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이 아닌 시골생활 즐기기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어느 유명한 건축가 한 분은 남진의 노래 〈임과 함께〉에 저주를 퍼부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원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 땅과 환경을 고려하여 열심히 설계를 해가면 내내 도리질을 치다가, 달력에 나올 법한 서구의 주택 사진을 보여주면 얼굴이 환히 펴지면서 “내가 원한 게 바로 그겁니다!” 한단다.
글쎄, 대중가요사 연구자로서 보자면 이 이미지는 남진보다는 비슷한 시절에 유행한 번역곡 〈언덕 위의 하얀 집〉에 가까울 듯하다. 아무리 남진이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도 그 노래에서 서구식 단독주택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임과 함께’이건 ‘언덕 위의 하얀 집’이든, 지금의 주택 주문자들의 머릿속을 장악한 이미지는, 초원 위에 놓인 하얀 집임은 분명하다. 비슷한 시기 유행한 이석의 〈비둘기집〉의 이미지도 그것이다. 나무 혹은 벽돌로 지은 집과 삼각지붕, 초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잔디 깔린 정원이 있고, 거실은 통창이 달려 발코니로 연결되어야 한다. 정원에서 현관문으로는 아치 모양의 구조물에 넝쿨장미가 피고, 울타리는 〈톰소여의 모험〉에서 나올 법한 나무판자 울타리여야 한다. 다락방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거실에 벽난로까지 놓인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일산을 비롯한 고양이나 양평의 이른바 전원주택들이 다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이 왜 남진의 노래 탓이랴! 광복 후 성장하여, 이전 세대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욕망 대신 서구식 생활양식을 열렬히 욕망하며 살아온 새로운 세대들이, 그래서 젊은 시절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좋아하며 성장했던 세대가, 이제 주택을 주문할 수 있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은 못 살 곳이야’, ‘정말 떠나야 해’라고 말하는(정말 그들이 서울 탈출을 소망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집을 꿈꾼다. 이런 집에서는 도시의 매연 없이 친환경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들 한다.
이런 꿈을 따라 과감히 도시를 떠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지만, 정작 서울을 떠나도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시골생활을 십년 넘게 해본 내 경험이다. 잔디를 그렇게 가꾸려면 잡풀 뽑고 물 주느라 허리가 휘고 무엇보다 농약을 뿌려야 한다. 시골생활에서는 온갖 연장이나 농기구, 청소용구, 채반이나 바구니, 비료부대 등 온갖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를 모두 끼고 살아야 하지만, ‘그림 같은’ 깔끔함을 원한다면 많이 버리고 필요할 때마다 대형마트에서 사오게 된다. 코앞에 슈퍼마켓이 없으니, 웬만한 야채를 가꿔 먹는 수고로움과 구질구질함이 싫으면 역시 대형마트의 식품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살림보다 훨씬 더 많이 사고 많이 버린다. 넓은 통창이 멋져 보였지만 살아보니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윈도 속에서 사는 것 같아, 옆집과 괜한 신경전을 벌인다. 이전엔 깨끗했던 하천이, 자기 집의 수세식 화장실과 합성세제로 오염된다.
이런 삶은 도시로부터의 탈출도 아니고 친환경적으로 잘사는 것도 아니다.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꿈꾸는 사람들의 바람은 ‘시골생활’이 아니라 ‘전원생활’이고, ‘참살이’가 아니라 ‘웰빙’이었기 때문이다. 산투성이인 우리나라에서 가당찮게 ‘초원’을 그리거나, 이웃과 교류할 마음도 없으면서 낮은 울타리를 꿈꾸는 것처럼, 이 꿈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참살이 시골 삶이란, 단지 거주지역을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도시적 삶을 포기하고 한국의 산과 들과 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사는 이야기 > 이런저런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집을 지어주게 (0) | 2007.07.17 |
---|---|
인생에 귀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일 (0) | 2007.07.17 |
도시인 소원은 텃밭 한뙈기? (0) | 2007.07.14 |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일! (0) | 2007.07.09 |
감동적인 [姑婦間의 마음씀] (0) | 2007.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