠. 여기가 땅이 빨리 따뜻해지는 곳이에요. 위쪽은 고도가 높고 땅도 가파르기 때문에 수확이 일주일 정도 늦어요. 우리는 예외적인 땅을 갖고 있는 셈이죠."
―앙리 자이에와 당신은 어떻게 다른가요?
"앙리가 소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스승이 되었어요. 그는 65세였고, 나는 25세였죠. 그는 옛날 세대며, 저는 새로운 세대였어요. 앙리는 상냥하면서도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려고 했지만, 나는 와인에 약간 더 구조를 갖추게 하려고 하고, 맛에 대해서 더 엄격한 편입니다."
―와인을 잘 만들어내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양조보다는 밭이 가장 중요하죠. 여기 나무들의 수령은 80~90년에 이르죠. 우린 모든 포도나무를 일일이 손으로 돌보며 수확량을 줄여요. 나무마다 2~15개의 포도송이가 열리는데, 수령에 따라 수량 조절을 하는 거죠. 유기농으로 일하니까 훨씬 힘이 많이 들긴 하죠. 볏짚이나 소똥 등을 사용하면서 자연 상태를 유지해요. 포도는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포도에다가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는 거죠."
이번엔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 밭으로 옮겼다. 부르고뉴에서 단일 그랑 크뤼(최고 등급 와인)로는 가장 큰 밭이다. 갑자기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버스를 세우고 침략자처럼 밭으로 들어가더니 포도송이를 따서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장 니콜라가 그 모습을 보더니 고함을 질러댔다. "이봐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관광객들은 그가 누군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최상의 와인이 나오는 포도밭에서 포도 맛을 보는 것 이외에는.
―클로 드 부조는 어떤 와인입니까?
"부드럽지만 깊이가 있고, 복합성도 좋은 와인이죠. 우리가 갖고 있는 밭 중에서도 수도원과 가까운 이곳이 토양이 제일 알맞아요. 지표면에서 20cm만 들어가면 돌이 나오고, 80cm면 암반층이에요. 그 사이 공간으로 뿌리가 파고들어가기 때문에 광물성의 맛이 많이 느껴지죠."
―당신이 와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와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균형이에요. 위대한 와인은 세련미와 복잡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페로 미노' 크리스토프 페로 미노
장 니콜라 메오가 살고 있는 본 로마네(Vosne Romanee) 마을을 벗어나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모레 생 드니(Morey St. Denis)로 향했다. 2000년대 이후 명성이 높아지고 있는 양조업체, 페로 미노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이 업체는 4대에 걸쳐 모레 생 드니에서 와인을 만들어 오고 있다. 도멘 건물은 13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수녀원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현재 와인 생산을 진두지휘 하고 있는 크리스토프 페로 미노(Christophe Perrot Minot)는 1949년 설립된 이 도멘을 3대째 운영 중이다. 부르고뉴에서 와인 생산은 곧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버지 앙리(Henri)는 1992년 현업에서 은퇴했고, 아들 크리스토프가 1993년 빈티지(포도를 수확한 해)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와인 생산의 철학과 와인 제조 방법 등을 모두 바꿔 나갔다. 아버지가 만들 때는 평범한 와인에 불과했으나 크리스토프가 만들면서 페로 미노의 명성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비가 내리면 그는 헬리콥터를 띄워, 날개에서 일으킨 바람으로 물기를 제거하고 포도를 수확하기도 했다. 와인을 만들기 전에 그는 디자인 공부를 해 고급 패션디자인 회사인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에서 일했다. 대를 잇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디자인을 했었는데, 어떻게 와인의 세계로 들어오게 됐습니까?
"나는 패션과 와인이 전부 같다고 생각해요. 다 창조적이죠. 그리고 대지는 영원히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거니까 미련 없이 돌아왔어요. 과거엔 와인 품질이 왔다 갔다 했지만 1990년대 부르고뉴에서는 모든 것들이 개선되어 갔어요. 예전에는 빈티지가 나쁘면 속수무책이었지만, 날씨가 나쁘면 포도송이 숫자를 더 줄이든가 하는 방법으로 품질을 통제하기 시작한 거죠. 좋은 와인을 만들겠다는 생산자들의 야망이 있었던 겁니다."
페로 미노는 총 10헥타르(약 3만평)의 밭을 소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밭이 그랑 크뤼인 샤름 샹베르탱(Char mes Chambertin)과 마주아예레 샹베르탱(Mazoye res Chambertin)이다.
―당신들에게 토양이란, 테루아르란 무엇이죠?
"부르고뉴 사람이라면 누구나 땅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연과 교감하면서 와인을 만듭니까?
"테루아르는 항상 진실만을 말해요. 모든 일은 포도밭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꾸준히 땅을 관리하고 보살펴야만 하는 거죠. 자연의 흐름에 따라야 해요. 월력(moon calendar)을 이용하는데, 포도즙에 남은 찌꺼기만 해도 달의 영향을 받아 가라앉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합니다. 저는 균형미와 섬세함, 세련미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어떤 생산자는 한 그루당 포도송이를 10개씩 매달아두기도 하지만, 저는 6~8개의 송이만을 잘 키워서 와인으로 변화시켜요. 그렇게 만든 좋은 와인은 아주 예쁜 여인 같아요."(웃음)
부르고뉴의 와인 명장들을 만난 뒤 자연과 땅을 무한히 사랑하는 그들을 존경하게 됐고 고마움을 느꼈다. 장인 정신은 그들에겐 일상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