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오대산 천년의 숲길 생명의 흙 밟으며...

세칸 2008. 1. 3. 11:56
詩로 읽는 세상사
 
오대산 천년의 숲길 생명의 흙 밟으며...
탐욕·화·어리석음 3毒을 잊는다

 illust 권오택  

 
절에 들 때까지,
삶의 뜨겁고 끈적거리는 욕망은
그렇듯 끈질기게 그대들 발길에 채이며
걸리적거리는 것이다
사천왕문 지나 절에 들어보라, 거기엔
뿌연 햇살로 가득 찬 넓은 사각 마당이
깨끗이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똥자루가 확, 터지는 느낌 같은 것인데
해탈, 해탈이란 것이 뭐 그런 것이 아닌지
삶의 묵은 똥자루가 확, 터지는.
 
엄원태 시인의 ‘표충사 가는 길’에서
 
강파른 도시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조바심을 먹고 산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이리 떠밀리고 저리 차이며 하루도 느긋한 날 없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늘 불안하다. 안절부절못한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오규원 ‘죽고 난 뒤의 팬티’
 
교통사고는 도시의 폭력적 일상을 상징한다. 그 무자비한 손찌검에 몇 차례 얻어맞고 주눅 든 시인은 허구한 날 팬티 걱정을 한다. 죽고 난 뒤 팬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시인 스스로도 소심증을 어이없어한다. 그래도 살면서는 물론이고 죽은 뒤까지 남의 눈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게 오늘 우리네 삶이다.
 
고달픈 도시의 삶이 집약되는 곳이 지하철이다. ‘지옥철’이라는 별명 그대로 매일 아비규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이다. 사람들은 숨도 못 쉬도록 꽉꽉 우겨 넣은 지하철 전동차에서 문명에 시달리고 인간에 치여 비명을 질러댄다.
 
‘…영자야엄마나여기있/ 어밑에아기가깔렸어/ 요숨막혀내핸드빽내/구두나좀내리게그만/ 밀어어딜만져이짐승/ 쌍년아야귀찢어져손/ 가락에귀걸이걸렸어/ 어딜자꾸만주물러소/ 새끼침튀겨개년말새….’-김기택 ‘우리나라 전동차의 놀라운 적재효율’
 
어느 주말 강화도 다녀오는 길에 제법 이름난 절에 들렀다. 그 넓은 주차장이 꽉 차서 주변 도로까지 차들이 넘쳤다. 절까지 이어진 가파른 언덕길엔 동동주며 빈대떡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갖가지 주전부리를 벌여놓은 좌판 아주머니들의 호객 소리도 요란하다. 진입로가 사찰 땅이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찌든 세상사 잠시나마 털어 보려고 온 절이 이래서야 되겠나 싶었다. 엄원태 시인이 가 본 ‘표충사 가는 길’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여름철 주말이면/ 표충사 가는 길은 늘 막힌다/ 햇살 아래 주차장은 삶에서 한참 벗어나 있고/ 절로 가는 길은 양쪽에 늘어세워진 차들로 비좁다/ 성긴 참나무숲 그늘의 길가에는/ 도토리묵, 막걸리, 부침개, 국화빵이며/ 산나물, 고사리, 산초 열매까지/ 주전부리 먹거리를 파는 아낙네들이/ 땀을 흘리며 화덕들을 하나씩 끼고 전을 부치고 있다/ 가다 보면 그 아낙네들 팔려는 먹거리들이/ 질리도록 널려 있다는 느낌이 뜨거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절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숙변 낀 창자 같다/ 일주문을 지날 때 근처 숲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다리 밑 개울가에서 사람들은 더위에 벗어제치고들 있다/ 개들이 지쳐 헐떡이며 어슬렁거리고/…/ 절에 들 때까지, 삶의 뜨겁고 끈적거리는 욕망은/ 그렇듯 끈질기게 그대들 발길에 채이며 걸리적거리는 것이다/ 사천왕문 지나 절에 들어보라, 거기엔/ 뿌연 햇살로 가득 찬 넓은 사각 마당이/ 깨끗이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똥자루가 확, 터지는 느낌 같은 것인데/ 해탈, 해탈이란 것이 뭐 그런 것이 아닌지/ 삶의 묵은 똥자루가 확, 터지는.’
 
시인이 간 절 길은 사바세계보다 더 사바세계 같다. 번들거리는 삶의 욕망이 뜨겁게 끈적대는 길은 숙변 낀 창자처럼 갑갑하다. 온갖 사람이 옴짝달싹 못 하게 뒤얽혀 비명을 질러대는 도시의 만원 지하철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정작 시인이 말하려는 건 그 길의 끝이다. 사천왕문 지나 절에 들어섰을 때 깨끗하게 비어 빛나는 마당을 보는 감동. 한 방에 숙변이 씻겨 내려가듯 문 바깥 세속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 해탈(解脫)이라는 게 뭐 거창한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것 아니겠냐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이 굳이 번잡스런 절 진입로를 길게 묘사한 것도 문 하나 사이에 두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 위안과 평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우리 곁엔 아름답고 고즈넉한 절 길이 더 많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어렵지 않게 찾아들 수 있는 길들이다. 일주문 지나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서는 800m 길은 500년 된 전나무들이 우거져 한낮에도 해가 들지 않는다. 해질녘이나 동틀 무렵, 기운 햇살 사이로 반짝이는 전나무 숲을 거닐며 청량한 회향(檜香)을 들이쉬면 몸과 마음이 절로 정화된다. 영주 부석사 은행나무길, 부안 내소사 전나무길, 순천 선암사 전나무·참나무길, 사하촌(寺下村) 괴목마을에서 송광사 가는 숲길, 그리고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조계산 길도 일품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오대산 천년의 숲길 걷기대회’가 열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오대산 흙길 8㎞를 사람들이 걸어 올랐다. 1300년 전 신라 자장(慈藏)율사가 산문을 연 이후 숱한 고승들이 걸었던 구도(求道)의 길이다. 월정사는 4년 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이 길을 포장하겠다고 나서자 자연 그대로 숲길을 보존하자며 해마다 걷기 행사를 열고 있다.
 
내내 계곡을 거슬러 가는 20리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속세를 잊었다. 연둣빛 신록에 눈을 씻고 오대천 맑은 물소리를 귀에 담으며 넉넉한 마음으로 흙길의 생명을 호흡했다. 소동파(蘇東坡)의 오도송(悟道頌) 그대로다. ‘계곡의 물소리는 곧 부처님 설법이요(溪聲便是廣長舌)/ 푸른 산빛은 청정한 부처님 법신 아닌가(山色豈非淸淨身).’ 탈속(脫俗)의 감흥을 불자(佛子)만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향적사 가는 길 어디인가(不知香積寺)/ 몇 리 구름 덮인 산을 오른다(數里 入雲峯)/ 옛 숲 우거지고 길은 없는데(古木無人徑)/ 깊은 산 어디선가 종이 울린다(深山何處鐘)/ 조약돌에 부서지는 시냇물 소리(泉聲咽危石)/ 청솔 사이 햇살 서늘하고(日色冷靑松)/ 어스름 연못에 서린 정적은(薄暮空潭曲)/ 편안한 마음이 사념을 눌렀음이라(安禪制毒龍).’-왕유(王維) ‘향적사 가는 길(過香積寺)’
 
절길 걷기엔 말이 필요없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고요한 이 시간, 이채로운 숲 냄새를 맡으며 느릿하게 걸으면 그만이다. 속도와 소음에서 느림과 묵언(默言)으로, 그 무언의 공간에서 탐욕(貪) 화(瞋) 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을 잠시 잊는다. 걸음도 마음도 절로 가벼워진다.
 
헛된 애증에 휘둘리며 애면글면 사는 우리네 속인(俗人)들이다. 먼지 이는 저잣거리를 헤매 살면서 평생 마음에 쌓인 때를 단숨에 벗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절 집 가는 길 하루만이라도 헛일, 헛걸음, 헛말을 삼갈 수 있다면 그 빈 자리에 부처가 드실지 모른다.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다는 참나(眞我)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