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훔쳐보기]의 즐거움

목공예 명장 최일호

세칸 2007. 9. 15. 15:13

목공예 명장 최일호

 

 

전통의 맥 이어온 30년 공예가의 길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요즈음인데, 전통을 고수하며 이조시대 선조들의 목공예 기술의 맥을 잇고있는 우직함이 존경스런 사람이 있다. 목공예가의 이름으로 한가지 분야에서 30년간 묵묵히 땀흘리고 있는 사람.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99-18) 최일호씨를 만났다.

 

목공예와의 인연
Image_View충남이 고향인 그가 전통을 고수하며 이조시대의 목공예 작품을 제작에 열중하고 있는 공방 "이조공예"는 현재 경기도 일산시에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서울 월곡동에서 처음 목공예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소목공의 대가로 꼽히는 故허기행 선생과의 78년 인연을 시작으로 마지막 제자로서 이조목공예의 기술을 전수 받은 장인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일가견이 있던 그였기에 다른사람보다 유달리 목공예 기술을 빨리 습득하며 직업으로서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통공예가로 사는 길은 힘겨운 일이었다. 90년대부터 스승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이조공예의 경영자로 선 이후부터 책임감은 무겁기만 했고, 지금껏 크나큰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정부차원의 지원책 부재와 값싼 가구에만 물들어 있는 소비자에게 전통가구의 우수성과 가치를 알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몇 번이고 그만두고 싶었던 맘을 먹을 만큼의 힘겨운 일이었다.
"공예가로서 명장의 칭호를 얻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입니다. 하지만, 명예만으로는 참으로 힘겨운 세상입니다. 전통공예품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상 여력이 없어, 꾸준한 연구와 제품개발은 꿈꾸기조차 힘든 실정이죠…."
지난 99년 명장의 자리에 올라섰을 때, 지난 30년 가까이의 설움이 다 씻기는 듯 했다. 대한민국 전통의 우수성을 연구하고 보급함에 있어 김대중 전대통령께 칭찬을 받기도 하고 노동부장관으로부터 표창도 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씁쓸하다.

 

스승의 특별한 배려
Image_View허기행 선생의 문하생 가운데는 두 아들도 함께 했었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한치의 많고 적음 없이 동등했지만, 그런데도 허 선생은 당신의 모든 것을 최일호 명장에게 물려주었다. 스승의 가르침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전통목공예품을 만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으니, 허 선생의 뜻에 부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공방운영은 순조롭지 못했다고. 분야별 공정에서 나무구입, 작품완성, 주문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작품을 만들 때는 주로 흑단, 장미목, 화류, 괴목, 참죽, 오동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등 고급 재료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재료비가 적지 않게 들어간다. 최고의 작품에는 최고의 나무가 어울린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여건을 갖췄다고 생각을 해도 현실이 그를 작품활동에만 매진할 수 없게 만든다. 30여년간 목공예분야에 종사하면서 전승공예대전입선, 전국기능경기대회 3위 입상 등 10여 차례의 상을 수상했다.

 

민족성을 나타내는 전통
Image_View그가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한국전통목공예품은 우리나라가 갖는 고유한 주택양식을 쫓는다. 한국주택이 지니는 비교적 좁고 낮은, 검소한 온돌방과 여기에 부속된 대청과 주방 등 제한된 공간 속에서의 평좌생활은 자연히 가구와 장식물에도 독특한 규격과 형식을 낳게 했다. 또 사계절의 차이가 분명하고 한서의 차이가 많은 한국의 풍토에 따라 길러지 고지식한 민족의 특성과 꾸밈새 적은 표현은 너그럽고도 억지가 없는 소박한 조형기질로 나타났다고.
최 명장은 특히 목재바탕의 상감처리로 여성용화장용구를 고급화했고, 은상감기법에 의한 MDF 대용목의 사용으로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했다.
또 전통가구인 문갑, 사방탁자, 삼층장 등을 전통의 맥과 현대의 감각을 접목시켜 독창적인 제작기법으로 목공예품 개발에 노력하기도 했다.
30여년간 나무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다듬고, 깎고, 칠하며 살아온 장인의 손길은 요즘에 들어 더욱 원숙하고 품격이 높아졌다는 평을 듣는다고 한다.

 

 

 


 

 

이조공예 박물관의 꿈
Image_View현재 가장 힘겹게 느끼는 일이 후진 양성이라며 긴 한숨을 내어 쉰다.
지금은 목공예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배우려해도 보수가 적기 때문에 힘든일을 하려하지 않는다. 가끔 한두 명씩 배우러 왔다가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이내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는 가버린다. 그는 지금 목공예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40~50대의 세대 이후로는 맥이 끊기지 않을까 고심하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하는 후배에게 그는 최소한 3~4년 간 목공예작업을 꾸준히 연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야만 목공부, 조각부, 도장부에서 어느정도 목공예 기술에 대해 눈뜰 수 있고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이조공예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 그의 일생의 꿈이다. 박물관을 통해 후손들에게 산 교육장을 마련하고, 먼 훗날 새대를 대변할 전통이조공예작품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