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로 읽는 세상사
- 눈물의 ‘밥’이 추억의 별미로
1인 보리 소비량 1970년 37.3㎏에서 지난해 1.2㎏으로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황금찬 ‘보릿고개’에서
푸르르던 청보리밭이 6월이면 황금물결로 일렁인다. 누렇게 익은 보리가 낟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댄다. 들녘은 서둘러 보리걷이를 끝내고 모내기철을 맞는다. 농번기의 시작이다. 요즘 세상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지만 이 무렵의 감회가 여간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길고 허기진 보릿고개를 겨우 넘어 보리밥이나마 고봉으로 먹어 보는 6월은 감회쯤이 아니라 감격의 계절이었다.
가을에 거둔 식량이 겨울을 채 넘기기도 전에 바닥 나고 춘궁기(春窮期) 내내 굶주려야 했던 그 시절 유년의 5월을 시인 고은이 회상했다. ‘오랜 가난의 굴레는 막 보릿고개를 허위단심 넘어야 했다. 이른 봄의 논두렁 뚝새풀로 죽을 쑤어 먹어야 했고 냉이와 벌금자리 나물을 캐어 겨울 양식이 떨어진 하루하루를 넘기는 입맛을 냈다. 묽은 된장국은 서러웠다.’
고은의 유년은 일제의 수탈이 극에 이른 1940년대쯤일 것이다. 일제는 쌀을 빼앗아가고 대신 만주산 좁쌀을 들여왔다. 1930년 조사를 보면 봄마다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농민이 125만가구로 전체의 절반이었다. 밥은 죽으로, 쌀은 잡곡으로, 잡곡은 만주 좁쌀로 대신해야 했다. 절반은 그 좁쌀조차 구하지 못해 싸라기를 멀건 산나물죽에 띄워 먹곤 했다. 굶어죽는 이가 ‘연년의 거수(巨數)’, 해마다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1920년생인 조연현의 ‘진달래’에도 슬프고 혹독하던 보릿고개의 기억이 배어 있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한 잎 두 잎 따 먹은 진달래에 취하여/ 쑥바구니 옆에 낀 채 곧잘 잠들던/ 순이의 소식도 이제는 먼데// 예외처럼 서울 갔다 돌아온 사나이는/ 조을리는 오월의 언덕에 누워/ 안타까운 진달래만 씹는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아이들은 입술이 퍼래지도록 진달래를 따 먹었고 감꽃이며 찔레 순을 삼키며 허기를 잊어보려 했다. 굶어죽는 사람은 6·25 직후는 물론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뜨는 부황도 흔했다.
‘…/ 소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해 따뜻한 봄날/ 마을 뒷산의 한 무덤 앞에는/ 무덤 모양 동그랗게 고봉으로 담은/ 흰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난해 흉년에 굶어죽은 이의/ 무덤이었다/ 새싹들을 어루만지는 봄볕 속에서/ 봉분은 그의 죽음의 무덤이고/ 밥은 그의 삶의 무덤인 양/ 서로 키를 재고 있었다/ 봄이 되면/ 눈물도 아롱이는 먼 아지랑이 속/ 다냥한 밥과 무덤 아롱거린다.’
- 김영석 ‘밥과 무덤’
볕이 잘 들어 밝고 따뜻한 ‘다냥(당양·當陽)한’ 무덤 앞에 놓인 쌀밥 한 그릇. 죽어서라도 한번 배불리 먹어보라는 그 슬픈 풍경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소읍, 소도시에서 유소년기를 난 50대에게도 보리밥의 추억은 생생하다.
냉장고도 없던 그 시절 어머니들은 금세 쉬어 버린 보리밥을 찬물에 휘휘 저어 헹군 뒤 소쿠리에 담아 바람 잘 통하는 청마루에 걸어뒀다. 이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거나 삶은 감자 두어 개를 으깨어 넣고 고추장에 썩썩 비벼먹었다. 찰기 없이 푸석푸석한 보리밥은 금방 꺼졌다. 어머니들은 “뛰지 마라, 배 꺼진다”고 소리치곤 했다.
‘보리알이 여물기 훨씬 전부터 겨우 물알이 든 보리이삭을 잎사귀째 잘라서 나물 섞어 죽을 쑤어 먹었다. 푸른 보리죽, 청맥죽(靑麥粥)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곡기(穀氣) 든 죽을 들이켜려니 눈에서 별똥이 떨어지듯 눈물이 쏟아진다고 해서 별똥죽이라고도 하고, 눈물을 섞어 먹는다고 해서 옥루죽(玉淚粥)이라고도 했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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