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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론(雜論), 낚시 미학에 대하여...

세칸 2007. 12. 31. 14:11

잡론(雜論), 낚시 미학에 대하여...

 

 

낚시꾼 시인 김일석

 

 

1. 자연과 인간의, 합일의 미학

비슷한 성격의 일을 반복하개 되면 그 일의 성질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배이게 되는 현상이 있다. 성경에선 '말씀이 내 몸과 같이 되어...", 이 문구와 같은 경우를 종교적으론 육화(肉化)라고 하고, 발달심리학에선 체화(體化=Incarnation)라고 한다. 즉 아이들의 반복된 행동을 통해 그 정보가 누적되어, 같은 상황에선 같은 행동을 습관처럼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함께 있으면 눈곱만큼 사소한 것에도 잘 했니, 못 했니 끝없이 따지려 들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과 눈 속에 있는 편협함은 인식하질 못해 수시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도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자(他者)와의 진정한 합일의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경우이다.


드넓은 수평선과 넘실대는 파도, 깎아지른 직벽군과 거친 갯바위, 비릿한 내음의 바닷바람, 보이지 않는 물 속 생명과 나누는 긴장감, 맑은 하늘을 평화롭게 나는 갈매기... 거칠면서도 한없이 풍요로운 바다의 이런 요소들과 교감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은 점점 바다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닮아간다. 단순히 고기를 잡는 행위인 낚시를 통해 놀랍게도 대자연을 닮아가는, 자연과의 합일에 성공한 진정한 낚시꾼이 되는 것, 바다를 닮는 것, 내 몸과 마음 속에 바다를 품고 사는 것, 그것을 난 합일의 미학이라 부른다.



2. 교류의 미학

광활한 바다, 그 어드메쯤 갯바위에서 나누는 사나이들의 우정은 얼마나 각별한가? 낚시터로 가고 올 때, 배에 오르고 내릴 때, 부족한 재료지만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을 때, 좁은 텐트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물때를 기다리는 짧은 휴식을 가질 때, 드넓은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함께 대를 드리운 채 느끼게 되는 기쁨, 그것들은 아마도 꾼만이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어찌 보면 직업, 사상, 나이, 남녀, 노소, 빈부의 차이가 없는 진정한 평등세상이 갯바위가 아닐까? "어디서 오셨나요?", "좀 잡으셨습니까?", "여기 회 한 점 하십시오"하며 나누는 대화는 온갖 세속적 차이를 넘어 강한 동질감을 경험케 하는, 완전한 무계급적 공간이 바로 바다가 아닐까?


판검사도, 기업체 사장도, 김선생, 이선생도 바다에선 낚시꾼일 뿐이며 난전에서 과일을 파는 사람도, 이웃집 형님도, 선배도, 후배도 낚시꾼일 뿐이다. 갑자기 내린 주의보, 거대한 너울파도, 퍼붓는 비바람, 혹은 돌풍, 그 일측촉발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위태로운 바다를 빠져나오며 나누게 되는 호흡이란 가히 꾼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공동체 세상이다. 바다엔 바다 특유의 사회적 관계가 있고, 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평등주의가 있다. 그건 낚시의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미학이다.



3. 삶과 죽음의 미학

생뚱맞은 주제 같지만 낚시에는 분명 삶과 죽음의 미학이 있다. 낚시란 게 고기를 잡아 죽이는, 극히 단순한 수렵행위지만 고길 잡아 죽이는 데에도 그 어떤 격이며 경지가 있다. 일급 포수는 돌아선 동물에겐 총을 쏘지 않는 법이며, 진정한 전사는 적의 등에 칼을 꽂지 않는다. 낚시를 통해, 절제와 품격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정신세계로 가는 데에는 어떤 수련을 필요로 한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행하는 자선과 봉사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듯, 스스로 의미를 찾아 행하는 극히 절제된 낚시야말로 수련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크든 작든 바늘을 물고 올라온 첫고기를 향해 "나에게 첫 손맛을 안겨준 게 고마워 네가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주지", "내가 노리던 대상어가 아니어서 널 살려주겠어", 뭐 이런,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만한 낚시를 추구하는 게 아름다운 낚시를 위해 노력하는 꾼의 모습이리라.

 

낚시꾼 시인 김일석의 명상집1의 표지, 도서출판 인쇄골


몇 마리의 고기를 잡아와 맛있게 요리해 먹는 거야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저 많이 잡아 거들먹거리거나, 뭐든지 잡히는 족족 챙겨와 피범벅된 포획물들을 고작 식탁의 먹거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낚시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수확 중심으로 생각하는 어민적 사고일 수 있다. 작살을 쏘아대며 포획한 고기들을 꿰미 가득 들쳐메고 나오는 스쿠버의 모습에서 자연에 반하는 일탈을 느끼듯 낚시도 마찬가지일 터, 우리가 어떤 방법을 택하여 고기를 잡든,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죽이는 일에는 그것이 한갖 미물일지라도 자연과 생명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수렵에도 정도(正道)가 있는 법이고, 꾼이라면 근해자원에 대한 고민과 자연의 씨앗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것은 또 삶과 죽음의 미학이라는 내재적이고 심미적 가치를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오래 전 일이다. 소리도 거북여란 곳에서 55cm 쯤 되는, 그 바닥에선 상당히 큰 고기인 감생이를 잡아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병환으로 누워계시던 어머님께 고기를 보여드렸더니 "아이구 얘야, 무섭다. 앞으로 이런 거 절대 잡아오지 마라" "그냥 잘 살게 내버려두지 뭐하러 이런 고기를 잡아왔느냐?"며 정색을 하시는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머님의 생명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 뒤론 큰 고기를 별로 잡지도 못했지만 간혹 잡는다 해도 특별히 고기를 써야할 경우가 아니고선 바다로 되돌려보내는 걸 원칙으로 해왔다. 소삼부도 보찰여의 대물참돔은 기원을 하시는 형님의 개업기념잔치에 썼고, 다무래미의 육짜 감생이는 암투병 중이던, 낚싯대 생산회사를 하던 낚시벗에게 보내 푹 고아먹고 얼른 일어나기를 소망하였다. 고기를 잡아 죽이는 행위를 통해 체득케 되는 의미, 그것은 가끔 꾼을 잠깐의 쾌락에서 삶의 수련과정으로 이끌기도 한다.  



4. 거장(巨匠)의 풍모 미학

어떤 분야든 좌충우돌하는 입문과정을 거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매니아의 세계가 찾아온다. 철저히 개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실험을 거듭하는 시기여서 집중의 강도가 더 없이 크고 추론의 폭이 넓은 시기지만 또한 학습과 논쟁의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스스로 어찌 할 수 없었던 그 광적인 몰입과 흥분도 어느 순간, 마치 몸의 때가 벗겨지듯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가 온다. 이른 바 유유자적의 시대, 만사 하는둥 마는둥 동서남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도 어느 것 하나에도 집착하지 않고 손을 놓아버린 상태이다. 연구는 하되 발표는 않는, 그런 시기를 어느 정도 보내고 나면 다시 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들추고 챙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전문가의 세계를 맞게 된다.

 

겉으론 남루하지만 속으론 번득이는 기를 지니게 되는 전문가의 세계란 비판보다 분석이 앞서고 투쟁보다 관용이 앞서는 시기이다. 매사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예지력이 빛나는 시기를 보내며 다시금 한눈 팔지 않고 정진하다보면 또 다른 세상, 즉 거장의 세계로 가는 새로운 창이 열린다. 거장이라 함은 전문가의 제왕을 일컫는 말일진대, 이른바 마에스트로라 할만한 영역이 낚시라고 없으란 법 없다.


거장은 서두르지 않으며, 오랫동안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전문분야 속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특정한 요소를 떼어내 편식하지 않듯, 국한된 낚시쟝르에 집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대한 진단이 빠르고 특유의 희생과 친절이 몸에 배어 있으며, 더우기 말과 글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려들지도 않는다. 번득이는 눈빛과 언바란스를 이루는 남루한 옷차림, 명예를 가장 소중히 여기며 지독히 말을 아끼는 침묵의 제왕, 그가 바로 풍모미학을 느끼게 하는 거장인 것이다. 거장의 아름다움이란 온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평화와 몸에 밴 절제된 품성에 있다. 관계에 있어서도 진정한 존경의 의미를 실천할 줄 아는 거장의 풍모란 가히 낚시미학의 정점에 있는 아름다운 것이다.

5. 신념의 미학

누가 뭐래도 해야할 일을 미루지 않고 하고마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신념이란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옳다고 믿으며 행하는, 스스로에겐 매우 엄격하며 끊임없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엄격함이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대의(大義)를 위해 희생하는 엄격함이다. 바다를 사랑하는 꾼의 신념이란 일생을 두고 대자연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할 때 빛을 발한다. 대규모로 뿌려지는 양식장 사료, 걸러지지 않은 생활하수, 어업과 낚시로 투기되는 맹독성 금속인 납, 오염물질의 해양투기 등. 바다를 망치는 이 모든 것들과 투쟁하고자 하는 신념은 바다와 더불어 일생을 살아갈 꾼에겐 하나의 철학이고 사상이 되어야 한다. 청정해역이었던 아름다운 남해바다가 이젠 유럽, 아프리카 연안, 미국 동부 연안, 벵골만, 동남아시아 연안과 함께 심각한 해양오염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은 꾼으로 하여금 더욱 굳건한 신념과 확고한 해양사상을 요구하고 있다.


10년 전, 작도에 좌초하여 전 남해안에 엄청난 기름을 쏟아부었던 씨프린스호 사건 이후,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크고 작은 섬, 갯바위 하나하나를 걸레로 닦는 걸 보며 난 바다를 품고 사는 사람들의 끈질긴 신념을 배웠다. 어찌 해볼 수 없을만큼의 많은 양의 기름과, 세계 해난사고사상 가장 많은 유화제가 뿌려졌던 남해. 조류를 따라 오가는 거대한 기름띠며 전 해역을 뒤덮었던 유화제를 두고 일일이 갯바위 구석구석을 걸레로 닦는 모습은 차라리 처절한 절규였다. 기름분자를 머금고 바닥에 가라앉은 유화제는 남해바다 전역에서 고착성 어종인 볼락을 절멸케 했고, 그 사고의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사고 이후, 생태계 복원에 족히 50년이 걸릴 거라 하니, 해양공동체를 향한 꾼의 신념은 현재진행형의 치열한 것이어야 한다.



6. 어류 미학

생김새가 다르고, 입질형태와 손맛, 고기의 맛도 다르며 낚시방법 또한 모두 다른 것도 낚시의 맛이다. 한 마리의 대물과 벌이는 가당찮은 희열도 맛이겠지만, 각각의 대상어가 주는 특유의 맛을 깊이있게 음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술훈련을 하는 군인,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 거래를 이루려는 영업부 직원, 맛난 음식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요리사의 일상처럼 보통 사람들의 나날의 삶도 의미 있지만,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잘한 행복을 추구하는 서민적 휴식도 의미가 있는 법이고, 크고 작은 물고기를 상대하며 벌이는 집중과 긴장감 역시 낚시를 의미있게 한다.


밤낚시의 정취, 극히 예민해진 조건에 맞추어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는 신경전, 경쾌하게 케미라이트를 끌고 들어가는 입질, 미세한 숙련도의 차이에도 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볼락낚시의 묘미. 그리고 까탈스런 입질을 극복하는 섬세한 채비놀림과 집중력, 멀리 흘려보내주는 호쾌한 맛, 대형어의 품위있는 모습, 무리지어 회유하는 온갖 잡어를 꼬득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스스로 발견하는 일... 이 모든 다양한 세계가 낚시의 맛이고 멋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에는 잡어같이 성가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피곤한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가끔은 아이들과 놀아주어야 하고, 남편이기 때문에 아내와 끊임없이 창조적인 데이트를 계속해야 하고, 거만하고 욕심많은 사람을 만나 때론 듣기 싫은 얘기도 억지로 들어주어야 하고, 가끔은 죽고싶을만큼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반복되는 노동... 이것들은 분명 우리네 삶의 고등어며 메가리고, 학공치며 노래미다. 허나 매일같이 노력하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듯, 어류 미학이란 것도 그 무슨 잡어낚시라 할지라도 철저히 노력하며 그 긴장감을 충분히 즐길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김일석의 바다가 있는 풍경 http://www.kisfi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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