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로 읽는 세상사
- 아들과 아버지 사이 그 아득한 행간
아버지 곁에 묻힌 박인철 대위, 父子의 가슴 아픈 화해
illust 이경국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 이근배 ‘노을’
박 대위는 작년 고등비행 수료식에서 “아버님이 못다 지킨 하늘, 이제부터 제가 책임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지난 현충일엔 국립현충원의 아버지 묘소를 찾아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릴 때가 많다.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훌륭한 조종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아들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를 따라 산화(散華)해 아버지 곁에 묻혔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영원을 함께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부자(父子) 화해다.
-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시인 박형준도 어릴 적 가난하고 초라하기만 하던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그런 그가 신경림의 시를 읽다 왈칵 목이 메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아버지의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수두로 온몸이 불덩이 같은 그를 둘러업고 읍내 병원까지 뛰었다. 달은 차고 맑은데 숨을 헉헉거리며 들판을 내달리던 아버지가 잠시 그를 내려놓고 투박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기억이다. 그는 어려서 호되게 아파서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자기처럼 우리 시대 많은 자식이 저마다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했다.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야, 어디 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안상학 ‘아배 생각’
아버지는 무심한 듯, 초연한 듯 무뚝뚝했다. 발고린내처럼 불편했다. 아버지는 함부로 사는 아들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생뚱맞게 슬쩍 핀잔하곤 하셨다. 그러나 그때 속으론 얼마나 걱정하고 속을 끓이셨던 것일까.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투박한 안동 사투리에 담겼던 곰삭은 정을 그리워한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몸을 웅크리고/ 가끔 마른기침을 하신다// …내 나이 한 살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 섣달 그믐밤// 긴 밤 꿈을 꾸며/ 꿈을 잃어가며 밤새도록 지금 나는/ 아버지가 되어 가는 중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 아득한 행간에 누워.’
- 이기윤의 ‘섣달 그믐밤’
자식을 키워 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섣달 그믐밤’도 아버지가 돼 비로소 아버지 마음을 깨닫는 아들의 이야기다. 덮고 자던 이불을 아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 말 못하는 아버지. 한평생 주기만 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그리움. 아들은 제 아들과 잠자리에서 아버지의 그 춥고 속 깊은 고독을 체감한다.
아들은 인생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볼 눈을 뜨게 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실수도 실패도 해보고 후회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결코 완벽한 존재일 수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 연민은 아버지를 극복하는 디딤돌이다. 그러나 많은 자식이 아버지의 손붙잡기를 머뭇거리다 떠나보내고 만다. 미완의 화해는 그 다음 대(代)에도 물림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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