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사진'을 찍는 이유
사진가 배병우의 소나무 시리즈가 런던 필립스 경매에서 1억 6천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김아타의 ‘온 에어(On Air) 프로젝트’는 뉴욕에서 1억 9천만원에 팔려 나갔다. 가격을 비교해 숫자로만 얘기하자면 다소 경박해지는 느낌이 있지만, 분명한 건 미술시장의 변방에 머물던 사진이 이젠 주류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들의 사진이 좋은 가격에 팔리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예술의 전당 같은 곳에서, 대형미술관에서 사진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한 게 1993년이다.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얼마 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사진가 김용호의 ‘mom’(몸) 전시회에 갔다 왔다. 김용호가 누구인가. 가장 선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최근 발레리나 김주원의 누드 사진을 찍어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바로 그 패션 포토그래퍼다. 혹자는 그를 지금의 청담동을 만든 사람이며, 오스카 와일드를 연상시키는 댄디라고도 한다.
사실 김용호를 수식하는 말 중엔 패션지 ‘보그’나 ‘바자’가 가지는 패셔너블한 뉘앙스들이 짙게 깔려있다. 하지만 그와 가끔 만나면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이 읽었던 소설이나 철학서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수 십권 씩 샀다가 나눠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아는 그는 참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인데, 그의 아름답게 채집된 사진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몸에 대한 생각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었다.
과연 ‘몸’을 얘기하는 데 사진만큼 적확한 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이너들이 ‘옷을 입히는데 소질’이 있었다면, 옷을 벗기는데 대단한 소질을 가진 사진가들도 있었다. 스티븐 마이젤이나 패트릭 드마쉴리에 같은 패션 포토그래퍼들의 누드 사진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실 상업적인 사진이라 치부하기엔 이들의 사진이 너무나 천재적이라 조명과 피부색,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까지 자신들이 제어하여 사진의 의미를 증폭시킨다.
‘누드’라는 건 벗는다는 걸 의미하므로 자칫 ‘통속’으로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것의 반대편엔 지고한 예술적 의미를 답보하고 있다. ‘누드’란 쓰기 힘든 양날의 칼인 셈이다. 마치 트렌드처럼 불고 있는 ‘몸’에 대한 관심은 몸짱 문화와 동안 신드롬, 식욕과 다이어트, 거식과 탐식의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예술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독 몸이 소재가 되고, 몸이 주제가 되어 관통하는 소설, 영화, 연극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영화 ‘색, 계’의 경우 이안이 그려내는 남자와 여자의 몸은 말할 수 없이 짐승스럽다. ‘이성’이 죄다 말라버리고, ‘욕망’만 남아 있는 인간의 몸이란 치명적일 정도로 파괴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는 ‘팜므 파탈’이나 ‘옴므 파탈’ 같은 말들도 그렇다.
‘파탈’(fatale)이란 프랑스어로 ‘운명적인’ 혹은 ‘숙명적인’이란 뜻이다. 그런데 프랑스어 ‘파탈’이 주는 느낌은 묘하게도 ‘파탄’이나 ‘파괴’ 같은 우리말의 뉘앙스와도 완벽히 겹쳐지는 면이 있다. 즉 욕망의 숙명성, 그것이 가져오는 어쩔 수 없는 파멸에 대한 인간적 회한들 말이다. 몸이 오롯이 남아 있는 스크린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살의와 격정이 뒤얽힌 지독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관음’ 너머에 있는 인간의 진짜 몸을 목격하고, 격렬한 섹스 뒤에 찾아오는 듯한 공허와 만나게 된다.
언젠가 만났던 사진가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에드워드 웨스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떠난 길고 긴 여행에서 마지막 대표작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말년에 프리다 칼로를 만나러 가는 멕시코 여행 길에서 에드워드 웨스턴의 정부이며 배우였던 ‘티나 모도티’는 그를 통해서 위대한 예술가로 새롭게 탄생한다.
에드워드 웨스턴 또한 티나 모도티의 ‘몸’에서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얻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가 그토록 많은 누드를 찍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말년의 피카소 또한 젊은 여성, 즉 에로티즘의 화신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 받지 않던가.
문득 평생을 풍경만 찍어오던 사진가의 마지막 순간엔 사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풍경이란 모름지기 인간이 제거된 순간을 의미하는데, 우리에게 마지막 풍경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에게 최초의 ‘몸’을 줬던 엄마의 자궁, 즉 여자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왜 이토록 ‘누드’에 탐닉하는가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사진이 좋은 가격에 팔리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예술의 전당 같은 곳에서, 대형미술관에서 사진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한 게 1993년이다.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얼마 전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사진가 김용호의 ‘mom’(몸) 전시회에 갔다 왔다. 김용호가 누구인가. 가장 선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최근 발레리나 김주원의 누드 사진을 찍어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바로 그 패션 포토그래퍼다. 혹자는 그를 지금의 청담동을 만든 사람이며, 오스카 와일드를 연상시키는 댄디라고도 한다.
사실 김용호를 수식하는 말 중엔 패션지 ‘보그’나 ‘바자’가 가지는 패셔너블한 뉘앙스들이 짙게 깔려있다. 하지만 그와 가끔 만나면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이 읽었던 소설이나 철학서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수 십권 씩 샀다가 나눠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아는 그는 참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인데, 그의 아름답게 채집된 사진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몸에 대한 생각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었다.
과연 ‘몸’을 얘기하는 데 사진만큼 적확한 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이너들이 ‘옷을 입히는데 소질’이 있었다면, 옷을 벗기는데 대단한 소질을 가진 사진가들도 있었다. 스티븐 마이젤이나 패트릭 드마쉴리에 같은 패션 포토그래퍼들의 누드 사진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실 상업적인 사진이라 치부하기엔 이들의 사진이 너무나 천재적이라 조명과 피부색,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까지 자신들이 제어하여 사진의 의미를 증폭시킨다.
‘누드’라는 건 벗는다는 걸 의미하므로 자칫 ‘통속’으로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것의 반대편엔 지고한 예술적 의미를 답보하고 있다. ‘누드’란 쓰기 힘든 양날의 칼인 셈이다. 마치 트렌드처럼 불고 있는 ‘몸’에 대한 관심은 몸짱 문화와 동안 신드롬, 식욕과 다이어트, 거식과 탐식의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예술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독 몸이 소재가 되고, 몸이 주제가 되어 관통하는 소설, 영화, 연극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영화 ‘색, 계’의 경우 이안이 그려내는 남자와 여자의 몸은 말할 수 없이 짐승스럽다. ‘이성’이 죄다 말라버리고, ‘욕망’만 남아 있는 인간의 몸이란 치명적일 정도로 파괴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있는 ‘팜므 파탈’이나 ‘옴므 파탈’ 같은 말들도 그렇다.
‘파탈’(fatale)이란 프랑스어로 ‘운명적인’ 혹은 ‘숙명적인’이란 뜻이다. 그런데 프랑스어 ‘파탈’이 주는 느낌은 묘하게도 ‘파탄’이나 ‘파괴’ 같은 우리말의 뉘앙스와도 완벽히 겹쳐지는 면이 있다. 즉 욕망의 숙명성, 그것이 가져오는 어쩔 수 없는 파멸에 대한 인간적 회한들 말이다. 몸이 오롯이 남아 있는 스크린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살의와 격정이 뒤얽힌 지독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관음’ 너머에 있는 인간의 진짜 몸을 목격하고, 격렬한 섹스 뒤에 찾아오는 듯한 공허와 만나게 된다.
언젠가 만났던 사진가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에드워드 웨스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떠난 길고 긴 여행에서 마지막 대표작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말년에 프리다 칼로를 만나러 가는 멕시코 여행 길에서 에드워드 웨스턴의 정부이며 배우였던 ‘티나 모도티’는 그를 통해서 위대한 예술가로 새롭게 탄생한다.
에드워드 웨스턴 또한 티나 모도티의 ‘몸’에서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얻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가 그토록 많은 누드를 찍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말년의 피카소 또한 젊은 여성, 즉 에로티즘의 화신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 받지 않던가.
문득 평생을 풍경만 찍어오던 사진가의 마지막 순간엔 사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풍경이란 모름지기 인간이 제거된 순간을 의미하는데, 우리에게 마지막 풍경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에게 최초의 ‘몸’을 줬던 엄마의 자궁, 즉 여자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왜 이토록 ‘누드’에 탐닉하는가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백영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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