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
- 詩로 읽는 세상사
- 아들·딸에 버림받은 노모 경찰서에서도 자식 걱정
- “내가 오래산 게 죄지 자식들은 죄가 없어”
illust 권오택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김형영의 ‘따뜻한 봄날’에서
한평생 험한 노동일로 등이 휜 아버지에게 철부지 아들이 또 손을 벌린다. 아들은 아버지의 오막살이 집을 잡혀서라도 돈을 내놓으라 한다. 어른이 돼서도 고단한 아버지에게 자꾸 기대는 아들이다. 아버지는 참다 못해 손으로 방바닥을 내려치며 한바탕 야단을 쳐 본다.
‘뭐 집을 잽혀야 쓰겄다고 아나 여기 있다 문서허고 도장 있응게 니 맘대로 혀봐라 이 순 싸가지 없는 새꺄 아 내가 언제 너더러 용돈 한 푼 달라고 혔냐 돈을 꿔달라고 혔냐 그저 몇 날 안 남은 거 숨이나 깔딱깔딱 쉬고 사는디 왜 날 못살게 구느냔 말여 왜! 왜! 왜! 아버지 지가 오죽허면 그러겄습니까 이번만 어떻게… 뭐 오죽허면 그러겄냐고 아 그렁게 여기 있단 말여 니 맘대로 삶아 먹든지 고아 먹든지 허란 말여 에라 이 순…// 그날 은행에 가서 손도장을 눌러 본인 확인란을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막걸리 한 잔 먹고 헌 말은 잊어버려라 너도 알다시피 나도 애상바쳐 죽겄다 니가 어떻게 돈을 좀 애껴 쓰고 무서운 줄 알라고 헌 소링게….’(강형철 ‘아버님의 사랑말씀 6’)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미워하지 못한다. 도리 없이 아들 말을 들어주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의 음성은 한결 누그러져 있다. 아버지 심정을 이해해 달라며 오히려 아들을 달랜다. 우리 속담에 ‘부모 속에 부처 있고 자식 속에 앙칼 있다’고 했다. 자식들이 아무리 모질어도 부모는 결코 자식을 원망하지 않는다.
미국에 ‘부메랑 자녀’라는 말이 있다. 독립해 나가 별 소식도 없이 살다 돈이 궁할 때만 부모를 찾아오는 나이 든 자식을 이른다. 연전에 행정수도 이전 예정지가 발표되면서 한국판 ‘부메랑 자식’들이 무더기로 생겨난 일이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행정수도가 된다고 땅값이 치솟은 충청 시골에 갑자기 ‘효자’가 늘었다고 보도했다. 어느 마을 이장은 “어쩌다 명절에나 얼굴을 비치던 자식들이 갑자기 틈만 나면 손자 손잡고 오는 경우가 마을 세 집에 하나꼴”이라고 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느닷없이 왜 그러는지 속내를 훤히 꿰뚫어보면서도 싫은 기색이 없다. 자식들 원하는 대로 땅 팔아 나눠주면서 “그게 부모 마음”이라고 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뭔가 줄 수 있는 부모는 행복한 부모다. 자식을 가난 속에 두고 떠나는 부모 마음은 찢어진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김관식 ‘병상록’)
김관식은 재능과 독설, 기행(奇行)으로 전후(戰後) 한국 문단을 종횡무진한 천재였다. 그는 허위와 가식에 찬 문단 행사나 출판기념회에 나타나 판을 뒤엎기 일쑤였다. 느닷없이 국회의원에 출마해 장면과 대결하기도 했다. ‘허리 굽신거려/ 제왕의 문턱에 절하고 드나들며/ 밑구멍 핥으며’ 호의호식하던 정치판을 향한 분노의 표시였다. 그는 자하문 밖 홍은동 산비탈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도 기개와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한 점 비굴함 없던 그도 자식들에게만은 떳떳하지 못했다. ‘병상록(病床錄)’에 담긴 그의 심정은 그 어떤 부모보다 애틋하다.
어버이는 치매에 걸려서도 자식 걱정을 놓지 않는다.
‘정신과 병동 복도 끝/ 면회실에 마주앉았다/ 분별과 지남력이 바닥난/ 겨우내 다 파먹은 김칫독처럼/ 오광 떼던 화투장 팔공산 껍데기 희부연 공백처럼/ 그는 내면을 지우고 있다… 빈 독 속을 희부연 공백 속을 메아리처럼 울리며 돌아 올라오는 목소리/ 살 만큼 나는 살았다 내일이라도 간들 대수냐/ 남은 너희들이 걱정이다.’(홍신선 ‘아버지’)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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