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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인간과 자연의 통로] 발왕산의 숲

세칸 2008. 2. 2. 01:41
[숲, 인간과 자연의 통로] 발왕산의 숲

정상 바로 밑 거제수나무 눈길… 사방 조망도 뛰어나
야광·단풍·신갈·잣나무 등 다양한 식물 군락 이뤄

 

발왕산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봉산리와 도암면 용산리, 수하리에 있는 해발 1,458m 높이의 산이다. 더 쉽게 말하면 용평리조트 정상에있는 산이다. 산의 이름은 옛날 발왕이와 옥녀가 사랑을 속삭였다는 전설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정상 아래 여러 골짜기와 산기슭에 펼쳐진 거제수나무 숲이 눈을 끈다. 또한 정상의 주목과 분비나무 숲, 그리고 남동쪽에 펼쳐진 산들이 자아내는 경관이 아름답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엔 다양한 나무들이 있으며, 그 나무들의 유래도 또한 제각각이다.

새해는 항상 설렌다. 새롭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무언가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정비결을 보고 새해인사를 하면서 기대와 희망 속에서 덕담을 건넨다.

 

<좌> 분비나무 잎. / <우> 곤돌라 종점에서 정상가는 길에 있는 관목 숲이 설경을 연출하고 있다.  

 

새해 무렵에는 하는 것이 또 있다. 산을 오르는 일이다. 파란 하늘과 그 아래에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며 산의 외침을 듣고, 깊게 가라앉은 골짜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사이에 늘어선 나무들의 전설에 귀 기울이면서 숲의 고요함과 정적에 한 번 묻혀보자. 이윽고 숲의 정기로 가슴에 와닿는 마음으로 새해를 설계하고 다짐을 하여보자.

 

곤돌라 종점에서 정상 가는 길에 있는 야광나무.  

 

1월에 오르는 산은 좋은 산이다. 언제나 산이 좋듯이 어느 산을 올라도 좋다. 새해에 대한 각오와 느낌이 있는 나무와 숲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다 좋다. 그럴 만한 산으로 발왕산을 소개한다. 겨울에 발왕산을 오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용평리조트에 와서 정상에 오르는 곤돌라를 이용하는 것이다. 리조트이기 때문에 주차는 무료다. 평상시에 정상으로 오르는 길 중 하나가 스키 슬로프로 된 곳인데, 스키 시즌에는 스키어들과 충돌할 우려가 있어 안전 상 걸어 오를 수 없으니 곤돌라를 타도록 한다. 정상까지는 직선거리로 3.7km인데 보통 20분 정도 소요된다. 곤돌라를 타고 오르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어서 좋고, 나무와 숲의 모습을 공중에서 살펴볼 수 있어 좋다.

곤돌라 종점에 도착하여 건물 밖으로 나오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으로는 태기산, 오대산 비로봉, 계방산, 설악산, 황병산이 멀리 보이고, 남동쪽으로 백봉령, 두타산, 노추산, 정선 아우라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특히 높고 낮은 산들이 엷은 안개에 묻힌 채 원경, 중경, 근경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하며 보이는 남동쪽 경관이 일품이다. 

 

곤돌라 종점 주변 매발톱나무도 눈길

발왕산 정상은 곤돌라 종점에서 빠른 걸음으로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며 이미 오래 전에 쌓인 눈으로 묻혀 있다. 숲길 가에는 야광나무, 거제수나무, 단풍나무, 신갈나무, 잣나무, 주목, 분비나무, 진달래들이 서있다. 산 위여서 그런지 바람이 세차다. 곤돌라에서 나온 지 불과 몇 분 안됐는데 금방 코끝이 얼얼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허리처럼 잘록한 부분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 서있는 표지판에는 주변일대가 주목과 분비나무의 보호지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정상에 이르는 좁은 길은 주목과 진달래와 같은 관목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이외에도 정상 주변에는 허옇게 기공선을 드러낸 잣나무며 구상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 서서 이들을 발 앞에 앞세우고 먼 산을 바라보는 풍광이 장관이다.

 

1 한데 어울린 구상나무와 분비나무. / 2 겨울 진달래의 암술머리.  

 

이곳에 서 있는 잣나무의 마디를 세어보니 30년생 정도인데, 키는 고작 2.5m 안팎이다. 한 마디가 자란 길이가 길어야 10~15cm이고 거의 4~5cm씩밖에 되지 않는다. 보통 50~60cm 이상 자라는데, 그에 훨씬 못 미친다. 혹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육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주목(朱木)은 줄기의 속살이 붉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영어로 yew, 학술명으로는 taxus라고 한다. taxus란 'taos', 즉 활(弓)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유래한다. 탄력 있는 나무여서 예부터 활로 많이 써왔다. 영국의 로빈후드가 주목으로 만든 활로 숲속에서 의적 생활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줄기 빛이 붉기 때문에 주술적인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높은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 입고 가던 조복(朝服)에 맞춰 손에 들고 가던 패를 홀(?)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 재료를 상아로 썼지만 상아가 흔하지 않던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목을 사용했다고 한다.

 

1 촘촘히 자란 나무 마디가 이채롭다. / 2 매발톱 열매들. / 3 매발톱나무 가시.  

 

재질이 단단하고 빛깔이 붉기 때문에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쓰임새 때문에 일본에서는 주목을 으뜸가는 지위를 뜻하는 일위(一位·이치이)라고 부른다.

주목이 사악한 무리를 물리친다는 신화적 주술적 이야기들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공통점이다. 독일어로 아이베(Eibe)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원(iwa, ewa)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늘 변치 않는 짙푸른 잎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를 물리친다고 믿어서 켈트족을 조상으로 모시는 영국이나 아일랜드 등지에서는 중세부터 묘지 앞에 주목을 심어왔다.

또한 심지어 시신을 싸는 천속에 주목가지를 넣기도 하였다. 열매는 먹기도 하고 약으로 쓴다. 독이 함께 들어있어서 삶과 죽음을 가르고 지키는 주술적 의미와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르만족들은 ‘하느님의 나무’(G"tterbaum)로 믿었다. 이처럼 사단을 물리친다는 믿음 때문에 독일어권 성당 안의 정원(Hof)에는 침엽수를 대표하는 상징목으로 주목이 심어져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나무는 삼국시대 중반쯤부터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정선 두위봉의 1,400살 먹은 나무다. 이 나무가 바로 주목이다.

 

곤돌라 종점 앞에 있는 주목은 삭풍에 한 쪽은 모두 말라죽었다. 한 쪽이 죽으면 사람 같으면 반신불수이지만, 주목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그것이 주목의 삶인가 보다. 이처럼 주목은 붉은 빛으로,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모양새로 주목받는다. 수형이 아름답기 때문에 바로크시대에는 이 나무가 정원 풍경의 ‘모델나무’였다고 한다. 지금도 웬만한 큰 기념행사에서는 주목을 기념수로 심고 있다.

추위에 못 이겨 다시 곤돌라 종점이 있는 대피소로 돌아오는데 매발톱나무가 발길을 가로막는다. 키가 2m쯤 자라고 꽃은 4~5월경에 노란 색으로 피며, 열매는 9~10월에 밝은 붉은 빛으로 익는다. 가지에는 구두주걱 모양의 잎들이 여러 개의 부채를 펼친 듯 마디에 둥글게 달린다. 길이 2cm 안팎의 가시가 3개씩 달려있다. 그 모양이 매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달려 있기 때문에 나무의 이름이 생겨났다.

 

1 주목의 줄기색 모양. / 2 정상 바로 밑에 붉은 빛을 띤 거제수나무 숲이 때마침 내린 눈으로 아름다운 설화를 뽐내고 있다. / 3 정상 주변에 있는 분비나무들. 

 

한자어로는 소벽(小蘗)이라고 한다. 벽이란 황경나무, 혹은 황벽나무라는 뜻 외에 ‘쓰다’라는 뜻이 함께 담겨있다. 그런데 왜 쓰다고 했을까? 쓰기보다는 시다는 표현이 맞을 텐데…. 빨갛게 익은 열매가 날카롭게 돋아난 가시와 가시 사이에 매달려 있는데, 붉은 열매가 햇살에 더욱 투명하게 빛난다. 색깔이 아름다워 맛이 어떨까 호기심에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어보니 개미산을 먹을 때처럼 미뢰를 톡 쏘는 맛이 대단히 시큼하다. 칵테일이나 차에 넣어 마시면 일품일 것 같다. 신맛을 좋아하는 내 입에는 대단히 자극적이어서 좋다. 몸의 악한 기운들이 이 신맛에 매발톱에 채인 채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다. 적은 양으로도 대단히 자극적이다.

이렇게 시디신 매발톱나무 열매를 새들도 좋아할까? 그렇다면 새들은 이처럼 독한 신맛을 느낄 때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다.

 

자작나무는 하얀 줄기로 사계절 숲 밝혀

대피소 2층에 있는 식당은 전망이 좋다. 동쪽 능선에 지느러미처럼 늘어서 밝게 빛나는 나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이곳은 겨울 산행에 손발이 얼고 온몸이 얼어붙은 나그네들의 안식처다. 뜨겁고 따뜻한 커피는 언 몸에 최고다. 다방 커피보다는 원두커피를 마셔야 추위를 한 꺼풀 두 꺼풀 가시게 하는 데 더 멋스러울 것 같다.

내려오는 곤돌라 발밑으로는 잣나무, 소나무, 참나무류 무리들이 눈속에 줄기를 박고 서있다. 무엇보다도 군데군데 독립수로 서있는 거제수나무의 잔가지들이 자아내는 붉은 빛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비탈진 산기슭에 곱게 물결 모양을 이루듯 잔잔히 서있다.

 

1 반신불수의 주목. / 2 거제수나무 가지들. / 3 흰 빛을 띤 자작나무 줄기. 

 

거제수나무는 낙엽이 지는 키가 크게 자라는 나무다. 높은 산에 많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만주, 아무르 지방에도 많이 자란다. 줄기가 희뿌옇고 잔가지는 불그스름하다. 이 나무는 자작나무, 박달나무, 오리나무와 같이 자작나무과에 속한다. 대장격인 자작나무는 한자로 백화(白樺), 거제수나무는 황화(黃樺)라고 부른다. 자작나무는 줄기가 희고, 거제수나무는 희면서 약간 누런 빛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화(樺)는 화촉, 촛불의 뜻이니, 자작나무는 하얀 촛불, 거제수나무는 노란 촛불인 셈이다. 그런데 이 나무들이 왜 촛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까. 나무껍질이 붓글씨 쓸 때 쓰는 미륭지처럼 얇게 갈라지며 기름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예부터 불을 밝히는 데 많이 써왔기 때문이다.
거제수나무라는 다소 낭만적이고 이색적으로 들리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去災水(거재수)라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라는 설명이 전해온다. 즉, 수재, 화재 등 재앙을 없애는 물을 가진 나무라는 뜻이다. 이 나무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나무들은 기지개를 펴고 땅속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물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특히 자작나무 무리에 속하는 나무나 단풍나무 무리에 속하는 나무들이 그렇다. 수액이 건강에 좋다하여 이른 봄 남쪽으로부터 수액이 많이 채취되는 곳에서는 등산인구와 건강식객들이 넘쳐난다는 소식을 듣는다. 거제수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면 수액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특히 곡우(穀雨)에 이 수액을 마시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줄기가 하얀 자작나무는 사계절을 통해서 아름답게 숲을 밝히는 자태를 지니고 있다. 서양에서는 숲속의 주인, 숲속의 여왕 등으로 부르고 있다. 거제수나무도 줄기 빛깔이나 나무 생김새가 자작나무 못지않으니 자작나무를 숲속의 여왕이라면, 이 나무는 ‘숲속의 공주’쯤으로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두 나무를 ‘숲속의 남매’로 불러도 좋겠다.

 

무자년 새해 정월에 발왕산을 찾으면서 거제수와 주목, 매발톱나무를 만난다. 재앙을 물리치고 사악한 무리를 멀리하면서 자기가 속한 자리, 직장에서 일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매발톱나무의 가시처럼 매섭게 노력하여 남들에게 짜릿한 신맛을 보여주자고 다짐해 보자.

 

찾아가는 길
자가용으로 갈 경우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제일 편리하다. 영동고속 도로 횡계 나들목으로 나와 우회전해 456번 지방도를 타고 용평리조트쪽으로 간다. 용평주유소를 지나면 횡계 시가지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계속 오른쪽 우회로를 따라가면 용평GC(골프코스) 안내판이 있는 큰 사거리를 만난다. 직진하면 강릉 방향이지만 우회전하여 4km쯤 달리면 리조트 정문이다.

 


정문에서부터는 계속 주진입로를 따라 들어가서 안쪽 깊숙이 주차한다. 리프트 매표소에서 곤돌라 표를 사서 매표소 밖으로 나와 오른쪽 곤돌라 승강장으로 간다. 입구로 들어오는 길가에서부터 리조트 안의 자작나무 가로수가 일품이다.

김기원 숲과 문화연구회·국민대 산림자원
kwkim@kookmi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