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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네 어미를 볼 낯이 없구나!

세칸 2007. 12. 18. 20:40

 

 

한얀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정민교수

 
 
          지하에서 네 어미를 볼 낯이 없구나
                                              -송순(宋純, 1493-1583)이 자식에게 준 훈계[訓子]
                                         
돌아보건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고아한 문장과 유학의 바탕을 이어받아, 가풍과 세덕(世德)이 예로부터 아름다운 소문이 있었음을 대개 떠올려 볼 수 있다. 어찌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실마리를 실추시키고 저러한 무리의 미친 행태를 사모한단 말이냐? 귤이 장강을 건너면 탱자로 변하고, 위수(渭水)가 경수(涇水)로 들어가면 흐려진다고 했다.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집을 옮긴 것인 진실로 까닭이 있었다.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하겠느냐던 공자의 가르침이 이 고장과 너희들에게 능히 부끄럽지 않으냐? 
   
아아! 집안이 쇠락하여 너희가 입신양명하는 것을 아직 못 보았는데, 다만 너희가 제멋대로 함부로 구는 망녕됨만 보게 되었다. 범과 표범의 가죽과 개나 양의 가죽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듣자니 네가 지난 번 너와 같은 무리와 더불어 학동(鶴洞)에서 신나게 놀았다더구나. 또 이달 13일에는 취암(鷲巖)에서 크게 술잔치를 벌여, 온 경내가 다 모여 갖은 악기를 다 갖춰 한정 없이 즐겨 놀 계획이라더구나. 어찌 그럴 수가 있더란 말이냐.
 
바야흐로 지금은 천재지변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어나, 춘추 적의 세 배나 되어 사서(史書)에 글이 끊이지 않는다. 신선의 베개는 화서(華胥)의 꿈을 깨고, 옥 술잔은 향기로운 술 맛을 잊었다. 무릇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왕의 교화를 입어왔다. 비록 초야와 산택의 사이에 있다고는 해도 마땅히 시절을 상심하고 세상을 근심하여, 눈썹을 태우고 눈을 부빌 틈도 없어야 하거늘, 어찌 진나라의 등 뒤에서 기국(杞國)을 엿보듯 멋대로 담소하고 함부로 노래하며 춤출 수 있겠느냐? 무지렁이 백성조차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을 너희가 하고 있으니 그러고도 네 마음이 편안하단 말이냐? 이미 한 차례 잘못을 해놓고 다시 되풀이 할 수 있느냐?  어찌 자주 되풀이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단 말이냐?
 
저 광망하고 문자도 알지 못해 마셨다 하면 취하기나 하는 붉은 치마 입은 자들은 진실로 죄줄 것도 없다. 너희는 옛글을 읽고 유관(儒冠)을 썼으면서도 인의예지의 성품을 포기하고서 무지하여 망녕된 짓을 하는 잘못을 스스로 받아들였으니, 네가 군자다운 선비가 되는 것은 바랄 수가 없겠고, 행동을 삼가는 바른 선비 또한 될 수가 없겠구나. 산 사람은 비난하고 저승의 귀신은 나무랄 것이니 장차 면할 곳이 없겠구나. 또 하물며 예로써 술을 마시는 자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 처음에 상도(常道)에 힘쓰다가 끝내 어지럽게 되기보다는 차라리 처음에 어지러웠지만 마침내 능히 다스려지는 것만 못하니, 내가 반드시 잘못될 것을 알겠다. 지난 번 너는 저들이 무리지어 함께 몸을 더럽히며 어지러이 뒤쫓는 것을 비웃었었다. 하지만 이제 네가 그 지경 속으로 점차 내달려 들어가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앞서는 대체 무슨 마음이었더냐?      
 
아! 이는 머리에 있으면서 검게 변하고, 사향노루는 잣을 먹고서 향기로워진다고 했다. 시종일관 함께함을 삼가라 하였으니, 선현께서 어찌 사람을 속이겠느냐? 네가 능히 유익한 세 가지 벗을 취하지 않고, 젖은 바로 인하여 물들었으니, 이는 도깨비나 귀신 무리의 일이다. 장차 누구를 좇아 덕성을 훈도하고, 장차 누구를 좇아 선행을 이루겠느냐? 손해만 있고 이익이 없는데도 능히 끊어 버리지 못하여 내 마음을 아프게 하니 불효가 크구나. 서경(徐卿)이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다던 두 아들에 견준다면 어떻겠느냐?
 
네 죄가 매질을 받아 마땅함을 모르지 않으나, 너 또한 사람인지라 떳떳한 양심을 품어 절로 지각하여 깨닫는 이치를 지녔으니 매질을 해서 무엇에 쓰겠느냐. 이제부터라도 능히 네 마음을 물리쳐서 그 허물을 면할 것을 생각하도록 해라. 네 덕을 환히 밝히고, 사귐을 끊어버려 부모의 마음을 네 마음으로 삼고, 선조의 사업을 네 사업으로 여기도록 해라. 어짊이 아니면 하지를 말고,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라. 이렇게만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의 능한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는 아름다운 자제가 되고, 나라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 안으로 스스로 돌아봄에 부족함이 없고 밖으로 아름다운 소문이 성대함이 있어, 쇠미한 풍속을 그 맑은 향기로 일으켜서 훌륭한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게 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느냐? 그리하면 내가 죽는 날에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놀고 즐기고, 게으르고 거만하게 굴면서 음악으로 창화하며 이같은 버릇을 깨끗이 고치지 않는다면 너를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실로 이 몸에 있게 되어, 내가 지하에서 네 어미를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아아!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오늘로부터 시작하고, 지난 날을 뉘우치고 미래를 향하는 것 또한 오늘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오늘은 무슨 날이냐? 임진년 동짓달 초이틀이다. 말로 논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얼굴을 맞대고 명령하는 것으로도 부족한지라, 붓으로 글을 써서 자식을 위한 계책으로 준다. 벽에다 붙여놓고 좌우명으로 삼아, 눈으로 읽고, 쓰든 버리든 품 속에 써서 지녀, 고해(苦海) 사이의 방편을 붙좇지 말도록 해라. 다시금 고하여 말한다. “주공(周公)께서는 보고 안일에 빠지고 놀고 사냥하는 음탕함을 경계하셨고, 공자께서는 도덕과 인예(仁藝)의 가르침을 내리셨다. 나 또한 이렇게 말한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이 거듭된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벗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마련해 논 자식들을 따끔하게 나무라며 써준 훈계의 글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오직 사랑으로 보듬어 길렀지만, 결국 버릇만 나빠지고 말았으니 다 내 탓이라고 스스로를 나무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안쓰럽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다잡아 분발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검은 머리 속에 살다 보니 검은 빛을 띤다. 사향 노루는 잣열매를 따먹는 동안 배꼽에 잣의 향내가 스민다. 이렇듯 사람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물이 든다. 물은 들게 마련인데 어떤 물을 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어물전의 생선 비린내를 함께 묻히고 다녀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인지, 은은한 군자의 향기를 풍겨 절로 눈길이 그리로 향하게끔 할 것인지는 오롯이 내 하기에 달렸다.
 
너희가 행실을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내가 지하에 가서 네 어미를 무슨 낯으로 만나 보겠느냐는 말이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이 매운 훈계를 듣고 어떤 표정들을 지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