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초기 가구관련 분야에서 일하던 때였다. 유럽의 가구회사에서 받은 CD로 제작된 카탈로그를 하나씩 살펴보던 순간 각각의 상품에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표기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디자이너의 이름이 상품적 가치를 띠고 브랜드화돼 필립스탁, 카림 라시드 등과 같은 세계적인 거장을 육성해내고 있음을 알게 됐다. 왜, 우리나라는 대중들도 아는 가구 디자이너가 없을까.
왜, 우리에게는 이름이 브랜드화된 가구 디자이너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있는 것일까. 가구회사는 있되, 가구 디자이너는 없는 현실의 중심부에는 디자이너의 이름 없이 판매되는 가구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디자이너 이름 꼭 표기해야 하나?
평준화된 기술력 답은 고객 마음 읽는 디자인
기업 또는 조직의 브랜드화에서 조심스레 ‘개인의 브랜드화 시대’로 옮겨지는 사회현상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명의 개인만을 위한 충고가 아니다.
이제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여야하는 시장 환경변화는 덩치 큰 회사라는 조직체가 개인을 상대하는 것보다 범위를 더 좁혀, 1대 소수의 소비자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현명해 보인다.
물건을 사는데 있어 어느 회사 제품이냐(Made in~)가 중요한 시기라면 굳이 디자이너 실명제(Designed by~)는 거론할 의미조차 없어진다. 기능성이 아닌 기호성의 소비시대에서 소비자는 기업 브랜드보다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제품을 선택한다.
이는 각 회사의 제품마다 일정수준 오른 평준화된 기술력이 뒷받침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보편적인 디자인 트렌드 또는 일률적인 한 회사의 디자인 특성으로만 뭉텅이는 사이, 물건이 개인에게 맞춰져야하는 시대에 사는 소비자는 좀 더 선택의 폭이 넓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디자이너 고유성 가구에서 묻어나야
국내 가구회사의 브랜드는 잘 알려져 있다. 그나마 몇몇 가구회사에서 디자이너의 동기부여, 책임감 고취 등의 차원에서 상품 카탈로그나 전시회 등을 통해 디자이너의 이름을 기명하고 있다. A사의 경우 벌써 7~8년째 시행해오고 있는 부분이라고. 도심이나 외각의 가구단지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건 가구 매장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러나 해외 가구 디자이너나 국내 의상 디자이너 등과 같이 대중의 기억 속에 남은 디자이너가 없는 것을 보면, 디자이너 자신의 개인 브랜드화에는 실패한 것 같다. 이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다.
훌륭한 디자인의 가구 또는 그것을 제작하는 가구 디자이너라는 자체에 생경한 낮은 문화적 수준이 첫 번째 원인이며, 우리에게 현대식 가구는 소장해 대물림되는 품목이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에서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디자이너의 역량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디자이너 실명제’는 단순히 상품 안내책자나 간판에 디자이너의 이름만을 명기하는 소극적인 정책이 아니다. 기명된 가구는 디자이너 고유의 창의성과 소속된 그 회사의 디자인 아이덴티티가 결합된 산물임을 밝힌다. 가구제작회사에 소속돼 있거나 프리랜서로 활약하더라도 그 디자이너만의 고유성이 상품에서 읽혀져 디자이너의 이미지와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왜 가구 디자이너가 없는가!
조직화된 시스템 개인 평가기준 불분명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디자인팀을 조직적으로 구성하고 가구를 만드는 프로세스는 이례적이라고 한다. 디자인실이라는 부서에 소속돼 서로간의 협업으로 가구가 제작되는 시스템은 디자이너 실명제 도입이 부딪히는 첫 번째 걸림돌이다.
디자이너 실명제는 개개인의 실력에 더 비중을 두는 제도로, 지금과 같이 조직화된 시스템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실명제를 실시할 경우 이 제도는 디자이너 능력평가의 바로미터가 되는데, 공동체적인 작업방식에서 개개인에 대한 평가기준은 매우 불분명해진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상품개발 과정에서 동료 및 선후배 디자이너 또는 타 부서간의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이뤄지며 이러한 아이디어는 상품에 적용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전담 디자이너가 있더라도 온전히 한 디자이너의 작업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진다.
또 출시된 상품에 있어서도 그 회사의 디자인 정체성을 잘 살려 이미지 메이킹에는 큰 역할을 했으나 판매량은 평균치 정도를 보인 상품과, 그다지 특색 없는 디자인이나 높은 판매율을 보인 상품에 있어서도 평가는 난해해진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이처럼 모든 경우의 수에 적용될 수 있는 ‘명문화된 문서’가 구축된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 구조에서 나타나는 폐단은 디자이너 실명화를 넘어 실무 디자이너의 의욕을 상실시키고, 실무 디자인에 대한 편견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나라 가구회사를 소위 ‘장기판 조직’이라고 사람들은 일축한다.
서울에서 가구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B가구 디자이너는 “어떤 프로젝트가 기획되면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부서의 모든 디자이너가 그 프로젝트에 투여되는데, 노동과 노력, 시간이 필요한 디자인 실무는 거의 과장급에서 끝난다”며 “그 위 직급부터는 관리가 주요업무고, 공로는 부서장에게 돌아가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굿디자인 구현은 짧은 시간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는 나이가 들어서도 실무 디자인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는다.
가구 디자인 경력 5년차인 C디자이너도 “디자이너 실명제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관리직급의 의식부터 바꿔야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는 “우리나라 중간급 이상의 관리자는 실무 디자인은 신참 때나 하는 것쯤으로 터부시하면서도, 언어 구사력, 컴퓨터 사용능력, 참신한 아이디어 개발력 등 능력 있는 20대 신입 디자이너들에게서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라며 “실력이 평가되는 디자인 실명제가 달가운 사람은 소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장기판 조직은 개인이 시장과는 동떨어진 작가주의적인 성향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는 순기능적인 역할도 있다. 문제는 개개인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식 정보시대에서 조직에 묻혀 개인의 능력이 감춰지고 왜곡됨으로써, 디자인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키를 영원히 쥘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가구 디자이너 경영자 마인드 가져야
다른 한편, 개인 공방이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경영자의 입장이 먼저 돼 봐야할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에 기초한 ‘OREN’이라는 브랜드로 급성장의 호기를 맞고 있는 권스샵의 권관 대표는 가구 디자이너들에게는 부족할 수 있는 ‘경영지식’을 지적한다.
그는 “창업 초기, 서울리빙페어를 통해 직접 제작한 제품을 처음 판매할 수 있었는데, 전시 후 많은 주문이 들어왔다. 그러나 마케팅, 판매경로, 영업 등 경영전반을 몰라 어려움은 매우 컸다”고 고백한다.
작년부터 눈에 띄게 거대하고 특색 있는 주제로 개최되고 있는 유명가구 전시회에서는 지금의 소비자들이 어떤 가구를 원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소비자들은 대량생산된 지금까지의 가구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치를 그 가구에서 발견하고 있다.
지금 소비자들의 문화적 수준은 이미 높으며, 상향된 이 시야에서 가구를 찾고 있다. 한 디자이너의 고유성이 묻어나는 가구는 다양하고 고급화된 기호를 가진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가구 선진국에서 입증하고 있다.
출처 : http://www.woodkorea.co.kr/
장영남 기자 chang@wood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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