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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아버지 사이 그 아득한 행간

세칸 2007. 12. 25. 12:01
詩로 읽는 세상사
아들과 아버지 사이 그 아득한 행간

아버지 곁에 묻힌 박인철 대위, 父子의 가슴 아픈 화해

 

illust 이경국  

 
거울을 보다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아들에게 아버지는 흔히 넘지 못할 장벽이거나 원망의 대상이다. 조정래는 아버지가 대처승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30여년 만에야 고향 절집을 찾아간 뒤 승려의 아들임을 처음 글로 고백했다. 사회와 역사 인식에 눈뜨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됐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아버지의 수난에 얽힌 의문과 질문에 답을 찾아 나선다. 그 결실이 ‘태백산맥’이다.
 
순천 선암사 부주지였던 아버지는 해방 후 사찰 혁신운동을 벌이다 ‘여순반란사건’ 와중에 빨갱이로 몰렸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절에서 쫓겨났다. 조정래는 아버지의 수난사를 ‘태백산맥’의 법일 스님에게서 되살렸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로부터 “네 아버지가 ‘태백산맥’ 보시고 자식 키운 보람 있다고 하셨니라”는 말을 듣고 불효를 뼈저리게 앓았다고 했다.
 
‘어디 계셔요// 인공 때 집 떠나신 후/ 열한 살 어린 제게/ 편지 한 장 주시고는/ 소식 끊긴 아버지// 오랜 가뭄 끝에/ 붉은 강철 빠져나가는/ 서녘 하늘은/ 콩깍지동에 숨겨놓은/ 아버지의 깃발이어요// 보내시라던 옷과 구두/ 챙겨드리지 못하고/ 왈칵 뒤바뀐 세상에서/ 오늘토록 저녁해만 바라고 서 있어요// 너무 늦은 이 답장/ 하늘 끝에다 쓰면/ 아버지 받아 보시나요.’
- 이근배 ‘노을’
 
소년이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남로당원이던 아버지는 6·25가 나자 숨겨뒀던 인공기를 꺼내 들고 길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에게 그 깃발은 어머니와 세 남매의 행복을 앗아간 비극의 뿌리이며 제 안에서 슬픔으로 펄럭이던 고통의 진원이었다. 가족에게 수난과 고초를 안겨 준 아버지에게 시인은 반 백 년 세월이 지나서야 답장을 쓴다. 원망 대신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띄운다.
 
얼마 전 KF-16 전투기 추락사고로 숨진 박인철 대위도 어렸을 땐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 박명렬 소령은 박 대위가 다섯 살 때 팬텀기를 몰고 훈련에 나섰다가 추락해 순직했다. 어린 아들은 조종복 차림의 빛바랜 사진과 희미한 기억으로만 아버지를 기억할 뿐이었다. 박 대위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사춘기 때 고생하는 홀어머니를 보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평범한 직장인이 돼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모시며 살겠다는 다짐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그리움은 ‘빨간 마후라’에 대한 동경으로 바뀌었다.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재수까지 하며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박 대위는 작년 고등비행 수료식에서 “아버님이 못다 지킨 하늘, 이제부터 제가 책임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지난 현충일엔 국립현충원의 아버지 묘소를 찾아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릴 때가 많다.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훌륭한 조종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아들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를 따라 산화(散華)해 아버지 곁에 묻혔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영원을 함께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부자(父子) 화해다.
 
아버지를 한사코 부정하던 아들도 어느 날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시인 박형준도 어릴 적 가난하고 초라하기만 하던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그런 그가 신경림의 시를 읽다 왈칵 목이 메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아버지의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수두로 온몸이 불덩이 같은 그를 둘러업고 읍내 병원까지 뛰었다. 달은 차고 맑은데 숨을 헉헉거리며 들판을 내달리던 아버지가 잠시 그를 내려놓고 투박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기억이다. 그는 어려서 호되게 아파서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자기처럼 우리 시대 많은 자식이 저마다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했다.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야, 어디 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안상학 ‘아배 생각’

 

아버지는 무심한 듯, 초연한 듯 무뚝뚝했다. 발고린내처럼 불편했다. 아버지는 함부로 사는 아들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생뚱맞게 슬쩍 핀잔하곤 하셨다. 그러나 그때 속으론 얼마나 걱정하고 속을 끓이셨던 것일까.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투박한 안동 사투리에 담겼던 곰삭은 정을 그리워한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몸을 웅크리고/ 가끔 마른기침을 하신다// …내 나이 한 살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 섣달 그믐밤// 긴 밤 꿈을 꾸며/ 꿈을 잃어가며 밤새도록 지금 나는/ 아버지가 되어 가는 중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 아득한 행간에 누워.’           
- 이기윤의 ‘섣달 그믐밤’

 

자식을 키워 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섣달 그믐밤’도 아버지가 돼 비로소 아버지 마음을 깨닫는 아들의 이야기다. 덮고 자던 이불을 아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 말 못하는 아버지. 한평생 주기만 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그리움. 아들은 제 아들과 잠자리에서 아버지의 그 춥고 속 깊은 고독을 체감한다.

 

아들은 인생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볼 눈을 뜨게 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실수도 실패도 해보고 후회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결코 완벽한 존재일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 연민은 아버지를 극복하는 디딤돌이다. 그러나 많은 자식이 아버지의 손붙잡기를 머뭇거리다 떠나보내고 만다. 미완의 화해는 그 다음 대(代)에도 물림하기 십상이다.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