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처럼 굳세게, 칼처럼 날카롭게
정병례의 '아름다운 얼굴'에 부쳐
한양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얼굴은 얼의 꼴이다. 정신의 표정이다. 표정이 아름답다는 것은 살아온 삶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예쁘고 잘 생겨서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그 끼친 자취가 거룩해서 아름답다고 한다.
이제 서른 한 분의 아름다운 얼굴을 돌에다 새겼다. 돌에다 새기는 일은 사진을 찍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림으로 그리는 것과도 같지가 않다. 단단한 돌과 굳센 칼이 만나 깊이 패인 주름살과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의 곡선들, 삶의 풍상이 깃든 환한 웃음과 음영 속에 짙게 가리워진 고뇌의 모습들을 새겨 놓았다.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할아버지, 조용히 이글거리는 정의의 분노, 그 날카로운 칼 끝은 돌 속에 숨어있던 표정들을 하나 둘 필름을 인화하듯 화면 위로 떠올려 놓았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내던졌던 독립운동가도 있고, 좌표 잃은 시대의 빛으로 등대로 한 삶을 불밝힌 종교인도 있다. 오로지 양심과 정의에 입각한 일생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한 사람들과, 행동과 실천을 통해 이 사회의 건강한 힘을 회복코자 했던 사회운동가, 붓으로 노래로 역사를 지켜보고 시대를 증언했던 문화예술인도 있다. 인물의 선정을 두고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니 내가 말할 일이 아니다.
전각가 고암 정 병례 선생
아직도 전각 하면 그저 도장을 떠올리고 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전각이 예로부터 예술의 떳떳하고 중요한 한 영역이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이다. 글씨를 몰라서도 안되고, 칼끝이 무뎌서도 안된다. 획 하나와 글자 하나의 구성에 따라 千變하고 萬化하는 변화가 百出한다. 칼끝은 예리하지만 그것이 돌 위에서 만들어내는 선들은 부드럽고 질박하고 매끈하고 섬세해서, 붓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잘 포착해 낸다. 사방 한 치의 印面 위에 우주의 삼라만상이 뛰놀고, 음양태극의 온갖 哲理가 깃들인다.
전각가가 돌 위에 새기는 것은 일반적으로 문자이다. 肖形印이라 하여 새나 동물, 또는 갖가지 문양들을 새기는 경우도 꽤 있어 왔으나, 사람의 얼굴을 이렇듯 야심차게 돌 위에 얹어 볼 생각은 이전에 누구도 해 보지 못했다.
寫意傳神, 그 뜻을 읽고 그 정신을 전달하는 것을 예로부터 인물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일러왔다. 닮고 안닮고는 두 번째 문제다. 요컨대는 그 정신의 표정이 살았느냐 죽었느냐에서 성패가 갈린다. 그 사람과 꼭 닮아도 그 정신을 꿰뚫는 직관이 살아나지 않으면 죽은 껍데기일 뿐이다. 이런 것은 작품이 아니다. 사진관의 증명 사진과 작가의 예술 사진이 다른 점은 바로 정신과 해석의 유무에서이다. 예술 작품 속에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고, 그늘이 있다. 배경의 빛이 없이는, 배면의 그늘이 없이는 예술이 될 수 없다.
전각은 그림이나 사진과 달라서 중간 색을 허용하지 않는다. 검은 색 아니면 흰 색이지 회색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진을 돌 위에 붙여 놓고 판다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설령 판다고 해도 남는 것은 일그러지고 왜곡된 이상한 모습 뿐이다. 돌에다 정신의 표정을 약여하게 드러낼 수 있으려면 과장하고 단순화하고 변형시키는 작가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림은 잘못된 획을 덧댈 수도 있고 교정할 수도 있지만 칼에는 용서가 없다. 칼날이 한 번 제 갈 길을 잃어, 다 된 작품을 놓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나를 잊는 미친 몰두 속에서만 예술은 숨쉰다. 어제까지의 나에 안주할 때 예술은 없다. 지금까지의 관습과 통념에 편안해서는 예술은 생기를 잃고 만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빈손인 채로 언제든지 미지의 길로 나서는 용기 속에서 예술은 살아 숨쉰다.
정병례, 그는 늘 새롭고도 파격적인 시도로 우리에게는 항상 낯선 존재다. 수백년 단단한 예술 전통 속에 갇혀 있던 전각이 그에게 와서는 행위 예술이 되고, 설치 미술이 되고, 생활 예술이 되었다. 이번 그의 작업에서도 나는 전각 예술의 미래가 범상치 않으리란 직감을 받았다. 이것은 단순히 또 하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그의 노고를 찬탄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멈출줄 모르는 정신, 그치지 않는 열정이 나는 무섭다. 그가 여기 새긴 것은 서른 한 분의 얼굴이지만, 실제 그가 새긴 것은 서른 한 분의 열 곱은 될 것이다. 그 묵묵한 집중과 미련한 집착의 과정 속에서 그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이제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새기고, 그분들의 어록을 돌 위에 올려 놓았다. 그네들의 삶이 다 달랐듯이 거기에 새긴 서체와 구성, 돌의 모양도 한결 같지가 않다. 그 다양한 표정 속에 우리의 지난 백년이 깃들어 있고 앞으로의 백년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것은 지난 세기 동안 우리가 찾아낸 긍지요 보람이자, 앞으로 일구어나가야 할 가능성의 씨앗들이다.
그 얼굴들 앞에서 돌처럼 굳세게, 칼처럼 날카롭게 정신을 벼리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리라. 감동을 잊은지 오래인 우리 마음에 빈병에 물이 콸콸 차오르듯 벅찬 기쁨이 샘솟을 것이다.
'사는 이야기 > 이런저런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男子, 그리고 중년 (0) | 2007.12.23 |
---|---|
로스트 라이언즈(Lions For Lambs, 2007) (0) | 2007.12.22 |
스님, 장독 속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습니까 (0) | 2007.12.21 |
'정력에 좋은음식' 진실과 오해 (0) | 2007.12.21 |
눈물의 ‘밥’이 추억의 별미로 (0) | 2007.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