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이런저런 이야기들

名宰相 黃喜와 伴鷗亭

세칸 2007. 12. 24. 19:18

名宰相 黃喜와 伴鷗亭



 

 


임진강의 갈매기를 벗 삼다

Image_View황희정승은 27세 성균관 학관으로 관직을 시작해 놀랍게도 약 60년간이나 관직생활을 했다. 그는 세종 9년(1427년)에 좌의정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휘감아 도는 자락인 파주 문산 사목리의 ‘반구정’에 칩거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69세에 영의정에 오르면서 세종을 보필하여 18년간 태평성대를 이끌게 된다.
87세까지 관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90세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장수 기록이다. 황희의 청렴과 무욕정신 그리고 타인의 배려, 작은 일에 집착하지 않는 삶의 자세 등등이 장수의 비결인 듯하다.

반구정은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된 정자로서 임진강변의 높은 둔덕에 위치한 주변경관과 매우 잘 어우러진다. 90세에 세상을 떠난 황희가 긴 세월의 마지막을 기러기와 갈매기 그리고 임진강의 물빛의 변화와 바람을 벗 삼아 보낸 곳이다. 반구정 주변의 조경이 깔끔하지 못하고 야산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황희정승이 사치스런 것과 거리 먼 생활을 실천한 분으로 이런 느낌 또한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도 든다.

이곳은 전국 8도의 사림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 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했으며,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됐다. 반구정 앞에는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 2년)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仰止臺)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통풍이 잘 되며 맞배지붕 형식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의 공포형식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에 직사각형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1976년 경기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반구정은 임진강변 언덕에 지어진 정자인데 임진강 너머로 송악산이 보이고 철마다 찾아드는 철새무리의 비행이 지는 저녁노을과 어우러지면 보기 드문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비록 복원된 작은 정자지만 옛날 정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불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보전돼 내려 왔다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복원돼 그 자리에서 황희를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듯 반구정 주위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멀리 임진강 너머로 보이는 송악산자락이 펼쳐 있고 빈 돗단배에 내려앉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분단비극의 통곡으로 들린다.

 
뛰어난 인품과 어진 인성의 실천자

황희에 대해서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온다. 유품이라곤 달랑 몇 개 밖에 없는 황희 유물전시관의 벽면에 적혀 있는 일화를 소개해 보자.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던 시절, 세종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사전에 연락도 없이 황희의 집을 찾아왔다. 그때 마침 황희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국왕의 방문에 허겁지겁 상을 한쪽으로 물리고 국왕을 맞았다. 세종은 황희의 집에 들어서면서 정승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초라한 모습에 이미 놀랐다.
그런데 방이 들어서니 바닥에는 장판 대신 멍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먹다가 치워 놓은 밥상에는 누런 보리밥에 된장과 풋고추 너덧 개만이 놓여 있었다. 세종은 민망해하는 황희를 보고, "경은 등이 가려우면 시원하게 긁기는 좋겠소. 자리에 누워 비비기만 해도 될 테니까" 하고 농을 하고는 돌아갔다. 이때 사실 세종은 황희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막내딸의 혼수를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황희의 집을 찾은 것이었다. 다음 날 세종은 손수 공주의 수준에 준한 혼수를 황희의 집으로 보냈고, 이것은 이후 가난하여 결혼 준비를 하기가 어려운 관리들에게 국왕이 혼수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또 하루는 당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이석형(李石亨)이 황희의 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황희가 책 한권을 꺼내 놓고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석형은 몇 번 거절을 하다가 황희가 하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제목을 써 주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저 혼자 놀다가 방금 이석형이 제목을 써 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것을 본 황희는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거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보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석형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황희는 미안한 마음으로 이석형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방문 밖에서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황희의 방에서 오줌을 싼 아이는 제 어미가 일하는 틈에 그 방으로 들어온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하고 따뜻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윤형운 기자 yoon@woodkorea.co.kr