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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篆刻 - 서예, 조각, 회화, 구성을 아우르는 종합예술

세칸 2007. 12. 19. 00:42

전각篆刻

서예, 조각, 회화, 구성을 아우르는 종합예술

 

한얀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돌을 잡아 무릎에 얹고, 어깨를 기우숙하게 하여 턱을 숙이고서, 눈을 꿈뻑이고 입으로 불며 그 먹 글씨를 파먹어 들어가는데 실낱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입술을 삐죽 모아 칼을 내밀고 눈썹에 힘을 주더니만, 이윽고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보며 길게 숨을 내쉰다."

好學者雖死若存

不學者雖存

行尸走肉耳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비록 살았더라도 
걸어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연암 박지원이 친구 유련柳璉(1741-1788)의 인장 새기는 모습을 묘사한 글이다. 유련은 전각篆刻에 특별한 취미가 있어 스스로 인장을 새겼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모은 고금의 인장을 찍어 인보집印譜集인 《유씨도서보柳氏圖書譜》란 책을 만들기도 했던 인물이다.
 
병자호란 당시 주전론主戰論을 앞장서 외치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간 감금 생활을 하기도 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도 전각에 남다른 취미를 가졌었다. 그는 거처하던 석실石室 곁에 군옥소群玉所란 작은 누각을 세워 놓고, 평생 자신이 새기고 모은 인장들을 그곳에 보관해 두었다. 날씨가 맑고 따뜻한 날에는 방안을 청소한 후 책상 위에 인장을 진열해 놓고 쓰다듬고 매만지며 즐거워 했다. 죽을 때는 자신이 특별히 아끼던 인장을 함께 묻어줄 것을 유언하기까지 했으니, 그 애호의 정도를 알 수가 있다.
 
홍석귀洪錫龜(1621-1679)도 효종·현종 때의 문신으로 전각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예술성이 풍부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 또한 세상을 뜰 때 자신이 새긴 인장을 모두 무덤에 가지고 갔다. 그러다가 지난 1968년 경부 고속도로 공사로 산소를 이장하던 중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국사봉 아래 언덕에서 백자 항아리에 담긴 채 93과顆의 인장이 300년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전각하면 사람들은 으레 이름을 새긴 도장을 떠올리지만, 이것이 정작 서화와 함께 과거 문인 예술의 주요 영역 가운데 하나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위의 몇 가지 예만 보더라도 우리 옛 선인들에게 전각이 얼마나 생활 속에 가깝게 뿌리 내린 예술이었던가를 알 수가 있다. 서화 작품에는 마땅히 작가의 낙관이 있어야 했고, 지금도 고서점에 가보면 책의 첫 면에는 으레 장서인이 찍혀 있게 마련이다. 문인 치고 누구나 자신의 이름이나 좋아하는 글귀를 새긴 인장 한두 개쯤 지니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이들 인장은 도장포에서 장인들이 새긴 것이 아니라, 문인들이 스스로 취미를 가지고 새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장印章의 사용은 이미 수천년의 연원을 가지고 있다. 죽간에 씌여진 중요한 문서를 끈으로 묶고 매듭을 지어 그 위에 진흙을 발라 고정시킨 뒤에 거기에 인장을 찍었다. 그러면 진흙이 곧 굳게 되어 그것을 부수지 않고서는 문서를 열어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봉니封泥라고 했다. 말하자면 인장은 일종의 신표였던 셈이고, 그 성격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정보화의 시대에 모든 것이 다 간소화되었어도, 중요한 서류나 문서에는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효력이 발생한다고 믿는 것도 인장에 관한 우리의 뿌리깊은 신뢰를 반영한다.
 
진한秦漢 시대의 인장은 모두 구리로 만든 동인銅印이었다. 오늘날처럼 나무에다가 새긴 것은 오히려 많지 않았고, 명나라 이후 질 좋은 인장용 석재가 개발되면서부터 돌에다 새기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전각이 문인 예술의 한 자리를 오롯이 차지하게 되는 것도 이 시기에 이르러서이다. 수산석壽山石·청전석靑田石·창화석昌化石·파림석巴林石 등 산지에 따른 이름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전황석田黃石과 계혈석鷄血石, 부용석芙蓉石과 같은 돌은 인석삼보印石三寶로 일컬어질만큼 유명하여, 그 가격 또한 거의 같은 무게의 황금 값과 비슷할 정도이다. 석질과 무늬에 따라 인장석도 수 백 가지의 종류가 있고, 또 돌의 모양과 머리에 얹는 장식에도 매우 다양한 법식이 있다.
 
전각篆刻이란 명칭은 인장에 새기는 글씨가 전서篆書를 기본꼴로 한데서 나왔다. 과거의 인장은 모두 글자 부분이 희게 보이는 음각이 일반이었는데, 명대 이후로는 글자 부분이 붉게 보이는 양각도 발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인장이 모두 이름만을 새기는 것은 아니었다. 초형인肖形印이라 하여 사물의 형상을 새기기도 하였고, 한장인閑章印이라 하여 금언金言이나 경귀를 새기기도 하였다.
 
인장은 각종 서화의 여백에 찍어 작가를 표시하고, 또 감상자도 여백에 자신의 인장을 찍어 역대에 걸작으로 꼽힌 작품에는 수십개의 감상인이 찍힌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시대를 거쳐 그 시대의 명인들이 직접 감상하고 자신의 감상인을 찍은 것이니, 그 감상인만으로도 그 작품의 진가는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이다.
 
전각은 인주로 찍는 인면 외에도 돌의 사방 둘레에 새기는 변관邊款도 중요한 감상 요소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주로 인장을 새기게 된 경위를 밝히거나, 인문印文과 관련된 시문을 적었는데, 청대 이래 이 변관 예술은 전각 예술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발전해왔다. 또 박의薄意라 하여, 인재印材의 사면에 새기는 조각도 전각 예술의 중요한 성분의 하나였다.
 
전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아우르고 있는 종합예술이다. 사방 한 치의 인면印面 위에 음양의 향배가 교묘하고, 우주의 삼라만상이 뛰놀며, 온갖 철리哲理가 깃들어 있다. 굳센 돌과 날카로운 칼이 만나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하고 질박한 선들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전각예술은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설치미술이나 생활미술로 활용되는가 하면, 전각 작품으로 책의 표제를 쓰거나 회사의 상징을 사용하는 일도 부쩍 늘고 있다. 실용적인 도장의 기능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겠지만, 종합 예술의 성격을 띤 전각예술의 영역은 날로 더 확장되어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