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男子, 그리고 중년

세칸 2007. 12. 23. 00:23
詩로 읽는 세상사
男子, 그리고 중년

삶의 그늘이 깊어진다

 

낱말을 설명해 맞히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웬수….’
- 황성희 ‘부부’


마흔 다섯은/귀신이 와 서는 것이/보이는 나이//참 대 밭 같이/참 대 밭 같이//겨울 마늘 낼/풍기며/처녀 귀신들이/돌아 와 서는 것이/보이는 나이//귀신을 기를 만큼 지긋치는 못해도/처녀 귀신 허고/상면(相面)은 되는 나이.’
―서정주 ‘마흔 다섯’

 

중년이 돼 삶의 마루턱에 서면 세상사 이치가 훤하다고 했다. 형안(炯眼)이라는 말처럼, 지난 일부터 닥쳐올 일까지 눈이 확 트인다고 했다. 아예 도통할 만도 했다.

 

‘쉰 살이 되니까/ 나도 반쯤 귀신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자기 죽은 날 옛집을 찾아가는/ 귀신 눈에는 제삿상도 보인다던데/ 쉰 살이 되니까 내게도/ 지난 추억이란 추억들이/ 불을 켠 듯 환히 보이기 시작하는군/ 그뿐인가, 쉰 살이 되니까/ 내가 앞으로 내처 가야 할/ 길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군/ 옛날에는 점술가한테서나 알아보던 그 길이.’
―이수익 ‘오십 근황’

 

중년의 무게와 완숙함, 느긋함을 ‘늦은 봄, 민달팽이 한마리 푸른 산그늘을 지고 아주 천천히 청미래 덩굴 아래를 지나고 있다’(유재영의 ‘오십 살’)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잡지사에 취직한 김동인이 중절모를 쓴 채 책상에 앉아 일했다. 보다 못한 사장이 “김 선생, 사무실에서는 모자를 벗으시지요” 한마디 했다. 김동인은 벌떡 일어나 나가더니 종내 무소식이었다. 밥벌이에 목을 매는 오늘 우리네 세속의 중년 가장들에게 김동인의 일화는 일화일 뿐이다. 자존심은 고사하고 좀스런 걱정에 이리저리 헛된 셈을 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아이들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늙어서 먹고살려면 얼마가 드나, 그런데 얼마를 더 벌 수 있나. 아무리 맞춰봐도 어긋나는 대차대조표를 머릿속에 썼다 지웠다 한다. 그냥 살아볼 밖에.

 

‘대문을 나선다/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하여/ 바쁜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 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를/ 몇 개의 은전(銀錢)과 바꾸고/ 지쳐서 어깨가 축 늘어져/ 문을 들어서는/ 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박목월 ‘우리의 출입’

 

중년의 삶은 하루를 몇 푼 은전과 바꾸는 일이다. 부르튼 맨발로 종일 거리를 헤매며 노동하고 양식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활의 수레바퀴를 굴리느라 너절해진 제 몸을 내려다보며 가장은 동정 어린 독백을 뇌까린다.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김사인 ‘노숙’

 

사내 나이 마흔이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거울 보기가 싫다. ‘처음엔 내가 마흔 살이/ 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드라고’(황지우의 ‘우울한 거울 2’).
나이 들어가는 과정은 점진적이지도 순하지도 않다. 우스꽝스러워진 제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눈꼬리는 처지고 흰자위는 탁해진다. 온 얼굴에 세월과 피곤의 더께가 앉는다. 미어지고 비어져나온 살들은 또 어떤가.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내 얼굴 이미 많은 걸 지녔다/ 얼굴 드리운 쾡한 눈빛/ 얼굴에 파인 깊은 그늘/ 자비상, 분노상, 백아상출상 열한 개 얼굴/ 보이지 않는 뒷모습 살의(殺意)/ 나는 내가 두렵다/ …/ 가면도 얼굴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맨얼굴 옛 미소가/ 내 얼굴 정수리 불면(佛面)이 사라진 흔적.’
―김영산 ‘내 십일면관음상’

 

시인은 젊음과 순수가 사라진 자기 얼굴을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맨 얼굴의 미소를 상실한 현실과 옛 얼굴을 돌이킬 수 없다는 아픔이 거기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나와는 다른 타자(他者)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 강태기도 “가끔 화장실 거울을 보며 별 볼 일 없는 사내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했다. 그는 쉰 넘긴 사람을 보면 참 지겹게도 오래 산다고 경멸하던 때가 있었는데 정작 그도 이냥저냥 살다보니 쉰줄에 들더라고 했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가리켜 ‘불혹(不惑)’이라 했지만 우리네 중년은 ‘부록(附錄)’ 같은 곁가지 인생이 돼 버렸다. 직장에선 잘릴까 눈치보고 집에선 손님처럼 겉돌자니 열정은커녕 세상에 대한 적의와 원망까지 잊어버렸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 …/ 장모는 반야심경과 놀고 장인은 티브이랑 놀고/ 아내는 성경 속의 사내랑 놀고/ 아들놈은 리니지와 놀고/ 딸내미는/ 딸내미는// 처음 몸에 핀 꽃잎이 부끄러운지 코빼기 한 번 삐죽 보이곤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나마 아빠를 사내로 봐주는 건 너뿐이로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황송하구나, 예쁜 나의 아가야//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식탁에 앉아 소주잔이나 기울이다가/ 혼자 적막하다가/ 문득, 수족관 앞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블루그라스야, 안녕! 엔젤피시야, 안녕!/ 너희들도 한잔 할래?/ 소주를 붓는다.’
―고영 ‘황야의 건달’

 

가장이 집에 들어오자 불편해하는 건 초경을 시작한 딸아이뿐이다. 집안 어디에 엉덩이를 놓아야 할지 무색해서 가장은 짐짓 큰소리를 내본다. 술에 취해 들어가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수염을 부비거나 용돈을 안기던 것은 시절 좋던 때 얘기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집에서 가장은 수족관 열대어에게 소주를 권한다.

 

남성성과 부성(父性)이 스러져 가는 이 시대 가장들은 혼도 진도 다 빠지도록 돈 버는 기계일 뿐이다. 가정과 가족을 위해 온몸 바쳐 국물만 실컷 우려내고 나면 하찮게 버려지는 한 마리 멸치다.

 

삶의 그늘이 깊어진다

 

9월 29일자 문화일보 12면  

 
‘(아내는 맛있게 끓는 국물에서 며루치를/ 하나씩 집어내 버렸다. 국물을 다 낸 며루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뜨겁게 끓던 그 어려운 시대에도/ 며루치는 곳곳에서 온몸을 던졌다/(며루치는 비명을 쳤겠지. 뜨겁다고/ 숨차다고, 아프다고, 어둡다고, 떼거리로/ 잡혀 생으로 말려서 온몸이 여위고/ 비틀어진 며루치 떼의 비명을 들으면)// 시원하고 맛있는 국물을 마시면서/ 이제는 쓸려나간 며루치를 기억하자….’
―마종기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
 
중년들은 신산(辛酸)한 삶을 짊어지고 가느라 몸과 마음이 온통 생채기 투성이다. 곤고(困苦)한 불모의 시대에 감정은 무뎌가고 욕망은 소진돼 간다. 모든 게 심드렁하고 시큰둥하다. ‘네 가지 맛’도 잃었다. 입맛 떨어져 먹는 게 시원찮고, 자는 맛 잃어 불면에 시달리고, 잠자리 맛 사라져 아내를 멀리하니, 살맛 안 날 수밖에. 그래도 중년들은 아픈 심신을 숨기고 산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거나 ‘남자는 강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다. 이 알량한 ‘존 웨인 증후군’ 탓에 골병만 더 깊어간다.
 
며칠 전 일간지 ‘책’면을 보니 어깨 처진 중년 남자들을 위한 책이 한꺼번에 네 권이나 나왔다. 국내외 필자들이 쓴 ‘마흔의 심리학’ ‘인생은 사십부터’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제3의 인생―중년 실직 시대의 인생법칙’이다.
 
책들은 중년이 겪는 ‘사추기(思秋期)’의 여러 위기와 고민을 말하고 나름대로 해법들을 제시한다. 인생 3분의 2는 결정됐으니 3분의 1을 남긴 중장년이 인생 최고 시기라고 강조한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라고 이른다. 이뿐 아니라 출판계엔 중년 인생지침서들이 숱하게 쏟아지고 있다. 고독, 우울, 공허, 자책, 무기력…. 자신과의 단절과 불화를 앓으며 갈 길 몰라하는 중년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