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집의 의미

세칸 2007. 7. 17. 21:54

   집의 의미 

 

  

 

조선시대 송씨 성을 가진 딸깍발이 선비가 제 집을 팔고 지었다는 시다.

근년 들어 뼈에 저민 가난을 자탄하니
이제는 내 집마저 이웃에게 팔았다네.
동산의 버들에게 은근히 말하노니
훗날 서로 만나보면 남 보듯 하겠구나. 
 
自歎年來刺骨貧  吾廬今旣屬西隣
慇懃說與東園柳  他日相逢是路人
 
아껴 배돌던 뜨락의 버드나무가 저만치 보인다. 보금자리 하나 지켜내지 못한 못난 가장의 심사가 슬프다. 그 집 앞을 지날 때 버드나무가 옛 주인을 못 알아보고 길 가는 사람 보듯 할 것이 그는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이 시를 본 새 주인이 그만 마음이 짠해져서, 집을 도로 송씨에게 돌려주고 그의 빚까지 갚아 주었다는 미담이 함께 전한다. 
 
일제 때 근원 김용준의 집에 감나무 두 세 그루가 서 있었다. 해묵은 그 감나무를 아껴 그는 집 이름조차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지었다. 뒤에 형편이 어려워져 벗에게 집을 팔았다. 그는 자신의 손 때 묻은 감나무와 정원의 꽃나무를 잘 보살펴 달라는 당부만 남기고 정든 집을 떠났다. 
 
사람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집은 시간의 흔적으로 한 켜 한 켜 쌓아올린 기억의 탑이다. 아껴 만졌던 나무가 있고, 들창을 열고 바라본 하늘이 있고, 그 그늘에서 나고 자란 자식의 기억이 차곡차곡 서린 곳. 
 
추사의 글씨에 이런 글귀가 있다. “소창다명(小窗多明) 사아구좌(使我久坐).” 작은 창이 볕이 좋아 자꾸 오래 앉아있게 한다는 말이다. 명창정궤(明窗淨几), 즉 볕 드는 환한 창과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책상은 집 주인의 높은 품격을 나타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방이래야 발 뻗으면 벽이 닿는 좁은 방이었으되, 그 속의 우주는 참으로 광대무변하였다.
 
자식은 새벽녘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 가락은 오래 동안 사무쳐서 잊히지 않는 노래가 되었다. 각별히 호사스럽지 않았어도 정신의 향기가 있었다. 그때라고 왜 지금처럼 집 호사에 정신 팔린 사람이 없었겠는가? 고래등 같은 기와에 기화이초가 눈을 놀래키는 집을 그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역사의 소중한 발자취는 그런 집에서 나온 적이 없다. 두간모옥(斗間茅屋)의 볕바라기 책상 맡에서 다 나왔다. 
 
사람들은 환전가치로만 집을 말한다. 집 값 오른 소식에만 일희일비(一喜一悲) 할 뿐, 보금자리 삶터로서의 집 생각은 잊은 지 오래다. 새로 살 집 마당에 해묵은 노송 한 그루가 있대서 두말 않고 부르는 값을 다 주고, 소나무 값으로 웃돈까지 얹어주고 그 집을 샀다던 18세기 김광수(金光洙)란 이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난다. 
 
윗글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의 옛글 공부방[옛글의 뜻과 정]-글 읽기
[글 읽기]에서  담아 왔습니다. http://www.hykorea.net/korea/jung0739/
 
어느 저명한 건축가가 전원주택의 설계를 의뢰받아 그 땅의 지형적 특성과 환경을 고려한 여러장의 기본 계획안을 건축주에게 보여주고는 어떤게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따로 생각하는 디자인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건축주는 고개만 갸우뚱 하더랍니다. 건축가는 이런 부류의 건축주를 이미 여러차례 보아왔던 터라 벽에걸린 스위스목장의 사진이 인쇄된 카랜다를 가리키며 저런 집은 어떤가요? 라고 하자 "바로 저겁니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간혹, 전원주택을 짓고 싶다는 분들중에 60평이상 80평 쯤은 되어야 친지나 친구들이 와도 불편하지 않을것이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좀은 가진자에 속하기도 함을 은연중 비추는 그런 언질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도시의 대형 아파트도에 살고 있는 분들이 식구가 많아서 대형평형에 사는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 넓은 면적이 뭐에 필요한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경치좋은 전원에, 큰집 짓고 정원 잘 꾸며놓고 친지나 친구들 큰차 타고 드나들게 하면서 고기굽는 냄새를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다면 잘 사는 걸까요?  삶의 질이나 행복 지수가 집의 면적에 비례한다고는 생각 할 수도 없고 그리 되어서도 안되겠지요. 도시를 되돌릴 수도 없이 망쳐버리고 훼손시킨 천민적 자본사고가 시골과 전원으로 대표되는 자연까지도 절단내는 사고라는 걸 아셔야 할 겁니다. 
 
전원에서의 좋은 집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는건 가당찮은 짓이지만 크지 않아야 한다는건 틀림없지 싶습니다. 속해있는 지역의 자연에 안길 수 있는 크기, 있는 듯 없는 듯한 수수함, 그래서 자연과 닮아있고 자연을 거스러지 않게 계획된 집이라야 좋은 집의 첫번째 요건에 맞다 할 것입니다.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이나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개성이나 남과 다른 차별을 내세워 특색있는 집을 짓고 싶어 합니다. 이런 분들은 도시에서 마음껏 개성과 차별을 강조한 특색있는 집을 지어 살면 될것이지 굳이 시골이나 전원에서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시골이나 전원은 자신을 내세우기 보다는 자신을 버리고 '자연에 안겨살기' 위해서 라야  그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고 웰빙이니 로하스, 친환경이니 환경생태라는 신조어나 용어를 쓰면서까지 표현할려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전원 생활을 즐기기 위해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중에 온몸을 감싸고는 농약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농약이 나쁜줄은 너무 잘 알기에 몸을 노출 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 정성을 다하여 가꾼 작물이 병들어 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안타까움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물이 병드는 이유가 농약때문일 수 있음과 농약살포의 악순환이 더 큰 폐해가 됨은 알려고도 않습니다. 
 
집의 의미는 삶의 의미 일 수도 있습니다. 전원에서 집을 지어 살고 싶은 분들이 조금은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저의 생각일 뿐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태클'은 정중히 사양하겠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