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머리빗기와 새날 다짐

세칸 2008. 1. 1. 13:12

머리빗기와 새날 다짐 

 

 

 

 

한양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김경 선생의 《이야기가 있는 종이박물관》이란 예쁜 책을 읽었다. 종이로 만든 각종 공예품의 내력을 설명하던 중 빗접 이야기가 나왔다. 노인은 벽에 걸린 빗접 상자를 꺼낸다. 뚜껑을 열자 얼레빗과 참빗, 동곳과 빗치개, 빗솔 등이 놓인 함이 나온다. 뚜껑의 종이를 다 펼치니 아주 넓다. “꼼꼼히 머리를 빗고 상투를 틀고 나면 종이 위에 빠진 머리가 수북이 쌓이지. 빗에도 머리카락이 많이 붙어 있어. 그걸 얇은 창호지에 잘 싸서 빗접에 넣어 두어. 상투를 튼 뒤에는 수염도 손질을 하는데 역시 그것도 빠진단 말이야. 그것 역시 잘 모아서 빗접에 넣어두지.”
 
나는 아하 하며 감탄하다가 옛글 한 자락을 떠올린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연암집을 읽고(讀燕巖集)〉란 글이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상투를 짠다. 이마에 건(巾)을 앉히고는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보아 그 기울거나 잘못된 것을 단정히 하는 것은 누구나 그렇게 한다. 내가 어른이 되어 건을 쓸 때, 눈썹 위로 손가락 두 개를 얹어 이것으로 가늠하였다. 그래서 거울에 비춰 볼 필요가 없었다. 혹 열흘이나 한 달을 거울을 보지 않았으므로, 젊었을 때 내 얼굴은 이미 잊고 말았다.

이 글을 읽다가 옛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볼 기회가 뜻밖에 적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 빗고 상투 짜는 것도 익숙해지면 거울 없이도 잘 할 수가 있다. 거울이래야 구리 거울이니 비춰본 들 요즘 거울 보는 것만이야 했으랴. 그러니 지난 날의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종내 떠오르지 않는 것이 괴이하달 것이 없겠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머리 빗기로 일과를 시작한다.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글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참빗으로 머리를 3백번씩 빗는다고 적었다. 그 짱짱한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요즘 말로 두피 맛사지도 되고, 혈액 순환에도 좋아 절로 양생의 한 방법이 되었던 셈이다. 머리를 빗으면 매일 수북하게 머리털이 떨어져 쌓인다. 이것은 또 어찌 처리할까? 

겨울의 위세는 아직 남았고, 사람은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 덕담은 너무 진부하고, 중의 소리는 가증스럽다. 남정네는 새 옷을 입고, 문간에 붙인 그림은 신령스럽지가 않으며, 쇠고기가 오간다. 이 일곱 가지 유감스러운 것 외에 몹시 쾌활한 한 가지 일이 있다. 동자를 시켜 빗접 사이를 검사하게 하면 한 해 동안 빗질하고 남은 묵은 머리카락이 사람마다 한 말 가량은 된다. 어지럽게 엉긴 터럭이 나로 하여금 번뇌스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마당 가운데 쌓아놓고 불을 놓아 태우자, 이리저리 내달리며 불기운이 솟아서 잠깐 만에 싸늘한 찬 재가 되고 만다. 번뇌스럽던 생각이 오래된 못처럼 고요해진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한 말이다. 새해가 되어 한 살을 더 먹는 것도 심드렁하고, 가난한 살림에 추위 걱정은 눅어지지 않는다. 주고받는 인사는 언제나 그렇고 그렇다. 정초부터 문간에서 들려오는 중의 염불 소리가 오늘 따라 유난히 가증스럽다. 남정네들은 설빔을 곱게 차려 입고 자태를 뽐낸다. 소나무에 까치가 앉아 있고, 그 아래 담배 피는 호랑이 그림을 세화(歲畵)랍시고 대문에 붙여놓지만, 무슨 효험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사람들은 고기 근이나 들고서 어른을 찾아 뵙고 세배를 올린다. 나는 이런 새해가 참 싫다. 이룬 것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는 것이 싫다. 해가 바뀌어도 조금도 나아질 것 없는 생활이 혐오스럽다.
 
그렇다고 새해맞이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경대의 빗접을 연다. 지난 1년간 매번 머리를 빗을 때마다 떨어진 머리털을 모아둔 것이 식구 한 사람당 한 말씩은 좋이 될 성싶다. 묵은 터럭은 왜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을까?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자온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치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효경(孝經)》에 딱 적혀 있다. 비록 빠진 터럭 하나라도 함부로 버릴 수 없어, 매번 모아둔 것이 이리 쌓였다. 얼키설키 큰 뭉텅이를 이룬 터럭들을 보면 지난 날을 돌아보는 내 심사처럼 심란하다. 섣달 그믐날 저녁 그 터럭들을 마당으로 가져 나가 불에 태워 없앤다. 머리털은 순식간에 단백질 타는 냄새를 남기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 지난 한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했던 고민들, 내 근심의 찌든 자취들도 저렇듯 순식간에 가뭇없이 사라지거라. 그렇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또 새해를 맞는다. 설빔 차려 입고 쇠고기 들고 가까운 어른을 찾아뵐 형편도 못 되지만, 빗질로 헝클어진 마음자리를 가다듬고, 터럭을 태워 근심을 지우듯 그렇게 또 한 해를 건너갈 다짐을 두는 것이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해가 밝았다. 군자는 새해를 맞이하면 반드시 그 마음과 행동을 한차례 다잡는다.”고 썼다. 투덜거리지만 말고, 묵은 터럭 태우듯 툴툴 털고, 또 기운을 내어 새날의 새 다짐을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