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로 읽는 세상사
- 어떻게 오래 살 것인가
- 2050년 65세 이상 38.2%, 세계에서 가장 늙은 국가, 한국
illust 이경국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파고다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 겨운가
- 황지우 ‘거룩한 식사’
“처음엔 이름을 잊어먹고, 다음엔 얼굴, 그리곤 지퍼 올리는 것도 깜빡하고, 그 다음엔 지퍼를 내리는 것까지 잊어먹지.”
- 독일 법학자 레오 로젠베르크
오래돼도 맛이 변하지 않는 특별한 와인처럼 늙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이에게 늙는다는 것은 결코 고상하거나 유쾌한 일일 수 없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파고다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 겨운가.’
- 황지우 ‘거룩한 식사’
장수는 인간의 오랜 꿈이지만 수명에도 질(質)이 있다. 병치레로 골골하며 노년을 보내서야 오래 사는 의미가 무색하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오래 사느냐일 것이다.
한국인 평균수명은 78세7개월, 여자는 81세11개월이고 남자는 75세2개월이다. 1960년 평균수명이 여자 53세8개월, 남자 51세1개월이었으니 50년도 안돼 여자는 28년, 남자는 24년을 더 살게 됐다. 얼마 전 보건사회연구원은 질병과 장애 없이 건강한 삶을 누리며 사는 평균건강수명을 68세7개월로 집계했다. 평균수명과 비교해보면 보통 10년을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다 가는 셈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평균 6세9개월을 더 살지만 건강수명은 69세7개월밖에 안돼 남자 67세5개월과 2세 차밖에 안 난다. 관절염이나 우울증처럼 남자보다 질병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이 2050년 세계에서 가장 늙은 국가가 된다”는 통계청 전망도 달가운 뉴스가 아니다. 65세 고령인구 비중은 2005년 9.1%에서 2050년 38.2%로 높아져 세계 평균 16.2%의 갑절을 넘어설 거라고 한다. 80세 이상 초고령 인구 비중은 1.4%에서 14.5%로 폭증해 세계 평균 4.4%의 세 배를 웃돌 전망이다. 급속한 수명 연장 추세에 세계 최저 출산율이 겹친 탓이다. 젊은 세대가 노인을 부양하는 국가적 부담이 감당하기 어렵게 커진다는 얘기다.
이상적인 죽음의 모습으로 세간에 ‘9988234’라는 말이 나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3일 앓고 죽는(死) 것’을 뜻한다. 노화와 질병의 고통을 마지막 순간에 짧게 응축해 겪는다는 의미로 ‘병의 압축(compression of morbidity)’이라는 용어도 있다.
그 반대가 ‘스퍼터링(sputtering)’이다. 목숨을 겨우 유지한 채 서서히 죽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뇌 신경조직이 손상되는 치매, 이른바 알츠하이머보다 더 오래 고통스럽게 목숨을 이어갈 병은 없다. ‘노인의 저주’로 불리는 이 병은 거의 낫는 법이 없다. 보통 8년에서 10년, 길게는 20년까지 주변사람의 돈과 인내가 다 바닥나야 끝나는 수가 많다.
10여년 전 일본에서 ‘둘만이 살고 싶었다’는 TV다큐멘터리가 방영돼 열도를 울린 일이 있다. 어느 노부부가 실종되자 제작팀이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부부의 마지막 여행길을 추적해 재구성한 다큐였다.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혼자 수발하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할머니를 데리고 여행에 나선다. 자살여행이다. 부부는 둘만의 추억이 새겨진 곳을 찾아다닌다. 지닌 돈이 바닥나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이끌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 함께 죽는다.
이청준의 노모는 1996년 95세로 떠날 때까지 꽤 오래 치매를 앓았다. 1990년대 어느 겨울, 어머니 사랑이 극진한 이청준이 망각의 감옥에 갇혀 사는 어머니의 아기 같은 모습을 시인 정진규에게 들려줬다.
‘소설가 이청준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나긋나긋하고 맛있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슬픈 이야기인데, 그의 입술에는 끝까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깊이 내 가슴을 적셨던 아흔 살 어머니 그의 어머니의 기억력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즈음 말로 하자면 알츠하이머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난 설날 고향에 찾아 뵈었더니 아들인 자신의 이름도 까맣게 잊은 채 손님 오셨구마 우리집엔 빈방도 많으니께 편히 쉬었다 가시요 잉 하시더라는 것이었는데,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책을 나무라 하고 이불을 멍석이라 하는가 하면, 강아지를 송아지라고, 큰며느님더러는 아주머니 아주머니라고 부르시더라는 것이었는데…몸에는 몸으로 갇혀 있으시더라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빈틈도 행간도 없는 완벽한 감옥이 있더라는 것이었는데, 그건 우리의 몸이 빚어내는 눈물처럼 완벽한 것이어서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었는데, 그리곤 꼬박꼬박 조으시다가 아랫목에 조그맣게 웅크려 잠드신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자궁 속 태아의 모습이셨다는 것이었는데.’
- 정진규 ‘눈물’
우리나라 치매 환자는 50만명 선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선 75~84세 5명 중 한 명이, 85세 이상 노인의 42%가 치매를 앓고 있다. 2600만명인 세계 치매 환자는 2050년이면 1억6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은 아시아의 경우 1260만명에서 6280만명으로 증가해 세계 환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약도 없지만 몸과 머리를 활동적으로 쓰고 심장·혈관 질환을 막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라고 한다.
미당의 고향 고창, 서정주문학관 전망대 계단을 오르다보면 벽에 세계 이름난 산의 사진과 이름, 높이가 쓰여 있다. 미당이 치매를 막겠다며 3년 걸려 외웠다는 명산이다. 아침마다 40분씩 불경 외듯 암기하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생일달을 넘기면서 할머니는/ 변소출입을 못하신다/ 이제 아흔네 살 아득한 날들/ 일흔이 넘은 딸들이 각자/ 요일을 정해 놓고 집으로 가서/ 손발이 되어 할머니의 당번을 선다// 내게도 요강을 하나 구해 들고/ 할머니가 더 아프기 전에 한번 보러 오라는/ 엄마의 지친 목소리 저편으로// 나 또한 누군가의 손발이 되어 가는/ 요즈음, 지린내가 배어나는 방 안에서/ 사치스런 소망 하나 품어본다// 날마다 나 스스로를 살아가자고/ 나 혼자만의 손과 발로 걸어서 마지막 날에/ 축복처럼 당도하고 싶다고.’
- 이병금 ‘요강 하나 구해 들고’
아흔 넘은 어머니를 간병하는 칠순 딸들. 중년 손녀는 거기에서 생로병사의 절실한 실존문제를 본다. 치매 부모나 배우자를 수발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참담하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바로 자신도 얼마 안 있어 그런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자각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수명은 계속 늘어나겠지만 그건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것일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소망이자 염원이다. 치매는 거꾸로 교만한 인간더러 인간의 유한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하는 꾸짖음일지도 모르겠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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