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마음에 박힌 못 뽑으셨습니까?

세칸 2008. 1. 2. 09:47
詩로 읽는 세상사
 
세밑, 마음에 박힌 못 뽑으셨습니까?
 

일러스트 이경국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 김종철 ‘고백성사’

사람들은 못을 아무 데나 쉽게 박는다. 박히는 벽의 아픔은 생각지 않는다. 지난 한 해도 가족, 친구, 이웃들 가슴에 얼마나 많은 못을 박고 살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이사를 와서 보니/ 내가 사용할 방에는/ 스무여 개의 못들이 필요 이상으로 박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어디에라도 못을 박는 일/ 내가 너에게 못을 박듯이/ 너도 나에게 못을 박는 일/ 벽마다 가득 박혀 있는 못들을 뽑아낸다/ 창 밖으로 벽돌 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못자국/ 그 깊이에 잠시 잠긴다/ 뽑음과 박음, 못을 뽑는 사람과/ 못을 박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못을 뽑고 벽에 기대어 쉬는데/ 벽 뒤편에서 누가 못질을 한다.’
- 주창윤 ‘못을 뽑으며’
 
또 한 해가 기울어간다. 새해 새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또 다른 새해가 코앞에 왔다. 참 잘못 살았구나 하는 뉘우침부터 밀려든다. 사는 일의 고달픔과 덧없음이, 살아온 날의 탈진과 후회가 찌든 때처럼 쌓인다. 부끄러운 일들은 저마다의 가슴에도 자책(自責)의 못으로 되날아와 박힌다.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 김종철 ‘고백성사’
 
아내에게도 차마 말 못하고 가슴에 묻어둔 일, 너무 부끄러워 차마 뽑지 못한 못 저마다 하나 둘쯤 품고 있을 세밑이다. 그 못 시원하게 뽑아버리고 해넘이를 하고 싶지만 고해하고 용서 받는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은 남에 대한 죄책 같은 것으로 번진다. 나만 생각하고 앞만 보고 살아 오면서 더불어 사는 것에 무심하지는 않았는지.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지겠고// 무겁고 깨질 것 같은 그 독을 들고 아둥바둥 세상을 살았으니/ 산 죄 크다// 내 독 깨뜨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물 엎질러 착한 사람들 발등 적신 죄/ 더 크다.’
- 김용택 ‘죄’
 
시인은 제 앞 가리려 살다 보니 베풀기는커녕 이웃에 폐 끼치기 십상이었다고 뉘우친다. 네 탓만 하는 세상에서 드물게 착한 고백이다. 세밑이면 그렇게 남을 돌아보고 이웃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세밑은 나눔과 베풂의 시절이기도 하다.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 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 배배 말라가면서/ 그저,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 윤중호 ‘시래기’
 

 

보잘것없는 시래기도 외롭고 허기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 되기를 원한다. 몸 안에 머금은 물기, 이를테면 욕심 같은 것을 지워야 따스한 시래기죽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암으로 일찍 떠난 시인은 죽음의 병상에서 이 시를 썼다. 시든 무엇이든 베푸는 마음은 가진 것 많고 적음에 상관없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신필균 사무총장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느 이름 없고 얼굴 없는 기부를 얘기했다. “전북에선 매년 12월이면 4년째 공동모금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동사무소 앞 화단에 가서 쇼핑백을 찾아가라’고 해요. 그 쇼핑백에는 수표와 함께 현금으로 800만원이 들어있기도 하는데, 늘 꽉 찬 돼지저금통도 2개가 있어요. 누군지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순수한 마음이 좋아 그대로 지켜보고 있어요. 올해도 기다려집니다.”

전주 노송동사무소에 누군가가 적지 않은 돈을 놓고 간 지는 사실 8년째가 됐다. 전주 시민에겐 이미 ‘전설’이 된 이 독지가는 해마다 수백만원에서 1000만원씩 든 쇼핑백과 동전 수십만원이 들어찬 저금통을 놓아 둔다. 30대 남자 또는 20대 여성이 전화로 알려와 동사무소 직원이 달려나가 보면 돈과 함께 이런 메모지가 들어 있다고 한다. ‘올해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렸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에게 전해 주십시오.’ 100만원씩 묶는 ‘띠지’가 세밑을 데우는 얼굴 없는 온정을 추적할 단서가 되지만 동장은 누를 끼칠까봐 주인공 찾는 일은 포기했다고 한다.

큰 베풂도 좋지만 작은 나눔은 더욱 소중하다. 제 여유 없어도 가난마저 쪼개는 청빈(淸貧)의 마음이어서다. 시인의 귀엔 자선냄비에 던져 넣는 동전 소리가 하늘이 ‘잔돈 자선’을 반겨 내는 탄성(嘆聲)으로 들린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지폐는 접어 두고/ 동전을 던진다/ …/ 동전을 던져 쨍그랑 소리가 나면/ 자선이 하늘에 상달(上達)하는/ 소리라기에/ 아예 지폐는 젖혀 두고/ 소리 잘 나는 동전만 골라 던진다.’
- 김시종 ‘인심’


신필균 총장은 “자기도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더 기부를 많이 한다”고 했다.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면서 첫 월급을 기부한 선생님, 점심을 굶으며 한 달치 점심값을 모아 보내온 익명의 기부자, 하루 수익금을 몽땅 보내온 순대 노점상 부부…. 매달 일정액을 내는 이들도 1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모든 손길이 빈자일등(貧者一燈) 같은 사랑이다. 부처에 공양한 수만 등불이 바람에 꺼져도 가난한 여인이 정성으로 켜 올린 등불 하나는 오래도록 무명(無明)세계를 밝혔다. 감나무에 외롭게 매달린 까치밥은 우리네 시골의 빈자일등이다. 어르신들은 초겨울 배고픈 까치가 쪼아 먹으라고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남겨뒀다. 살림은 넉넉지 못해도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 줄 알았다.


‘감나무 가지 끝에/ 홍시 하나가/ 까치밥으로 남아 있었다/ 서릿바람 불고/ 눈발 날려도/ 가지 끝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밤새 꺼지지 않던/ 빈자일등.’
- 윤효 ‘홍시’


한 해의 끝, 새해의 경계에 서면 좌절과 극복, 절망과 부활이 맞부딪친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과 부정(否定)은 언제나 참회와 정죄(淨罪)와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가고야 만다. 그 사색과 성찰은 한 해라는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한 해의 마루턱을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얻는 깨우침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그 꽃’


지하철역 모금함을 열어보면 돈만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한다. ‘애인과 헤어져 이 반지가 필요없어요. 좋은 일에 쓰세요’라는 사연과 함께 반지가 들어 있기도 한다. ‘부모님께 드리려던 선물인데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주세요’라며 상품권을 넣은 이들도 많다.
깊이 박힌 못을 이보다 더 시원스레 뽑아내고 가족과 이웃 사랑을 이보다 더 알싸하게 표현한 해넘이도 드물겠다. 지난 한 해 남의 마음에 박은 못, 내 몸에 박힌 못 모두 뽑아내고 빈 가슴, 맑은 머리로 새해를 맞아야겠다. 작고 당연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세밑이어야겠다. 못, 뽑으셨습니까?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