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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밥’이 추억의 별미로

세칸 2007. 12. 21. 01:13
詩로 읽는 세상사
눈물의 ‘밥’이 추억의 별미로

1인 보리 소비량 1970년 37.3㎏에서 지난해 1.2㎏으로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황금찬 ‘보릿고개’에서

 

푸르르던 청보리밭이 6월이면 황금물결로 일렁인다. 누렇게 익은 보리가 낟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댄다. 들녘은 서둘러 보리걷이를 끝내고 모내기철을 맞는다. 농번기의 시작이다. 요즘 세상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지만 이 무렵의 감회가 여간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길고 허기진 보릿고개를 겨우 넘어 보리밥이나마 고봉으로 먹어 보는 6월은 감회쯤이 아니라 감격의 계절이었다.

 

가을에 거둔 식량이 겨울을 채 넘기기도 전에 바닥 나고 춘궁기(春窮期) 내내 굶주려야 했던 그 시절 유년의 5월을 시인 고은이 회상했다. ‘오랜 가난의 굴레는 막 보릿고개를 허위단심 넘어야 했다. 이른 봄의 논두렁 뚝새풀로 죽을 쑤어 먹어야 했고 냉이와 벌금자리 나물을 캐어 겨울 양식이 떨어진 하루하루를 넘기는 입맛을 냈다. 묽은 된장국은 서러웠다.’

 

고은의 유년은 일제의 수탈이 극에 이른 1940년대쯤일 것이다. 일제는 쌀을 빼앗아가고 대신 만주산 좁쌀을 들여왔다. 1930년 조사를 보면 봄마다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농민이 125만가구로 전체의 절반이었다. 밥은 죽으로, 쌀은 잡곡으로, 잡곡은 만주 좁쌀로 대신해야 했다. 절반은 그 좁쌀조차 구하지 못해 싸라기를 멀건 산나물죽에 띄워 먹곤 했다. 굶어죽는 이가 ‘연년의 거수(巨數)’, 해마다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1920년생인 조연현의 ‘진달래’에도 슬프고 혹독하던 보릿고개의 기억이 배어 있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한 잎 두 잎 따 먹은 진달래에 취하여/ 쑥바구니 옆에 낀 채 곧잘 잠들던/ 순이의 소식도 이제는 먼데// 예외처럼 서울 갔다 돌아온 사나이는/ 조을리는 오월의 언덕에 누워/ 안타까운 진달래만 씹는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아이들은 입술이 퍼래지도록 진달래를 따 먹었고 감꽃이며 찔레 순을 삼키며 허기를 잊어보려 했다. 굶어죽는 사람은 6·25 직후는 물론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뜨는 부황도 흔했다.

 

‘…/ 소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해 따뜻한 봄날/ 마을 뒷산의 한 무덤 앞에는/ 무덤 모양 동그랗게 고봉으로 담은/ 흰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난해 흉년에 굶어죽은 이의/ 무덤이었다/ 새싹들을 어루만지는 봄볕 속에서/ 봉분은 그의 죽음의 무덤이고/ 밥은 그의 삶의 무덤인 양/ 서로 키를 재고 있었다/ 봄이 되면/ 눈물도 아롱이는 먼 아지랑이 속/ 다냥한 밥과 무덤 아롱거린다.’

- 김영석 ‘밥과 무덤’

 

볕이 잘 들어 밝고 따뜻한 ‘다냥(당양·當陽)한’ 무덤 앞에 놓인 쌀밥 한 그릇. 죽어서라도 한번 배불리 먹어보라는 그 슬픈 풍경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소읍, 소도시에서 유소년기를 난 50대에게도 보리밥의 추억은 생생하다.

 

냉장고도 없던 그 시절 어머니들은 금세 쉬어 버린 보리밥을 찬물에 휘휘 저어 헹군 뒤 소쿠리에 담아 바람 잘 통하는 청마루에 걸어뒀다. 이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거나 삶은 감자 두어 개를 으깨어 넣고 고추장에 썩썩 비벼먹었다. 찰기 없이 푸석푸석한 보리밥은 금방 꺼졌다. 어머니들은 “뛰지 마라, 배 꺼진다”고 소리치곤 했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 했지만 황금찬은 에베레스트보다도 높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그 고개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울며 넘었나.
 
‘…/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고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하늘이 커다란 보리알로 보이는데 보리 여물기를 기다릴 새가 있었겠는가. 식민지 조선 이래 질긴 민초들의 삶을 그린 유영국의 장편 ‘만월까지’에 이 ‘보리 풋바심’ 얘기가 나온다.

‘보리알이 여물기 훨씬 전부터 겨우 물알이 든 보리이삭을 잎사귀째 잘라서 나물 섞어 죽을 쑤어 먹었다. 푸른 보리죽, 청맥죽(靑麥粥)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곡기(穀氣) 든 죽을 들이켜려니 눈에서 별똥이 떨어지듯 눈물이 쏟아진다고 해서 별똥죽이라고도 하고, 눈물을 섞어 먹는다고 해서 옥루죽(玉淚粥)이라고도 했다.’
 
정부가 1948년부터 시행해온 보리 수매제도를 2012년 폐지한다는 소식이다. 수매제도란 출하기 곡물의 수요·공급을 조절하고 농가 소득을 보전해주려고 해마다 정해진 값에 물량을 사들이는 제도다. 정부는 2012년까지 매년 수매물량을 5~20%씩, 수매가격을 2~6%씩 단계적으로 내릴 것이라고 한다. 보리가 남아돌기 때문이다. 1970년만 해도 37.3㎏이던 한 해 1인당 보리 소비량은 지난해 1.2㎏까지 떨어졌다. 한 해 12만t이 생산되지만 9만t밖에 소비되지 않아 재고가 22만t 넘게 쌓였다.
 
이제 농민들은 다른 작물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보리의 시대가 사실상 끝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꽁보리 비빔밥집에서나 보리밥을 먹는다. 눈물의 밥이 아니라 ‘웰빙’ 별미다. 보리순을 넣어 끓이는 별미 홍어애국엔 그래도 배고프던 시대의 내력이 깃들어 있다. 늦겨울, 초봄엔 채소 구경을 할 수 없던 시절 꼬리한 홍어 애(내장)에 풋풋한 야채 내음을 곁들여주던 것이 보리순이었다. 사시사철 싱싱한 야채들이 쏟아지는 요즘엔 미나리, 부추에 파래, 매생이 같은 것들을 넣으면 더 좋을 테지만 어르신들은 거칠거칠한 보리순 안 들어가면 애국이 아니라고 손을 젓는다. 그래서 홍어집들은 초봄에 보리순을 한꺼번에 사들여 살짝 데친 뒤 물기 빼고 소포장해 냉동해두고 연중 쓴다.
 
시인 정양은 ‘보리민대’에서 ‘별똥죽’과 ‘옥루죽’ 얘기를 하고는 그보다 조금 더 보리알이 들었을 때 구워 먹던 일을 회상한다.
 
‘…/ 물알이 틉틉해진 보리이삭을 따서/ 가마솥에 삶아내어 말려 바순 게/ 퍼렇게 쫄깃거리는 보리민대다/ 아이들은 물알이 더 틉틉한 이삭을 골라/ 어른들 몰래 끼리끼리 구워 먹었다/ 불에 그슬려 구워낸 뜨거운 보리이삭을/ 손바닥에 비벼서 후후 불어낸/ 그 퍼런 보리알도 보리민대다/ 손바닥에 묻은 껌댕이가 꺼멓게/ 입언저리에 묻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보리민대를 허겁지겁 씹어먹었다// 며칠만 지나면 토실토실한 알보리밥을/ 고봉으로 꾹꾹 눌러 배 터지게 먹으리라/ 진달래꽃 따먹으며 허천나던/ 지긋지긋한 봄날도 이제는 끝, 아이들은/ 보릿고개의 마지막 먹거리/ 행복한 보리민대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손바닥 껌댕이를 옆엣놈 낯바닥에/ 다투어 처바르며 낄낄거렸다.’
 
이제 구운 보리민대는 몇몇 농촌의 보릿고개 체험마을에서나 맛볼 수 있다. 청보리밭은 고창 학원농장처럼 이름난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보리와 함께 지나온 배고픔과 피눈물의 역사가 희미해져 간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