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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 왕국 스페인

세칸 2008. 2. 1. 13:49
'복권' 왕국 스페인
 

“인생은 꿈이다.” 스페인 황금세기의 극작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말이다.

21 세기 꿈이 사라진 시대에 스페인은 그들이 대제국을 건설했던 황금세기(16~17세기)의 꿈을 또 다른 형태로 제조하고 판매하고 있다.  꿈이 설렘이고 기다림이라면 12월 22일 ‘크리스마스 복권’, 즉 엘 고르도 복권은 적어도 스페인 국민 3000만명을 꿈꾸게 한다. 비록 그 꿈이 한겨울 밤의 꿈일지라도.

 

지난해 12월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의 한 복권판매소 앞. 시민들이 줄을 서서 복권을 구입하고 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풍스런 구시가지, 그란 비아와 마요르 광장을 지나다 보면 곳곳에서 길게 늘어선 줄을 볼 수 있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30분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를 하고 장갑까지 낀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청년과 학생, 유모차를 끈 부부까지 다양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그들이 스스로 터득한 복권 구입 노하우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 좋아 보이는 넉넉한 웃음의 50대 아줌마는 스페인 복권 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필자에게 복권을 살 때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해주었다.

그녀에 의하면 먼저 어디서 구입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드리드에서는 시내 중심지인 솔 광장과 그란비아의 복권판매소가 대박을 가장 많이 터뜨렸으니 하나씩 사두어야 하고 또 각 도시마다 이름난 행운의 복권판매소가 있으니 친구가 있으면 대신 구입해 달라고 부탁하고 여행할 일이 있으면 각 지방별로 한 곳씩 가서 구입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선호하는 번호를 정해서 끈기 있게 매년 같은 번호를 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자신은 늘 홀수 번호로 끝나는 것을 산다고 일러주었다. 복권에 대한 자신만의 비법이 심상치 않아 넌지시 크리스마스 복권 구입에 들이는 돈을 물어보니 200유로 정도(약 27만원)란다. 내심 놀랄 정도로 큰 돈이었으나 성인 남녀가 평균 1인당 3장 이상 구입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남미에서 이민 왔다는 30대 여인은 “청소부로 일하는 내 신세를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복권”이라면서 에콰도르에서 이민 온 사람이 1등에 당첨되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 수 있다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에 참견하던 몇몇이 “난 이왕이면 같은 숫자가 겹친 것이 좋은 걸” “난 0으로 시작하는 복권은 아무래도 재수가 없어” 라고 거들며 저마다의 복권 구입 노하우를 이야기했다. 복권을 구입하고 또 복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복권이 스페인에서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스페인의 유력 일간지 엘 파이스의 카를로스 보에로 기자는 지난해 12월 24일자 기사에서 엘 고르도 복권이 “가난한 자, 특히 이민자를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만든다”며 “복권이 크리스마스 시즌의 풍경을 새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확률적으로는 당첨을 꿈꾸기 어려운 ‘엘 고르도’. 그러나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라”고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가 말하지 않았던가. 복권 당첨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스페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복권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준비한다. 이들은 ‘페냐’라고 하는 복권 계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기금을 조성한다. 그리고는 공동구매 형태로 좋아하는 숫자의 복권을 구입해 경우의 수를 높인 후, 당첨될 때 그 이익을 공동배분하는 형태로 운영한다.

지난해 12월 22일에 발표된 크리스마스 복권의 1등(엘 고르도)은 스페인 내 10개 자치주 18개 시에 골고루 배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스페인 북부 지역인 아스투리아스 주의 소도시 ‘나바’와 ‘모에도’ 주민의 대박 소식이 단연 화제였다. 조그마한 소도시에 돈벼락이 떨어지게 된 것은 다름아닌 ‘페냐’ 덕분이다. 

가정주부들 모임인 ‘야메의 꽃’이라는 계에서 단체로 구입한 복권이 당첨되어 900 명이 2억7000만유로를 받게 된 것이다. 온 마을이 돈폭탄을 맞는 대박의 경사를 누리게 되었다. 스페인식 샴페인 카바를 터뜨리며 축제를 벌이는 시골 마을의 풍경은 엘 고르도 복권과 함께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반면 마드리드의 한 복권판매소에서는 복권 판매 마지막 날까지 06381(1등 당첨 번호)을 찾는 이가 없어서 국가 복권관리소에 당첨금을 반납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보도되었다. 전통적으로 복권의 첫 숫자가 0으로 시작되면 재수가 없다는 터부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았고 결국 1등이 된 복권은 국고(國庫)에 귀속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복권이 성탄절을 위한 축제라면, 엘 니뇨 복권은 ‘동방박사 오신 날’의 선물이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했을 때, 별을 보고 동쪽에서 찾아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황금·유약·몰약(沒藥)의 세 가지 예물을 바쳤다고 하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오는 ‘동방박사의 날’인 1월 6일 ‘엘 니뇨’ 복권을 추첨한다.

가톨릭 교도가 전체의 90%를 차지하는 스페인의 전통적 축제일인 ‘동방박사 오신 날’은 거리가 온통 달콤한 사탕으로 넘쳐난다. 가장행렬과 거리 축제가 진행되며 거리에 나온 어린아이들에게 온갖 종류의 사탕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사탕을 어른에게는 복권 당첨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넘치는 날이다. 엘 니뇨 복권은 한 시리즈가 10장의 복권으로 구성되고, 50 시리즈에 넘버는 00000부터 99999까지 총 5000만장이 발행된다. 제일 적은 당첨금을 받는 맨 마지막 숫자를 맞힌 당첨자까지 합했을 때 당첨 확률은 약 35%. 가장 당첨 확률이 높은 복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복권이 존재한다. onCE라는 장애인 복지를 위한 복권과 우리나라의 로또와 비슷한 프리마티바 복권, 축구 복권으로 알려진 키니엘라 등 그야말로 복권의 종류와 당첨금에 있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복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선 복권을 통해 일확 천금을 노리는 허황된 꿈을 국가가 유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복권은 하나의 문화현상 자체다. 국민의 70%가 주기적으로 복권을 즐기는 문화 뒤엔 국가가 복권 수익금을 사회사업에 철저히 재투자하는 원칙과 시스템이 있다.

실제로 스페인 사람들은 복권을 사서 잘되면 내가 돈을 벌고, 그렇지 않으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공익성에 대해 생각한다고 한다. 오늘날 스페인 사회에서 복권사업이 성공적으로 이어지게 된 또 하나의 힘이다.


스페인의 크리스마스 복권 ‘엘 고르도’
196년 역사… 세계 최고·최대 단일 복권

서구 사회에서 복권의 유래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스페인의 크리스마스 복권은 1812년에 시작해 전해오다 1892년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착됐다. 복권 추첨은 금속으로 된 새장 모양의 둥근 통에 회양목으로 만든 구슬을 넣고 돌려, 아랫부분의 홈을 통해 나오는 나무 구슬에 쓰인 숫자를 확인하는 전통적 형태로 진행된다.

스페인어로 ‘뚱뚱이’ 혹은 ‘대박’ 이라는 뜻의 엘 고르도는 매년 7월 첫째 주에 판매를 시작해 12월 21일까지 약 5개월간 주인을 찾게 된다. 스페인 전역의 복권판매소와 인터넷을 통해 동시 판매되는데 00000번부터 84999번까지 85000개의 번호가 행운의 숫자로 선택되는 날을 기다린다. 한 번호당 185개의 시리즈가 발행되고 한 시리즈는 10개의 낱장으로 구성된다. 총 발행 매수는 1억5725만장. 스페인 전체 국민의 3배가 넘는 수로 그야말로 단일 복권으로는 세계 최대, 최고의 복권이다.

데시모로 불리는 복권 한 장의 가격은 20유로(약 2만7000원)로, 한 시리즈 10장은 200유로. 1인당 하나의 복권을 구입한다고 가정할 때 1등 당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1850명이다. 배당금은 1등이 30만유로(약 4억원), 2등은 각 10만유로(약 1억3500만원), 3등은 각 5만유로(약 6750만원)이다. 맨 마지막 숫자를 맞혀 제일 적은 당첨금을 받는 당첨자까지 합했을 때 당첨 확률은 약 15 %. 그러나 복권 한 장을 산 사람이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만5000분의 1이다. 

황수현 |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 연구원, 경희대 석사(서문학),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 박사과정 수료(라틴아메리카 문학), 조선일보 및 연합뉴스 통신원 역임, 경북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