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칸의 사는 이야기

如初 金膺顯 선생님!

세칸 2007. 2. 2. 20:59

 

 

 

여초 김응현 선생님께서 별세 하셨다는 비보를 접 합니다.

우리나라 서예계의 '큰어른'이시자 독보적 '실력자'이신 선생님께서 돌아 가셨답니다.

 

 

‘서성’으로 불린 20세기 한국서예 최고봉

발자취 서예가 김응현씨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1일 별세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80) 선생은 한국 서단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21세기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힌다. 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동생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 과 함께 형제 서예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중국에서 전해 온 모든 서예의 장점을 흡수하고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와 같은 모든 서체들을 연습해 그 정화(精華)를 흡수한 뒤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1956년 결성된 ‘동방연서회’를 중심으로 펼쳐 온 그의 필치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여초 김응현 선생이 지난 2000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앞두고 글씨를 쓰고 있다. 

 

여초는 한국전각학회 회장과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월간 ‘서법예술’을 창간하는 등 서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94년엔 전 10권 분량의 방대한 서예 교본인 ‘동방서범(東方書範)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동양 서법사의 대표적인 문헌과 금석문 중에서 각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만 골라 직접 글씨를 썼다. 동방 서체의 백미로 꼽는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수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비문 일부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게 있어 고심 끝에 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서예 철학은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루면서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서예란 모범이 되는 글씨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법첩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려놓고 거기 비친 글자대로 붓질을 하는 과정을 선인들이 중시했던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는 것이다. “요즘은 초보자라도 근본은 생각하지 않고 덮어놓고 창작만 하려 하니 큰일”이라 한탄하기도 했다.

 

논어‘술이’(述而)편을 써내려간 여초의 서예작품. 

 

그의 인생에 큰 시련이 닥친 것은 지난 1999년 5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오른쪽 손목 골절상을 입었다. 그는 “매일같이 붓을 들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좌수(왼손)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설악산에서 3개월을 단련한 끝에 잔 기교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한 경지를 보였다. 이후 오른손은 완치됐기 때문에 그의 왼손 글씨는 2000년 6월 단 한 번의 전시회로 끝났다.


1993년부터 설악산에 머물면서 창작 활동을 해 왔던 그는 2004년 건강 악화로 붓을 놓기 직전까지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2월 ‘여초 김응현 작품 개인소장품’ 전시 참석을 위해 조선일보 미술관에 들른 그는 자신의 작품 117점을 둘러보며 “그 동안 내 업적에 의문이 많았는데 이만하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친형인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입력 : 2007.02.02 00:18 / 수정 : 2007.02.02 00:23 [조선일보] 2007년 2월 2일자 A26면

 

 

여초 김응현 선생님을 처음 뵌것은 '80년대 중반 입니다.

인사동 '동방연서회' 4층 서실에서 회원들에게 특유의 어법으로 강의 하시는 모습을 처음 뵈었습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연서회 회원인 친구를 따라 갔다가 엄청난 카리스마와 고집불통인 모습에 반했습니다.

 

선생님의 서재에 책장을 짜 맞춰 드리고 작품을 한점 얻었는데, 그때의 감격은 이루말 할 수 없었습니다.

은근히 작품을 얻을 심산으로 일을 추진 했는데, 나중에 돈으로 주신다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서예를 하시지만 전공은 영문학을 하셨답니다.

연서회 3층 서재엔 발디딜 틈도 없다할 정도로 책과 자료들 , 각국에서 보내온 포장품(미개봉 소포)이 많았습니다만

글씨외엔 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작품을 친구를 통해 보내 주시면서 '짐 정리 잘 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덧붙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써 주시겠다는 말씀도 덧붙였 습니다.

그렇게 엄하셨어도 속 마음은 따뜻하신 분이란걸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엔 선생님의 작품집과 서첩들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많은 말은 선생님의 업적에, 크고 높은 예술혼에 '사족'이 될 뿐 입니다.

 

반주로 즐기시던 '죠니워커 블랙'을 한번 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술을 즐기 시고도 붓을 잡으시는 것을 보면 신의 경지나 달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경지 겠지요.

 

삼가 선생님의 영전에 업드려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좋은데 가시기를..... 흘�섟� 시기하는 이들 없는 곳으로 가시기를 빕니다.

후학들은 선생님의 넓고 큰 그늘에서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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