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인생에 귀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일

세칸 2007. 7. 17. 01:33

흑산도는 아니지만 거문도의 일출모습입니다. 안개속에서 등대위로 솟는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글

   인생에 귀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일

 

황상(黃裳)은 나이가 지금 몇이던가?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어진 이의 이로움이 어찌 넓다 하지 않겠는가? 이리로 오려는 마음은 내 마음을 상쾌하게 하네만, 뭍사람은 섬사람과 달라 크게 긴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경솔하게 큰 바다를 건널 수가 없을 걸세. 인생에서 귀하기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니 어찌 꼭 얼굴을 맞대면해야만 하겠는가? 옛 어진이 같은 경우도 어찌 반드시 얼굴을 본 뒤에야 이를 아끼겠는가? 이 말을 전해주어 뜻을 가라앉혀 주었으면 좋겠네.
모름지기 더욱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재주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금 세상에는 인재가 드물어 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우니, 결단코 마땅히 천번 만번 아끼고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일세. 애석하게도 그 신분이 미천하니 이름이 난 뒤에 세도 있는 집안에 곤핍 당하는 바가 될까 염려되는군. 사람 됨됨이는 어떤가? 재주가 많은 자는 삼가고 두터움이 없는데, 그의 문사를 살펴보니 경박하고 안일한 태도가 조금도 없어 그 됨됨이를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네. 부디 스스로를 감추고 무겁게 하여 대인군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권면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 섬에도 몇 명의 부족한 아이들이 있는데, 간혹 마음과 생각이 조금 지혜로운 자도 있다네.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이라곤 《사략》과 《통감》을 벗어나지 않고, 마음으로 바라는 바는 병교(兵校)나 풍헌(風憲)이 되는 것을 넘지 않는다네. 게다가 사람들이 모두 가난해서 온 섬 가운데 편히 앉아 밥 먹는 사람이 없고 보니 이러고서야 오히려 무엇을 바라겠는가?
편지 보내는 사람과 같이 잠을 자면 내 근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일세. 잘 대접해 주면 고맙겠네. 물건으로 정을 표해도 좋겠으나 어찌할 수 없을 듯 하이. 노자 외에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 들 터이니, 그저 서너 전쯤 쥐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 적지 못하네. 병인년(1806) 3월 초 10일 둘째 형 씀.
 
  흑산도에 유배 가 있던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강진 유배지에 있던 동생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의 내용은 다산의 제자인 황상(黃裳, 1788-1863?)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산에게서 공부하던 황상은 형제간에 오간 편지와 스승에게서 들은 정약전의 이야기를 듣고, 멀리 흑산도로 정약전을 찾아가 배움을 청할 결심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간 지은 글과 편지를 흑산도로 보내 찾아뵙기를 청했던 듯 하다.
정약전은 황상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월출산 아래 시골 촌구석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로 그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뭍사람이 험한 한 바다 길을 건너는 것이 쉽지 않고, 꼭 얼굴을 마주해야만 서로 만나는 것은 아니란 말로, 동생에게 그의 흑산도행을 만류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다산이 황상을 처음 만난 것은 귀양 온 이듬해인 1802년 10월의 일이었다. 몇 명 아전의 자식들이 강진 읍내 주막집 문간방에 머물던 다산을 찾아와 배우고 있었다. 황상은 그 뒷자리에 끼어 앉아 있었다. 다산은 자신감 없이 구석에 앉아있던 그를 따로 불러 오직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 부지런히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감동적인 글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 황상은 그 글을 받고서 감격했다. 이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위 정약전의 편지는 그로부터 3년 반 뒤에 쓴 것이다. 쭈볏쭈볏 스승 앞에 나아가 “선생님! 저 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하고 물었던 그 소년이, 불과 3년 반 만에 월출산 아래 이런 문장이 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감탄을 들을 만큼 훌쩍 성장해버린 것이다. 정약전은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다고 편지에서 적었다.   
황상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산방에 틀어박혀 일삼는 바라고는 오직 책을 베껴 쓰고 읽는 일 뿐입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말리면서 비웃습니다. 이들의 비웃음을 그치게 하는 것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 날마다 글 쓰는 것을 일로 삼으셔서 복숭아 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습니다. 내게 ‘삼근(三勤)’의 훈계를 주시며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부지런히 해서 이를 얻었다.” 몸소 가르쳐주시고 입으로 전해주신 가르침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귀에 생생합니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핍절한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 편지글 한마디로 정약전이 그토록 칭찬한 황상의 사람됨을 볼 수가 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황상은 이미 70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쉴 새 없이 책을 베껴 쓰고 소리 내어 읽는 그를 보고, 그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사람들이 말리면, 그는 우리 선생님은 복숭아 뼈에 세 번 구멍이 뚫리도록 공부를 하셨다. 그 가르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데 죽기 전에야 어찌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정약전의 편지글 위에는 작은 글씨로 쓴 황상의 친필 메모가 보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것은 선생님의 둘째 형님께서 나주 흑산도에 귀양 가 계실 적에 쓰신 편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편지의 내용이 온통 네 이야기로 가득하고, 또한 둘째 형님의 친필이니 네 거처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여기에 합첩한다.

다산은 형님의 당부를 전하면서 편지까지 함께 황상에게 주었다. 온통 네 이야기 뿐이니 기념으로 간직하거라. 황상은 이를 소중하게 보관해서 스승이 그에게 준 다른 글과 함께 하나의 첩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형제간의 아름다운 우애와 사제간의 흐믓한 정을 되새기게 해준다.
 
윗글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의 옛글 공부방[옛글의 뜻과 정]-글 읽기
[옛편지 읽기]에서  담아 왔습니다. http://www.hykorea.net/korea/jung0739/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글 읽는 즐거움을 민끽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말을 한다면 제가 너무 천박 하겠지요?

자신의 처지도 삭막했을 터인데, 신분을 뛰어넘어 다른이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 됐을까요? 

스승도 제자도 없는 시대라고 쉽게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 왜 스승과 제자가 없겠습니까만 스승이나 제자다운 이가 더물고 귀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고 반성 합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다른이의 허물이 자신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듯 합니다.

배려하고 격려하는 가운데서 건전하게 국가 경영의 철학을 물을 수는 없는지.....부질 없는줄 알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이도 인정해야 비로소 자신도 인정 받을 수 있음을 모르지 않겠지만 실천하는 마음을 내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지금 우리의 한계가 이 정도임이 답답하고 민망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