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행복한 집짓는 생각

실매리에서 01 - 즐겁고 행복한 집 짓기!

세칸 2007. 9. 23. 09:56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맞으세요!

 

[세칸의 사는 이야기]를 찾아 주시는 님들!

어렵고 힘든 일은 잠시 잊고 즐겁고 행복한 한가위 맞으시길 빕니다.

귀향길이 안전하고 한가위 연휴가 즐거운 추억이 되며 재충전의 기회가 되시길 아울러 빕니다. 

 

 

사는게 뜻되로 만은 되지는 않겠지만 요즈음은 특히 더 그렇지 싶습니다.

경기가 좋다는 통계도 있습니다만 서민들의 살기는 좋아 지지도 행복해 지지도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예년에 없던 별스런 비 피해와 9월 태풍의 피해로 근심과 걱정을 많이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무슨 일이 어디서 꼬였는지도 모를 이상한 사건과 커넥션으로 정국도 어수선하고 짜증나게도 합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할지 모르나 그 모두가 우리의 세금으로 영위, 유지되고 복구되어야 할 일입니다.

시끄러운 일들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수해입은 곳은 어서 복구되어 피해를 입은 분들이 희망의 끈을 놓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태풍피해를 입은 농가도 지원과 격려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동백 씨앗도 익을 되로 익어 터졌습니다.

요즘이야 동백기름 바르고 비녀꼿은 머리를 보기가 어렵습니다만 6, 70년대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참빗으로 머리빗고 동백기름 바른 반지르한 머리채의 할머님, 어머님 모습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아끼던 금비녀는 자녀들의 학자금으로 바뀌고 대신 백동비녀를 지른 어머님도 계셨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보내신 세대의 모든 분들이 한없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복숭아와 포도를 보면 유난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충북 옥천에서 복숭아와 포도농사를 짓는 제 윗동서가 생각 납니다.

젊을때는 객지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귀농을 하여 10여년째 과수 농사를 짓고 있지만 '소득은 별로 없다'는 말을 합니다.

소득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농사가 잘 되면 가격이 폭락하던지 자연재해를 입기 때문이지요. 

쉬운 말로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라는 말들을 합니다만 농사일 만큼 힘들고 기대수익이 불확실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올해도 예외없이 복숭아를 택배로 보내면서 "수확기에 비가 잦아 당도가 작년만 못하더라도 먹어보라"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택배로 보내온 복숭아를 보면서 먹기가 망설여 지고 왠지 가슴이 답답해 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쌀 한 톨, 과일 한 알을 소중하고 감사히 생각치 못한다면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경남 산청의 [즐겁고 행복한 집 짓는] 마을 입구에 있는 돌배나무에 돌배가 가지가 늘어지게 달렸습니다.

제 블로그를 찾으시는 님들의 마음에도 행복이 줄줄이 가지마다 열리기를 바래 봅니다. 

 

즐겁고 행복한 집 짓기

제가 아는 형님의 부탁으로 시골에 계시는 노모를 위한 새집을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경남 산청의 시골 마을이고 오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준 오지마을이라 일 하기가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습니다.

또, 마을길의 경사도가 대략 25도는 되는 경사지의 마을이라 집터를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아 대지를 조성한 마을 입니다.

아랫집의 지붕끝이 윗집의 마당과 대략 비슷한 지형이라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지난 5월 17일, 현장답사시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감나무가 심어진 윗쪽에도 약 30여평의 대지가 숨겨져 있고 윗집의 경계부에도 몇평이 숨겨져 있으며 진입부는 경사지이므로 대지로서의 사용은 불가하고 주차면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윗집은 몇년째 비워져 있으며 아랫집 역시 비워져 있으나 일부를 우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감나무 아래의 슬레이트 지붕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계획입니다. 슬레이트로 개량하기 전에는 초가집이라 짐작됩니다.

  

즐겁고 행복한 일  

새집을 짓기 위해 토벽과 슬레이트 지붕의 방 두칸 정지 한 칸의 헌집을 헐고 측량을 하였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80평의 대지는 윗집에 10여평, 뒷쪽 대나무 숲에 30여평이 숨겨져 있어서 25평의 건물을 앉히기가 버거웠습니다.

4~5미터 높이의 대나무 숲도 일부를 들어내고 2미터 높이의 뒷집 마당도 일부를 들어내어 석축을 새로 쌓았습니다.

9월 12일 부터 작업하여 9월 22일에서야 기초 콘크리트를 타설하였고 추석연휴를 쉬고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토질은 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돌밭이라 굴삭기도 힘들어 하고 간간이 있는 흙은 차진 진흙과 유출수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습니다.

석축의 가장자리를 유공관으로 물길을 돌리고서야 그나마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 얼마나 많은지 대지조성중에 나온 돌로 석축을 쌓고도 남아 반출시켰으며 5인용의 오폐수 합병 정화조 하나를 묻는데도 한 나절이나 걸렸습니다만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일 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노모께서는 "내가 살면 몇년이나 더 산다고 새집을 짓냐! 며 극구 말리셨지만 형님은 "몇년을 살더라도 사는 날까지 좀 편하게 사시다가 나중에 우리가 살지요" 하며 밀어 부쳐서 진행된 일입니다.

"지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 골짝에 새집을 짓는다 하는지 모르겠다." "귀 떨어진 십원짜리 하나 가지고 나가지 않은 넘이....."하는 말은 건축주인 형님의 노모께서 고맙고 자랑스러워 혼잣말처럼 하신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회지에서 사업한답시고 시골의 논 밭 팔고 집터까지 팔아가는 경우가 주변에 허다 하고, 공부 많이 시킨 자식들 일수록 명절에도 잘 찾지 않는게 세태이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사는게 시골의 부모님들이고, 그저 저희들 잘 되기만을 빌고 '늙은이 들이야 그럭저럭 살다가 어서 죽어야지!' 하는 말씀들은 하시지만 어디 속마음이야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호의호식으로 호강은 시켜 드리지 못해도 사람의 도리는 하고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그런 결정을 한 형님이 자랑스럽고 힘을 보태 드리고 싶었습니다.

일하는 이들은 5명 이었지만 구경하는 어르신들이 더 많았습니다.

간혹 지붕이나 계량하고 부분적인 수리는 했겠지만 본격적인 재축은 엄두도 나지 않아서 이만한 일도 구경이 되는가 봅니다.

석축을 쌓은이도 이웃마을 분이라 간혹은 '태클'을 걸기도 거드는 말씀도 하시고 새집짓는 경하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정황이 대강은 짐작되시리라 봅니다만 첨언을 한다면 막걸리통도 있었고 약간의 안주거리도 있었습니다.

약간의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30여년 전에 매설한 마을 상수도 주배관의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어 어르신들께 확인하고 작업을 하였으나 엉뚱한 위치에 매설되어 있어서 파손하였답니다. 또, 당시의 배관과 지금의 배관규격이 서로 맞지 않아 아주 어렵게 복구 하였습니다.

자동차로 30여분의 거리를 "OO마을 집 짓는데"로 배달하는 중국집도 제게는 별난 경험이었답니다.   

 

무엇보다 농촌이 몰락해 가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웠습니다.

40여호의 마을에 빈집이 태반이고 불과 십여호의, 노인들만이 거주하는 이상한 풍경이 요즘의 농촌이라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느낌은 달랐습니다. 연령층은 50대에서 80대 까지이며 당연히 어린이나 청소년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희망적인 모습은 이 마을이 소속된 면에서는 몇년 전부터 '어떤 종류의 농약도 사용할 수 없다'는 약속을 하여 지금까지 잘 시행해 오고 있으며 [메뚜기 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합니다.

 

평면도와 정면도, 우측면도 입니다.

제 친구가 설계를 하였으나 대지환경이 실제와 상이 하여 약간의 수정이 불가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계획에는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윗집과의 경계가 윗집의 진입로에 걸려 있어서 경계를 다 찾으면 윗집의 진입로가 없어질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약1M를 양보하여 대지를 확보 하였습니다. 윗집의 진입로 부분이고 아랫채인 헛간입니다. 사진 아랫부분의 중간에 경계말목이 심어져 있습니다.

  

감나무 밑에도 위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깍아내어 대지를 확보 하였으며 위치에 정화조도 매설 하였습니다. 깍아낸 잔토가 너무 많아 대지를 약70Cm 높였으며 잔토를 대형트럭으로 12차 반출 하였습니다. 굴삭기는 3일 반나절을 사용했습니다.

대략 100여년은 됐음직한 감나무의 대지 앞으로 나온 가지는 잘라 내었습니다.  

뒷집이 빈집이라 일부의 자재를 뒷집 마당에 올려 놓은 모습입니다. 몇년을 묵혀둔 집이라 잡초며 심지어 잡목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 하수관로에 하수관을 인입하여 매설한 모습입니다. 정화조를 바위를 피해 매설하느라 하수관의 방향이 반듯하지가 않습니다.

 

수많은 정화조를 매설 했지만 꽤 까다로운 작업에 애를 먹었습니다. 정화조의 뚜껑은 주철제로 바꿔 설치했습니다.

 

비어있는 뒷집의 모습 입니다. 안타까운.....오늘의 농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풍경이라 정말 보고 싶지 않은 모습입니다.

걷어낸 슬레이트는 원하는 분들이 있으면 드리던지 아니면 준공시점에 산업폐기물로 반출하기 위해 모아 뒀습니다.

불을 때는 황토방도 한칸 들여야 하므로 구들돌을 따로 모아뒀고 재사용할 생각입니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보기도 싫을 뿐 아니라 더 빨리 훼손되고 노후화 됩니다.  

도시에서는 귀농을 원하면서도 귀농지를  결정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분들이 수만명(귀농관련 인터넷 회원)이나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서로 잘 보완하면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귀농의 체험을 큰 부담없이 미리 해 볼 수 있으므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중간에 태풍 [나미]로 3일을 쉬었고 간간이 한나절씩 비로 쉬긴 했지만 늦게까지, 또는 이른 새벽부터 작업하여 연휴전에 기초를 마칠려고 다 같이 열심히 했습니다. 보여드릴 필요가 있는 사진을 다 찍지도 못한 사정이 그런 연유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은 올릴 수 없겠지만 기초 콘크리트의 모습이나 주변 정황은 다음에 자세히 올려 드리겠습니다. 

  

[보태는 글]

앞으로 진행되는 집 짓는 과정과 모습뿐 아니라 농촌의 풍경이나 어르신들의 모습, 빈집들의 모습등을 가능한 자세히 올리겠습니다.

어르신들은 카메라를 피하시며 "입성이 이런 사람을 머하러!"라며 외면 하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만 차츰 좋아 지리라 봅니다.

빈집들은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 있고 허물어진 곳도 있지만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TV는 유선으로 볼 수 밖에 없으며 인터넷은 당연히 되지 않습니다만 어찌 해볼 생각입니다.

여관도 식당도 없으며 담배가게나 구멍가게도 없답니다.

잠은 건축주의 친척집인 빈집을 사용하고 있으며 식사는 직접 해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재래식의 화장실을 사용하기가 아직은 숙달이 안돼서 좀은 불편합니다만 곧 적응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때 그때의 소요경비나 비용등, 인력수급 현황등을 적당한 시기에 공개할 생각입니다.

혹시 시골이나 오지등에 집을 지으실 분들은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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