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특산품 현장을 가다
옛 향기 풍기는 일상생활 전통 특산품 3제(題)-곶감, 두부, 도자기
먼동이 틀 무렵, 이웃해 살고 있는 친척들이 모여든다. 마당에 걸어둔 가마솥에서는 벌써부터 하얀 김이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어둠 속으로 흔들린다. 한복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아낙네들이 부엌과 광을 오가며 음식준비에 부산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척들을 기다리는 안방에선 말없는 촌로(村老)가 아랫목을 차지하고 서열에 따라 윗목에 줄지어 앉은 형제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윽고 세배가 이어진다. 장손 내외를 시작으로 아직 장가가지 않은 막내를 거쳐 손자손녀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환갑을 앞둔 아들에게 꾸깃꾸깃 구겨진 지폐를 건네는 노부부. 철부지 손자손녀들은 기대했던 것보다 세뱃돈이 적다고 돌아서자마자 구시렁거린다.
아낙네들이 마루에 올려놓은 아침상을 형제들이 받아 방안으로 들인다.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떡국과 각종 진수성찬으로 상다리가 휘어진다.
어릴 적 설날 아침 풍경은 새벽잠에서 부스스 깬 잠결에서부터 기억된다. 그리고 평소보다 두둑해진 주머니 속의 세뱃돈을 계산하는 것으로 끝난다. 지금은 마당 있는 시골집이 아파트로, 장작을 집어넣고 떡국을 끓이던 가마솥이 가스레인지로, 아낙네들이 마루에 올려놓은 커다란 상이 식탁으로 바뀌었지만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이 모여 세배와 함께 떡국을 먹는 풍습은 끊어지질 않고 있다. 더러는 스키장으로 몰려가고 더러는 해외로 나가기도 하지만 장소와 형식을 떠나 내용만은 설날 풍경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회생활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도 설날은 시골에서의 풍경이 더 익숙하다. 아마도 명절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현대보다는 과거의 냄새가 더 진하기 때문이리라. 굳이 명절 음식이나 풍습이 아니더라도 옛 향기를 풍기면서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특산품 생산현장으로 설날 특집 취재를 위해 찾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이 만든 상주 삼백곶감, 300만원 명품곶감 상품도 생산
시골마을을 찾아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감나무집이 주는 어감은 풍요로움이다. 대부분의 감나무집이 부잣집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온 마을이 감나무로 뒤덮여 있다면 사정은 다르다.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경북 상주가 그렇다. 상주는 곶감특구로 지정될 만큼 감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다. 쌀, 누에고치, 곶감이 많이 생산돼 삼백의 고장으로 불리고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따라 상주로 들어서며 집집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곶감 풍경을 기대했다. 그러나 초겨울 풍경을 한겨울에 기대했던 것은 기대만 컸지 사전지식이 부족한 탓이었다.
예로부터 조율이시(棗栗梨?)라 해 곶감은 설날을 앞두고 음력 섣달(12월)이 최대 성수기다. 생산량의 60~70%가 이때 팔려나간다. 한로가 지나고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지나면 농가에서는 생감을 수확해 껍질을 벗겨 말린다. 11월초와 중순에 해당하는 시기다. 이때를 놓치면 추워서 감이 얼고, 시기를 앞당기면 기온이 높아 제맛이 들지 않는다. 섭씨 20도를 넘지 않은 18~19도 정도가 적당한 기온이라고 한다.
상주가 곶감으로 유명해진 것은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감나무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도 건조를 위한 자연환경이 잘 조성돼 있다. 상주시에 따르면 상주 곶감은 천혜적 자연조건 속에서 건조시켜 당도가 뛰어나며 씨가 적고 과질이 부드럽다. 최근 건조기술이 발전하면서 타 지역에서도 다량의 곶감이 생산되고 있지만 천혜의 자연조건과 수십년, 수백년 축적돼 이어져온 상주의 노하우를 따라오지는 못한다.
상주 최대 곶감생산업체로 꼽히는 삼백곶감의 김장희(41) 대표 집엔 고조?증조부 때부터 자라온 60여 그루의 감나무가 있다. 상주가 아닌 다른 고장에서였다면 감나무집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지만 이곳에선 어림도 없다.
60여 그루의 감나무에 매달릴 감은 몇 개나 될까. 삼백곶감이 쏟아내는 곶감의 양에 비하면 그 수는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감은 100개를 한 묶음으로 ‘접’이라는 단위가 표기된다. 100개가 곧 1접인 셈이다.
삼백곶감의 연간 생산량은 400만~500만개. 즉 4만~5만접이다. 한창 곶감철인 요즘 생산라인에는 무려 150여명이 매달려 있다. 매출액만도 2006년 52억원에서 지난해 60억원을 돌파했다. 곶감장사만으로 벌어들이는 금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규모다.
김 대표는 모든 과일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일조량이라면서 건조방법 역시 아무리 기술개발이 된다 하더라도 자연건조와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곶감은 자연이 만들어줍니다. 생감을 수확해 껍질을 깎고 말리는 시기를 놓치면 일 년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춘다 하더라도 자연이 만들어주는 곶감 맛에 비하겠습니까.”
삼백곶감이 규모와 생산량에서 상주 최대라고 하지만 자연건조를 고집하는 이유다. 특히 곶감에는 당 성분이 많아 인공건조 과정에서 열을 가하게 되면 조직이 파괴된다.
김 대표가 곶감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3년. 동부화재 보상팀에 근무하고 있던 그에게 직장 동료와 선후배들은 상주 오리지널곶감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자주했다. 몇 차례 상주시장에서 구입한 곶감을 전달해 주기 시작한 것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집에 있던 감나무 60여 그루에서 나온 감을 아버지가 감장사들에게 통째로 넘기시는데 그 수량이 나무궤짝 200여개에 달했습니다. 1톤 트럭 한 대 분량이었죠. 그런데 40~50만원밖에 못 받는 거예요. 그래서 감 시장이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죠.”
입사 1년6개월만에 사표를 던진 그는 곧장 상주로 내려와 곶감사업에 매달렸다. 곶감이라는 게 껍질을 벗겨 말리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에게 실패가 없을 리 만무하다. 곶감제조 과정에서의 최대 적은 안개다. 양분이 많다보니 껍질을 벗겨놓으면 온갖 잡균들이 달라 들어 곰팡이가 피게 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그때를 생각하며 겸연쩍은 듯 피식피식 웃음을 참지 못한다.
“다행히 망할 염려는 없었습니다. 원료 자체가 집에서 키운 감이었으니까요.”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귀동냥 눈동냥으로 배우기 시작해 3~4년만에 겨우 제조과정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유통이었다. 말랑말랑한 반건시를 포장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답은 냉장고에서 찾았다. 은연중 냉장고 문을 열다 계란판을 보고 계란 용기에 곶감을 담아 서울에 사는 동생에게 보내 제품상태를 확인했다. 이때부터 김 대표의 반건시 곶감사업은 본격적인 괘도에 들어서게 됐다.
현재 김 대표의 주력상품은 생감을 35일에서 최대 50일 정도 말린 젤리형태의 반건시다. 상품만도 60여종에 달한다. 통신판매를 고집하고 있지만 일부 백화점과 홈쇼핑 등에도 공급하고 있다. 통신판매를 통해 관리하고 있는 고객은 40만명. 이 가운데 30% 이상이 매년 재구매 고객이다. 가격은 배송비를 제외하면 최저 5600원에서부터 26만원까지 다양하다. 특히 지난해에는 60개 들이 한 상자에 300만원짜리 상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다섯 세트 한정이었다.
“상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감나무가 있습니다. 250~300년된 감나무들인데 이들 중 가장 일조량이 많은 곳에서 수확한 감으로 만든 곶감입니다. 다른 감나무와 분리재배하고 농약이 아닌 한방 약재 등으로 토양을 관리하는데 제가 10여 그루를 직접 키우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최근 4년 동안 이러한 명품 곶감 생산에 매달려 왔다. 녹차곶감이 그것이다. 실패를 반복하다 지난해 초 완성해 특허만도 4개를 보유하고 있다.
녹차곶감은 껍질을 벗긴 생감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녹차주정을 뿌려 살균 및 녹차성분을 침투시켜 녹차성분인 카테킨류를 함유하고 있다. 녹차를 마신 후 입 안에 약간 쌉싸름하면서 텁텁한 맛이 남게 되는데 이 맛이 바로 카테킨(Cathechine)이다. 카테킨은 광합성에 의해 형성되므로 어린잎보다는 늦게 딴 찻잎일수록 함량이 높다. 대표적인 효능은 지친 피부에 수렴작용과 진정작용을 함으로써 피부노화를 방지하는 것이다. 항산화제인 비타민E의 200배, 비타민C의 10배에 해당하는 강력한 항산화력을 갖고 있어서 자외선에 의한 피부노화 예방 및 억제에 효과를 발휘한다. 김 대표는 올해부터 70만개 정도의 녹차곶감 시판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나라 곶감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동의보감>에 곶감의 약효가 기록돼 있고, <진찬의궤>에서 궁중음식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그 역사가 짧지만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나긴 겨울밤 주정부리 거리로 호랑이도 가장 무서워한다는 곶감에 비할 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가장 서민적인 음식에 함유된 풍부한 단백질과 칼슘
부잣집은 물론 가난한 집 밥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 중 하나가 두부다. 콩을 주원료로 한 음식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가공식품이기도 하다.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결코 빠질 수 없는 메뉴가 순두부 백반이라는 점에서도 두부는 우리의 일상 먹거리 문화와 가장 친근한 음식이다.
이 때문에 두부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특별한 음식 솜씨가 없어도 맛에서 커다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기야 동네 슈퍼마켓을 가더라도 아직까지 그 자체로 먹어도 되는 음식상품 가운데 두부만이 거의 유일하게 제조공장이나 상표도 없이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두부라고 해서 다 똑같은 두부가 아니다. 제조방법이야 똑같다 하더라도 제조성분에서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전주에서 진안 방향으로 15분. 하늘로 솟은 거대한 붉은 입간판이 눈이 들어온다. 주변 마을에서는 물론 인근 산사(山寺) 스님을 비롯해 전주와 심지어 소문 듣고 두부를 먹기 위해 서울에서까지 일부러 찾아온다는 ‘원조화심생두부’ 식당이다. 초당두부가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화심두부가 유명하다는 말이 낯설다는 이들도 이 집 순두부백반 한 그릇에 그동안 먹었던 순두부찌개는 가짜였다는 말을 내뱉고 만다.
요리실력이 탁월해서일까. 두부집이라고는 하지만 색다른 메뉴가 있다. 생두부 그 자체다. 맛을 아는 식도락가라면 이 집 생두부를 먹어봐야 비로소 진가를 알 수 있다. 두부맛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그러나 한 입 물면 시중에서 파는 두부와는 달리 입안에서 콩 입자가 씹히는 느낌과 함께 고소한 맛이 전해진다. 그렇다고 거친 맛은 없다. 오히려 연두부를 연상할 만큼 부드럽게 입안에서 퍼진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코끝에서 스치듯 바다냄새를 느끼기도 한다. 두부 한 모에 포만감이 가득하다. 순두부백반을 함께 주문해 생두부부터 손을 댔다면 순두부백반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허물어져 가는 벽돌집으로 연상되는 어린 시절 손으로 두부를 만들던 두부집으로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틀을 머물며 두부제조과정을 지켜봤지만 특별히 비결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 예전처럼 손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아니 손으로 만들 수도 없다.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조화심생두부 집에서는 평일의 경우 하루 세 차례 두부를 만든다. 주말에는 다섯 차례까지 두부를 만들어야 한다. 맛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수량만큼 그때그때 만들고 있다. 팔다 남은 두부도 다음날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두부 맛이 처음처럼 변하지 않고 이어져온 이유 중 하나다.
두부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한나라의 류안(劉安)이 회남왕(淮南王)으로 있을 때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원래 류안은 도가에 심취돼 회남에서 수련을 했는데 그를 동반한 승려들이 식생활 개선을 위해 두부를 발명해 류안에게 대접했고, 그 맛을 본 류안의 대량제조 명령으로 상품화됐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기 성리학자 이색(李嗇)의 문집인 <목은집>의 ‘대사구두부내향(大舍求豆腐來餉)’이라는 시에서 두부에 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나물국 오래 먹어 맛을 못 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우어 주네. 이 없는 사람 먹기 좋고 늙은 몸 양생에 더없이 알맞다’는 구절이다.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기원이 중국임은 확실하고 고려 때 우리 문헌에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도 원나라로부터 고려말경 전해졌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콩, 두부와 콩나물의 과학>에 따르면 두부는 고단백 식품이면서도 열량과 포화지방 함유량이 낮고 콜레스테롤이 함유돼 있지 않다. 또 두부의 단백질은 풍부한 라이신이 함유돼 있으며 다른 곡류에 없는 필수아미노산이 골고루 들어있어 이들 곡류와 함께 먹으면 영양면에서 높은 효율을 보인다. 예를 들면 두부 100g과 쌀밥 1공기를 같이 먹게 되면 따로 먹었을 때보다 약 32%의 단백질을 간접적으로 더 많이 섭취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제조과정 중 콩에 함유돼 있는 조섬유질과 수용성 탄수화물을 제거시키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는 식품이다. 두부의 소화력은 95%인 반면 볶거나 삶은 콩은 68%에 불과하다.
특히 두부 속에는 칼슘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치아와 뼈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두부제조과정에서 칼슘제제를 응고제로 사용할 경우 우유보다 칼슘의 양이 약 23% 더 들어있게 된다. 때문에 두부 200g을 섭취할 경우 하루 칼슘 요구량의 약 38%를 충당할 수 있다. 이외에도 철분, 인, 칼륨, 필수비타민B와 콜린, 비타민E가 상당량 함유돼 있다.
원조화심생두부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순전히 입소문 때문이다. 지난해 겨우 서울 압구정동에 분점 하나를 냈을 뿐인데 입소문 하나로 이 시골마을을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두부촌으로 바꾸어 놓았다. 1980년대 이후에는 하나씩 둘씩 두부간판을 내건 식당들까지 생겨났다.
원조화심생두부의 기원은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 일흔넷 살의 권영선 대표가 두부를 좋아했던 남편을 위해 걸어서 2~3시간이 걸려 두부를 사와야 했던 수고를 덜기 위해 집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남편은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먼 곳에서 방아를 찧으러 오는 이들에게도 끼니때마다 두부반찬을 내놓았고, 맛을 본 이들이 판매를 권해 오늘날 두부전문식당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권 대표 스스로도 판매를 시작한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1960년에서 1962년일 것으로 어림짐작할 뿐이다.
원조화심생두부의 두부가 시중 두부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제조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첨가해야 하는 응고제다. 대부분 화공약품을 사용하는 데 반해 이 집 두부는 전통적인 간수를 사용한다. 간수는 바닷물 또는 짠물을 농축시켜 소금을 채취한 뒤 남는 비중 1.3 정도의 점조성 용액으로 소금물의 일종이다.
두부의 제조공정은 콩을 삶아 갈아 콩물(두유)을 만들고, 콩 입자가 엉겨 붙게 하기 위해 응고제를 섞어 이를 틀에 넣고 일정한 시간 동안 눌러준다.
“간수를 사용한 두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응고가 되면서 입자들이 결속하게 됩니다. 반면 물은 계속 빠져나옵니다. 자연히 부피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화공약품을 사용한 두부는 작아지지 않습니다. 부두 안에 있는 물을 화공약품이 잡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시중에서 판매하는 연두부는 사실상 물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간수를 사용하고 있는 탓에 예민한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고도 한다. 간수에서 나는 바다냄새다. 특히 오래된 두부일수록 냄새는 더 심하다. 때문에 하루 소비량을 한 번에 만들지 않고 번거롭더라도 두세 차례에 걸쳐 만든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크기도 다르다. 원조화심생두부의 두부는 신고용량이 480g으로, 시중에서 2000원에 판매되고 있는 두부보다 두 배 이상 크다. 그러나 메뉴에 올라오는 실제 두부는 700g에 달한다. 두부 한 모만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맷돌이 아니라 기계로 만들고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게 어머니의 고집입니다. 30~40여 년 전 손님이 아직까지 찾아오는 이유입니다.”
원조화심생두부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둘째딸 오선희 사장의 말이다.
식기류는 도자기와 스텐리스만 적합, 나머지 재료는 중금속 함유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오면 광이나 다락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제기들이 다시 세상 구경을 한다. 마당 한 구석에 널부러진 기왓장을 깨고, 물 묻은 지푸라기로 제기들을 닦는 일은 남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비단 이때만이 아니다.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놋그릇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 색이 탁해지면 어김없이 기왓장을 깨고 닦아야 한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 놋그릇에 담겨진 밥은 하루 종일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밖에서 놀다 돌아와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아랫목으로 기어들면 밥 식는다는 어머니 호통이 바로 뒤따라 들어온다.
흔히 놋그릇으로 불리는 유기그릇은 고급 식기류를 대표하고 있다. 칠첩반상 등 제품화에도 성공해 명품이라며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품위는 물론 권위까지 상징하는 식기류인 양 인식돼 오고 있는 것이다.
유광열(66) 해강도자미술관 관장 겸 해강고려청자연구소 소장은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한다. 아니 거의 경악해 하는 수준이다. 말로는 웰빙을 떠들면서 실제 생활은 웰빙과 전혀 동떨어진 어리석음이 가엽기만 할 뿐이다.
“저도 1950년대까지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했습니다. 아침에 밥을 담아 점심 때 먹을라치면 밥에 파란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놋그릇의 중금속이 우러나온 것인데 그땐 그게 뭔지 몰랐죠.”
놋그릇 뿐 아니라 플라스틱, 알루미늄도 중금속을 방출하기 때문에 식기 재료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식기류로는 도자기가 가장 적합하며 그 다음이 스텐리스라는 것이다.
유 관장은 도자기는 인간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위생적인 그릇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몇 십 년을 사용하더라도 유해한 물질을 방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자기는 우리 생활에서 자꾸 멀어져만 가고 있다.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관상용, 보관용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는 도자기에 대해 겁이 많다고나 할까요. 직접 구입했든, 선물을 받았든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거든요. 그리고 평생 만지지도 않아 먼지만 수북이 쌓입니다. 관상용이라 하더라도 꽃병에는 꽃을 꽂아야 합니다.”
도자기의 생활화를 강조하고 있는 유 관장은 사실 대한민국 도자기 공예 명장이자 이천시 도자기 명장 제1호다. 그의 작품은 명품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일반인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유 관장의 부친은 해강 유근형으로 100년의 삶에서 84년을 고려청자 재현에 바친 도공이다. 고려시대 이후 500여년 동안 단절되었던 청자의 비법이 부친의 집념과 실험정신을 통해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빛을 보았다. 청자의 이해와 정보가 전혀 없던 시절, 재현을 위해 고집스러운 노력을 기울인 끝에 완전한 옛 청자를 복원한 것이다.
“왕조가 바뀌면서 도자기의 형식이나 역사 등이 완전하게 바뀐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삼국시대의 토기,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과 백자로 분명하게 구분돼 왔지 않습니까.”
현재의 이천 도예마을도 사실상 부친의 피와 땀의 결과물이다. 이천의 도공치고 부친을 거쳐 가지 않은 이들이 없을 정도다. 유 관장은 이러한 부친의 뜻을 이어받은 2대 해강으로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켜 재해석하는 시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저는 선친께서 재현한 것을 토대로 다시 고려시대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기법들을 찾아내 제 작품에는 새로운 형태나 디자인으로 응용하며 2대 해강의 자존심을 이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 그는 일상적인 도자기 사용을 부르짖는 생활도자기 철학의 보유자다. 실생활에서 도자기를 사용해야 수요도 늘고 소비자 안목도 늘어 도자기 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소비자가 외면하면 결국 기술개발은커녕 전수와 재현마저 어렵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도자기 사용을 기피한 것은 비단 오늘날의 일만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도 승정원일기에 백성들은 만인(萬人)이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공급이 가능한 사기그릇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그릇을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기그릇, 즉 도자기그릇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사기그릇은 겨울에 차갑고, 깨지기 쉽지만 놋그릇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백성들은 단순히 사용의 편리함만으로 놋그릇을 사용했을 뿐 중금속의 위험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놋그릇에서 중금속이 우러나온다는 것도 몰랐다. 이에 비하면 현대인들이 유기그릇을 선호하는 것은 스스로 부르짓는 웰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무지(無知)의 결과다. 또 전기밥솥 등으로 사용상에 있어서의 불편함도 이젠 사라졌지 않은가.
유 관장은 도자기를 가장 쉽게 접하는 길은 우선 집안에서 사용하는 모든 식기류를 중금속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도자기그릇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날 로마가 왜 망한지 아세요? 로마에서는 납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비단 그릇만이 아닙니다. 제가 봄베이에 가서 상하수도 시설을 견학한 적이 있는데 두꺼운 납으로 만든 관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납성분이 함유된 물을 먹었던 거죠. 중금속에 중독된 로마인들은 성질이 포악하고 거칠어 결국 망한 겁니다.”
물론 도자기가 식기류만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유 관장의 작품에는 일상생활에서 쉽사리 접할 수 있는 각종 장신구도 있다. 옛 조상들이 금관에서부터 목걸이, 귀걸이, 요대 등의 장신구를 도자기로 만들어 사용했다면 유 관장은 넥타이 핀, 커프스 버튼, 단추, 키홀더 등으로 응용한 장신구를 제작하고 있다.
1979년 그가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상공회의소장 상을 받고, 8년 동안 연구를 지속해 1988년 전국공예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이 같은 도자기 액세서리를 제품화했던 결과였다. 도자기 액세서리 개발에 무려 10년을 쏟아부은 것이다.
“일상생활에 쓸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의지였습니다. 물론 관상용 도자기도 필요하지만 식기류나 생활도자기로 사용할 수 있는 다기(茶器) 등을 포함해 장신구까지 다양한 도자기 제품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야 합니다.”
서울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이천에 이르러 줄지어 늘어선 간판 행렬에 시선이 꽂힌다. 이천쌀밥집과 각종 도예 관련 간판이다. 대형 옹기에서부터 각종 밥그릇과 접시, 심지어 머그컵 등을 잔뜩 늘어놓은 상가의 모습도 다른 곳에선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생활도자기 제품을 개발해 상품화하는 것이 유 관장과 같은 도공들의 몫이라면 이들 제품을 구입하고 사용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몫이 아닐까.
한정곤 기자 allen@chosun.com
<이코노미플러스> 200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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